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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격주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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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Aug 23. 2021

2021년 32-33번째 주

빈에서 써보는 격주정리

물론 그 사이에 한국에도 다녀왔고 한국에서 여행도 다녀왔고 중간중간 새 동네 주변도 다녔으니 아주 여행을 안 다닌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나라에 와 여행자 느낌이 들게 돌아다니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정확히는 1년 만이다. 왜냐하면 지난 주 일요일이 내가 독일로 이사온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나는 일년 뒤 빈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같은 수트케이스를 들고. 나는 지금 빈에 있는 Kleines Cafe에서 이걸 쓰고 있다. 톰웨이츠, 더스미스가 흘러나오고 이 작은 카페엔 역시나 에어콘이 없다. 아직도 낯선 독일어가 더 낯선 엑센트와 함께 들려오지만, 바로 옆엔 나이가 지긋히 든 독일인 여행객들이 독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마냥 낯설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독일인의 독일어도 남의 나라 와서 자기 나라 이야기하는 것도 막 익숙한 건 아니라서, 이렇게 아주 오랜만에 여행객으로서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좋은 기회로 독일어를 배우러 오스트리아에 왔고, 덕분에 많은 독일인들에게 “도대체 왜 독일어를 배우러 (왜 독일을 놔두고) 오스트리아에 가냐”는 소리를 백번 들었다. 그냥 여기 아닌 어딘가에 가고 싶었던 내 마음을 알았나 몰라. 마침 상사가 추천했던 크래쉬 코스 장소 예시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였어서 아주 이상해보이지는 않았을 거다. 아무튼 거의 처음으로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고 독일어를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제법 긴 시간을 독일에서 보냈고 독일어 수업도 은근 들었는데도 독일어를 배운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이런저런 문법을 배우고 단어와 표현들을 알지만 그걸 정말 안다고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선 확신이 안 들었었는데, 첫 주를 도이치도이치도이치하게 보내고 나니 이제 좀 이 언어를 배운다는 느낌이 들고 흩어져있던 지식들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꾸 “너 생각보다 잘하는데? 다 아는데?”하며 계속 응원하는 척하며 어려운 걸 던져주는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가고 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독일어를 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하나다: to prove that I am not stupid. 어떤 지역에 오래 살면서 그 지역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커버레터에 fast learner를 계속 쓰고 싶은 마음과 이왕 사는 나라의 장점을 최대한 누리기 위한 경제적인 이유에서 독일어를 좀 잘 해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나는 드디어 그럴싸한 변명들을 제쳐두고 앞으로 1년은 좀 열심히 독일어를 연마해보기로 다짐했다. 물론 완벽한 독일어를 구사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없다. 그냥 대화를 이어나가고, 업무를 해내고, 독일인들이 나를 위해 영어를 써주면서 난 참 나이스해 하는 생각을 할 기회를 주지 않을 정도면 충분하다.  


이 생각이 확고해진 데는 마침 독일어 배우기가 즐거워져서다. 독일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독일어는 무척 특별하고 배우기 힘든 언어처럼 말하는데 (물론 나도 얼마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고) 이번 기회로 배운 건 이것도 그냥 한 언어라는 점. 그냥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새로운 언어에 불과하다. 물론 조금 배우고도 쉽게 말하기 시작할 수 있는 영어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결국은 언어다. 아마도 유난히 우리나라에서 독일어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아마도 한국어 화자로서 독일어를 배우는 데 자료나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몇몇 단어를 찾아봤는데 영어로 찾았을 때보다 정확도가 떨어졌다. 그래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영어를 통해 독일어를 배우는 듯 하다. 암튼 여전히 독일어 쩌리지만 좀더 빌드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over the hump 한 느낌. 


빈에서 배우는 독일어는 좀 다르다. 제법 귀여운 오스트리안 독일어 단어를 배우는 것도 재밌고 (예를 들면 자꾸 -chen 붙일 곳에 -kerl을 붙인다) 억양이 묘하게 강원도 사투리 같아 뭔가 동글동글하게 들린다. 큰 나라 출신들의 나라에 대한 자부심과 다르게, 작고 긴 역사를 가진 나라의 딴딴한 나라사랑이 느껴진다. 그리고 알고 보니 내가 사는 동네의 사투리인 단어도 많이 알게 되었다. 아무튼 새로운 걸 알아가는 재미가 솔솔. 


집중코스다 보니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선 굉장히 다양한 연령대. 한 열일곱살이 자기 수업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나이가 많다며 (알고 보니 그들은 스물 넷, 다섯…) 놀 사람이 없다고 같이 놀자고 해서 엄마 마음으로 흐뭇했다는. 부모님이 보내서 온 것 같은 “청소년”들과 독일어가 학업에 필요한 듯한 대학생들, 그리고 휴가거나 트레이닝으로 온 나 같은 사람들. 한 분은 EU의회에서 일하는 분이었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나중에 EU에서 한번 일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실제로 비EU시민도 일하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분은 휴가를 이렇게 집중 어학 코스를 다니면서 보낸다고. 이번 주엔 빈에서 독일어, 다음 주에는 피렌체에서 이탈리아어. 배우면서 보내는 휴가도 뭔가 재미있을 것 같고 이렇게 해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꼭 언어가 아니어도, 이탈리아에서 요리 수업, 브라질에서 댄스 수업, 중국에서 캘리그라피 수업, 인도에서 요가 수업 같이. 


그리고 또 다른 단상은, 지금 이 시기에 30대가 되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 수업하면서 만나는 어린 친구들ㅋㅋㅋ이 신기하고 안됐다. 10대는 심히 정신이 없고, 20대의 요란함과 불안정함이 낯설다. 나도 분명 굉장히 vulnerable한 20대를 보냈지만 지금 20대 정도는 아니다.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정보들이 만든 이 시대의 10-20대는 정말이지 너무 안 됐다. 물론 어느 세대나 있는 “난 친구”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전엔 그래도 스마트폰 대신 주변을 둘러보면서 말할 상대를 찾았고 내 연애를 굳이 다른 사람의 연애와 비교하기 위해 구글을 뒤지지 않아도 되었었다. 보그와 코스모폴리탄을 통해 미디어가 강요한 몸들을 봤지만 그렇다고 내 몸을 그렇게 전시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쓰고 보니 엄청 꼰대같은데, 정보의 홍수에서 누군가는 재밌다며 서핑을 하지만 다수는 지하창고가 물에 잠기고 살 곳을 잃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그냥 그런 생각을 오랜만에 어린 친구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했다. 어린 친구들이 소셜미디어한테 너무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당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이겨낼 힘을 잘 길렀으면,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지금 배우는 1:1 선생님이 제법 재미있게 수업을 진행하는데, 안그래도 생각만 하고 있던 한국어교사 자격증에 대해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 유럽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면 내가 하겠다, 뭐 이런 마음 :)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 완전 한국인인가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 다닐 때도 국어를 제일 좋아했고 요즘 마침 한국어를 불완전하게 구사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 배워보고 싶은 마음. 대충 알아본 결과, 이것저것 비용을 따져보면 백만원 이내일 듯 한데 한번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진행해보는 걸로. 


아 그리고 이 애매한 곳에서, 그것도 코로나차이트에 이렇게 1년을 보낸 소회: 어디 있어도 힘들었을 시기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고난, i.e., 집 문제,을 겪어가며 보내면서 덜 지루하게 보낼 수 있어 좋았다 - 물론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변화를 선택할 때마다 배우는 게 있어서 변화 중독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석사하고 논문쓰며 일하며 살던 독일은 사실 독일이라기보다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다니는 학교라는 느낌이 더 강해는데, 이번에는 확실히 “독일”이다. 그게 무엇이든 배워가고 있고 알아가고 있다. 물론 두 번째로 와 살고 있는 이 곳에서 나라라는 선택지가 그저 공기 같은 환경에 불구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미세먼지처럼 호흡기에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어디서든 잘 지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의 공기는 나쁘지 않고, 언제까지 그리 느낄지 모르겠지만 혹시 이게 나빠진다면 언제나 그랬듯 가차없이 다음 목적지를 찾을 거다. 


아참, 마지막에 좀더 욕심을 부려 지금은 호스트 패밀리네서 지내고 있는데 마침 이 집이 제로 웨이스트까지는 아니어도 굉장히 지속가능한 삶을 추구하는 집. 작은 가든에 닭과 메추리가 있고 포도나무에 온갖 허브와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비누로만 샤워하는 것 같고, 집주인 아주머니는 가든에서 난 것들로 잼이나 스프를 만들어 선물하는 게 취미이신 듯 하다. 은퇴하셨지만 어린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있고 이 두 모녀를 통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재미가 있다. 이 집에 인터넷은 있지만 와이파이는 없다. 아마도 아이 때문인 듯 한데, 덕분에 나도 디지털 디톡스 중이다. 


마침 칠칠치 못한 나는 식당인지 기차인지에서 킨들을 잃어버렸고, 아쉬운 대로 지나가다 본 중고서점에서 폴 오스터의 invisible을 사서 재밌게 읽고 있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어떻게든”이 내 삶을 관통하는 무언가인 듯 하고 오랜만의 여행자 마음 덕분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은 카페에서 나와 슈타트파크에서 마지막 여름 햇볕을 잘 활용하고자 스카프를 깔고 누워 이걸 마무리하고 있다. 내일부터 비가 온단다. 돌아가면 비타민D를 주문해야겠고 옷장에서 자켓들을 꺼내 바람을 맞혀야겠다. 


여행의 순간을 좋아하고 여행자인 상태를 좋아하지만 더 이상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이번에 들었다. 이제는 아무거나 허겁지겁 먹듯 모든 걸 표면만 보며 소비하지 못하게 되었고, 좀더 목적 있는 여행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아직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가 날 기다리고 있으니 섣불리 말하진 말아야겠다. 휴가를 내고 남미로 가 스페인어를 배운 사람을 벌써 두 명이나 만났는데 둘다 강추하는 걸 보니 언젠가는 꼭 해봐야지. 우선 하던 독일어나 좀 마저 하고. 


일주일 쉬었다고 지난 1년 동안 하던 일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진짜 디스커넥션과 여름휴가는 이런 거겠지. 휴가 일수를 쓰지 않고 이렇게 휴가처럼 보내는 여름이 소중하고 돌아가면 어떤 코로나 규제 속에서 살게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또 다시 락다운이 오더라도 이제야 집다운 집에서 평온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준비가 되었다. 수영하고 공원에서 책 읽으면서 태운 피부가 살짝 쓰라리는 걸 보니 여름을 몸에 잘 담아냈나보다. 가을이여, 언제고 환영이지만 너무 서둘러 오지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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