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노멀
벌써 9월이다. 9월에 새로운 시작을 한 경우가 많아 9월이 1월보다 더 한 해의 시작처럼 느껴진다. 더워서 잠을 설쳤던 몇몇 여름밤이 있었지만 그렇게 무더운 여름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가을이 오고 있는 중인가보다. 한 주는 한량 학생이었고 다른 한 주는 다시 일터로 돌아온 주였다. 무거워진 수트케이스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좋았다. 집이 가까워져 올 때마다 마음이 놓이기 시작하면서, 돌아온 집 문을 열고 제자리에 있는 가구들과 물건들을 보고선 안심이 되었다. 도둑맞았을까봐 걱정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아무 일도 안해도 되는 집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떠나기 전까지도 어수선했던 집인데 돌아와서 보니 혼돈 속에서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두고 있다. 일은 살살할 마음이었는데 의외로 바빴고 미국 시간으로 참석해야 했던 컨퍼런스 덕분에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했던 날도 있었다.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건 참 든든한 일이다. 올라갈 혹은 나아갈 자리를 찾는 건 별개의 문제겠지만, 아주 말아먹지만 않는다면 거기 그대로 있을 내 자리에 대한 확신이 소중했던 2주였다.
회사가 새로운 근무방식을 공지했다. 물론 코로나가 아직도 남아있는 현재는 코로나 관련 공지가 특별법 우선의 원칙처럼 더 중요하겠지만, 앞으로는 원한다면 전체 근무시간의 60%를 재택으로 돌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이는 출근을 하고 싶거나 출근이 필요한 직무도 고려한 것. 나를 제외한 우리 팀은 다들 하우스에 살고 있고 오피스로 쓸 방이 다 별도로 있어서 굳이 얼굴보고 할 미팅이 아니라면 출근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감사 기능이 있는 팀이라 거의 별도의 2인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타 팀과의 비업무적인 교류가 딱히 필요하지 않은 편. 전에 팀 내에서 이야기했을 때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출근하는 걸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두 번은 출근을 해야 하려나 싶다. 이 공지 앞에는 독일 내에서라는 단서가 붙어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재택을 하는 건 우선 노!라는 이야기다. 예전 회사에는 스페인에서 겨울 근무를 하는 스웨덴 아저씨가 하나 있었는데, 전문분야여서 은퇴 후 계약직으로 일하는 분이었고 은퇴 후 삶의 좋은 모델을 제시해주셨었다. 아무튼 이건 안된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공지였다. 사내 힘의 다이나믹은 이런 재택이 놈이 된 시대에서 어떻게 작용하게 될까. 사람들은 어떻게 교류해나가고 다른 가능성을 찾아가며 자기계발을 하고 기회를 만들어나갈까. 당장은 변하는 것 없이 아마도 계속 재택 근무를 이어가겠지만, 앞으로 이런 새로운 시도가 어떻게 정착해나갈지 궁금하고 한편으로는 기대가 된다.
지금 살고 있는 도시에 거주지를 등록하고 산 지 벌써 3개월째지만, 몇몇 바, 카페, 레스토랑을 간 걸 제외하고는 제대로 이 곳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없었다. 물론 여기저기를 제법 걸어다녀서 지리는 익숙해졌지만, 이 곳을 여행자의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마침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시기라 나라면 어디를 갔을까 생각해보며 지도를 살펴보았다. 다른 나라의 도시를 열심히 돌아다니다 오니, 내가 사는 이곳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지도에 열심히 마크를 해가며 갈 곳을 생각해보고 있다. 어제는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는 기대보다 좋았고, 그 큰 건물에 관람객보다 일하는 사람들이 많게 느껴질 정도로 한산해서 더 좋았다. 크고 작은 갤러리들도 많아 기회가 되는대로 둘러볼 예정이다. 앤틱샵들도 제법 있어서 심심한 주말에 하나씩 가봐야지 싶었다. 굉장히 유럽유럽한 건물들 사이로 여행객들이 젤라또를 먹으며 돌아다니는 걸 구경하다가 다시 고요한 주택가에 있는 내 집으로 향하는 느낌이 좋다.
아직도 동쪽 독일 지역을 여행할 때 위축이 된다는, 남미에서 온 대학원 동기가 적어도 인구 수가 백만이 되는 도시에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도시마다 면적이 다르니 밀집도와는 별개겠지만, 그 정도는 되어야 다양성도 있고 사회적인 인프라도 갖춰져 있고 적당한 익명성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 있으니 나도 이 친구의 기준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동시에 백만 이상이 살아가는 도시의 혼잡함이 가끔은 버겁기도 하고 오십만에서 백만이 된다고 해서 다양성이 더블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선택지가 있을 때 단순히 도시의 사이즈가 크다고 그곳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 고민을 계속 하는 이유는 어쩌면 재택의 자유가 주거지 선택의 자유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물론 어렵게 자리잡은 집이라 당분간 이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나에게 적합한 도시를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예정. 다음 주는 독일에서 제일 큰 도시인 베를린에서 재택+주말 여행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다시 한번 베를린과 나의 합을 점검해보려고.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공간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 지친 우리 모두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주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결국 이 이야기를 독일의 남자 저널리스트를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이 좀 별로지만 메시지 자체는 그와 상관없이 유효하다.
이 책에는 많은 예시와 인용들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는 트럼프가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앞줄에 서겠다고 한 총리를 밀친 사건과 그 사건을 두고 한 정치풍자가가 트위터에 이렇게 쓴 메시지였다: "하하. 뭐 이런 저급하고 저능한, 개똥 같은 인간이 있나." 트럼프가 무례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 건 사실이지만, 그걸 저렇게 표현할 필요는 없었다. 저자는 설명을 이렇게 이어간다. "개인적으로 나는 거짓말쟁이를 거짓말쟁이라고 부르고 인종 차별주의자는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지칭하며, 무능하면 무능하다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진흙탕 속으로 간다고 나까지 같이 빠질 필요는 없다. 물론 이 태도가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이게 가능한 순간이 얼마나 될까.
"어리석은 사람과 토론하지 마라. 그들은 당신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린 뒤, 숙련된 기술로 당신을 두들겨 팰 것이다." - 마크 트웨인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표현할 언어가 부족하거나 채널이 허락하지 않아 우아하고 품위있는 방법을 택할 수 없는 상황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대상을 고려하며 모두의 디그니티를 최대한으로 지킬 수 있는 선택을 하고자 노력한다면, 이제 더이상 새롭지도 않은 이 의사소통수단이 주는 장점을 더 잘 활용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원래부터 그래도 되는 건 없다. 그 말에 숨어 그러기를 선택한 내가 있을 뿐. 불편하고 복잡하고 분노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품위있는 언어와 행동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동일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실제로 더 많이 만나보고 싶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년 3월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뉴노멀. 이제야 그 말뜻을 좀 알 것도 같다. 책상과 높이가 맞지 않는 암체어를 계속 근무용으로 쓰다가 이러다간 자세가 망가질 것 같아 허리를 세우고 앉을 수 있는 의자를 구매했다. 절대적인 양을 줄이면서 소화가 잘 되는 것들을 위주로 밀 플랜도 준비 중이다. 날이 추워질 테니 스프 위주의 저녁과 채소가 많이 포함된 점심을 생각하고 있다. 주중 12시부터 1시도 별다른 미팅이 없으면 달리기하고 샤워하는 시간으로 블락해두었다.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자꾸 까먹게 되는 언어공부에도 시간을 고정하여 꾸준히 해나가기로 했다. 이 배움의 시간이 너무 늘어지지 않았으면 해서 겨울 휴가를 보내고 와서는 B2 시험도 보려고 계획해두었다. 가능하면 사람들과의 교류도 주기적으로 하려고 생각 중이다. '코로나가 끝나기만 하면' 같은 전제로 미뤄둔 것이 이젠 없다. 먼 곳으로 여행 가고 싶은 게 하나 있지만, 딱히 코로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시급한 계획은 아니다. 누가 보면 굉장히 목표 지향적이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사실 알콜 소비량에 일종의 제재를 가해야 할 타이밍인데 아직 거기까진 못 갔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아침에 일어나 잘 씻고, 맛있는 커피를 내려서 뉴스도 듣고 읽고 나서 일자리인 책상으로 향하고, 주어진 근무 시간엔 누가 보지 않아도 업무를 충실히 하고, 컴퓨터를 끄고 나서는 신나게 파이어아벤트를 즐기고, 피곤하지 않아도 제 시간엔 잠을 청하는 것. 이게 뉴노멀과 함께 품위있게 사는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시간이 만족스러워야 타인과 보내는 시간에서도 우아할 에너지가 생기지 않을까. 내가 좀 유난스러워도 다양한 방식으로 찍어누르는 피어 프레셔가 없는 곳에 살고 있으니 참 다행이다. 피할 수 있는 건 피할 수 있는 이 시기가 어떤 점에서 좋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