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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격주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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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Nov 14. 2021

2021년 44-45번째 주

격주정리 1주년 :)

보는 이 없더라도 내 자신과 지키고 싶었던 작은 약속이었던 격주정리가 벌써 1년이 넘었다. 뿌듯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작의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맑았던 한 가을날, 전에 살던 집에서 보냈던 여느 평온한 주말이었던 것 같고 그리고선 이 하얀 화면에 무언가를 적어가봐야겠다 했던 것 같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어두운 가을날의 내가 있다. 이벤트로 시간을 기억했던 과거와 달리 이 판데믹 시기를 밀도있게 기억해내기란 참 쉽지 않은 듯하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왔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격주정리가 남아주어 참 다행이고, 열심히 써오던 5년 다이어리도 이번 달이면 끝이 난다. 밀려서 썼던 적이 더 많고, 큰 감정적인 동요가 있던 날에는 오히려 말을 아꼈던 애매한 다이어리는 내 기억도 네 기억도 아닌 게 되었다. 다시 또 5년 일기를 사게 될지 잘 모르겠다. 또 다른 5년을, 5년 전 이 다이어리를 처음 샀을 때처럼 기대하진 못할 것 같아서다. 어찌 되었든 이 1년 동안의 격주정리에는 두 번의 삐걱거림이 있었고 여러 번의 지각이 있었지만 학교도 이 정도 출석률이면 졸업은 시켜주는 듯 하니, 그저 이대로 기쁘다. 



지금을 최대한 누리기


한번은 꼭 직접 들어보고 싶었던 조슈아 벨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우연찮은 기회에 포스터를 보고 표를 구했고, 드디어 취미생활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김에 같이 이곳으로 향했다. 대단한 연주가들은 독주회에서 보는 게 제일 제대로겠지만, 나는 그들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할 때가 참 좋다. 같이 호흡을 맞추며 음악의 합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유독 아름답다. 프로그램이 제법 강렬하여 공연을 보고 나오는데 내 어깨까지 아팠던 것 같은 건, 약간은 전날 한 운동이 무리여서였기도 했겠지만 몰입해서 감상한 후유증이기도 했다. 천재로 불리며 어린 시절은 난 사람의 안정된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왠지 모르게 되게 평화로운 느낌이었달까 (날 평화롭게 만들었다...의 번역투를 해결하지 못한 자의 문장...). 


독일에서 어떻게 하면 이곳에 사는 동안 사는 장점을 잘 누릴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게 바로 클래식 공연이었다. 아마도 수요가 먼저겠지만, 역시나 공급이 많다. 콘서트에 가면 곱게 차려입은 어르신 커플들이 다수임을 볼 수 있다. 든든한 팬층이 있으니 동네마다 테아터에 오케스트라를 하나씩 꾸리고 있겠지. 덕분에 문화적 요지에 살지 않아도 좋은 공연을 가까운 곳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현재 코로나 숫자는 비상이지만 백신 접종을 완료한 사람들에게는 큰 제약이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 공연이 취소되거나 하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 충분히 즐겨두어야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벌써 내년 봄에 있는 콘서트 예매를 해뒀고 마음이 든든하다. 


어떻게 들릴지 몰라 쓰기 망설였지만 그냥 말하련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 독일인은 사랑하기 어려운 민족이다. 독일에서의 삶이 편안해질수록 마주해야 하는 그 이면엔, 민족성이라 부르기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고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문화적 특성이라고 하기엔 너무 피상적인 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허나 나는 누구인가. 아직 그 어디에서도 발목잡힌 곳이 없는 자유로운 세계인이자, 여행 비자로부터 꽤나 자유로운 한국 국적을 지녔으며, 적어도 향후 10년간은 밥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을 그런 직종을 지닌 노동가능 인력이지 않은가. 속된 말로 '어디서든 꿀만 빨자'는 마인드로 살아가는 데도 이렇게 마주해야 하는, 지구의 핵과 같은 부분들이 있다. 꿀만 추구하는 데 드는 통행료가 비싸지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리고 깊게 들어가지 않는 한, 공존에 문제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내가 충분히 겉돌며 그들과 같은 밥그릇을 놓고 싸우며 위협이 되지 않는 한 이 고요한 공존은 유지될 수 있다. 아무튼 그날이 오기까지 어떻게 꿀을 제대로 알차게 빨아볼지는 좀더 고민을 해봐야 할 문제다. 


벌써 내년 봄이면 영주권 신청 대상이 되지만, 지금 있는 비자가 이미 2025년까지 유효해서 딱히 행정상의 불편함이 문제가 아니고서는 영주권이 막상 필요하지는 않은 상태다. 물론 집을 구매해서 세를 주는 투자를 해볼 계획이라면 아무래도 영주권이 대출 문제를 좀더 쉽게 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 비자로도 큰 문제없이 진행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차량 리스도 마찬가지 - right, I did my homework :) 이 모든 길에서 하나 걸리는 건, 바로 이 사랑하기 힘든 이들. 내가 나를 포함한 우리 한국인들을 평생 사랑하지 못해 떠나와 살고 있는 것도, 그렇다고 사랑해 마지 않는 피플들이 딱히 있는 게 아닌 것도 그 길 어딘가에 있는 걸림돌이다. 속까지 허여멀겋던 백인 문학에 속아 보낸 10대와 20대를 부끄러움과 함께 묻어버리고서도, 내 영혼 어디 편히 누일 곳을 찾지 못하는 나.   


조슈아 벨에서 이렇게 현실적인 고민까지 이른 게 참 이상하지만, 모처럼 깔끔한 옷을 곱게 차려입고 아름답고 강렬한 음악을 들은 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생각나던 노래, 그리고 마침 검색하다 기억난 이 드라마. 계속 꿀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바란 건 그저 깨끗한, 갈증을 해소할 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같이 하면서.

https://youtu.be/cD50AeTFiNU



네이버 블로그에 맛집 리뷰 쓰는 사람


정말 편견 없이, 그리고 빈정거림 없이, 네이버 블로그에 꾸준히 맛집 리뷰, 제품 리뷰 쓰는 사람 혹은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이번 주에 했다. 가끔 고민하고 궁금해하는 내용이 겹쳐 찾게 되는 네이버 블로그들이 있고 거기 가보면 꾸준히 맛집 혹은 제품 리뷰를 성실하게 올리는 블로거 분들을 보게 된다. 지나치게 상업적인 파워블로거들은 또 아니고, 그저 꾸준하게 해외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집 근처 레스토랑 이야기, 여행지에서 방문했던 곳 이야기, (어디서 소스를 얻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유명한 해외 브랜드) 제품을 현지에서 구매한 이야기 같은 걸 올리는 블로거 분들이 있으시더라고. 


내가 이걸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는데, 물론 제일 큰 건 게으름. 그 다음은 헛되게 잘 배운 MECE. 리뷰란 자고로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것, 객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것인데, 비교의 항목들을 제대로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리고 맛을 보고 사용하는 상대인 내가 철저히 변수로서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리뷰를 쓴단 말인가. 아무도 너에게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내 가장 큰 독자이기에 날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쓰다 보니 내가 이고 지고 함께 평생 살아야 할 내 이슈다. 


그럼에도 내가 노력하고 있는 건 이렇게라도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꾸준히 적어내려가고 있다는 것. 내가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고 어디까지 성실할 수 있느냐는 또 별개의 척도겠지만, 나는 지금의 이런 나로도 만족한다. 언젠가 내 기준이 확고해져 진득한 리뷰를 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된다면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와 정보도 담기고 맛도 담긴 이야기를 꾸준히 풀어내리라 약간은 기대도 해보면서. 



재택근무와 번아웃


올해 여름부터 제대로 기록하기 시작한 재택 근무시간 타이머가 결국 100시간이 훌쩍 넘는 오버타임을 기록한 것을 계기로, 내 업무량에 대해 본격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상사가 정확하게 어떤 업무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혹시 서포트 업무로 들어간 게 너무 많은 시간을 잡아먹는 게 아닌지, 주 업무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업무는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저 오버타임을 정상 범위 (계약서 상 주간 근무시간 이내)로 돌려놓을지 분석하고 계획을 짜는 시간을 가졌다. 나도 모르게 중간중간 들어오는 업무들을 쳐내듯 하며 시간을 많이 잡아먹고 있었고, 서포트로 들어간 업무에서 중간 의사소통 부재의 간극을 메꾸느라 과잉 노동을 하고 있었던 걸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게 표면에 드러나는 순간 많은 게 달라졌다. 제때 더 높은 레벨에서 부서간 업무 조정 문제를 내 상사가 해결해주었고, 서포트 업무 범위가 좀더 명확해졌으며, 나도 resource (= 내 업무시간) 와 priority (= 내가 정한 중요도) 라는 단어를 자주 써가며 내 업무시간과 집중력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동일시간당 업무 강도는 확실히 독일이 더 높지만, 절대적 업무시간은 한국에서 월등히 높았다. 그것에 비한다면 지금 업무시간이 그닥 긴 건 아니다. 게다가 재택이니 출퇴근시간도 그만큼 줄었으니 뭐 어찌저찌 나쁘지 않은 딜이다만, 상사는 번아웃을 이야기하며 근무시간을 최대한 준수하도록 노력하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안그래도 힘든 시기, 컴퓨터를 덮고 나면 유난히 지치고 의욕이 없곤 했는데 정말 일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하는 데이터 분석 업무를 정말 좋아하고 잘한다. 가끔 하나 걸리는 요인이 있을 때 그걸 해결하는 순간이 재밌는데, it is only logical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이유를 찾아가는 순간의 재미로 괴로운 수많은 시간의 데이터 클리닝을 견딘다. 그리고 내 능력을 과신하기도 해서 짧은 시간 내에 과제를 해내는 걸 즐긴다. 거기다 미팅까지 많아지면 내 진짜 일을 못하니 일로 즐거울 가능성이 줄어들고 초과근무를 하게 되고 몸은 늙어가며 집중력이 줄어들면서 에너지는 고갈된 상태에서 저녁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주당 50시간도 일 안하는데 번아웃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건방진 피고용인이었던 나는 내 노동자로서의 체력과 역량과 시간을 재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 동시에 재택으로 보이지 않는 팀 멤버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궁금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내가 내 상사와 저 대화를 나눈 뒤 하고 있는 건, 주 업무에서 벗어난 크고 작은 일들은 cc로라도 상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 업무를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포지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일을 긁어모아 다 할 필요는 없으니 내 선에서 자르든 아니면 적어도 별도 업무에 대해선 적절한 평가와 보상이 있을 수 있도록 근거자료를 제공하는 것. 어쩌다 낀 씨니어매니지먼트 메일 체인에서, 그 높은 분들도 열심히 이런저런 작은 성과라도 어떻게든 뽐내려는 걸 보고 배운 게 바로 이런 거다. 


아무튼, 나에겐 내년 3월까지 소진해야 하는 120시간과 21일의 휴가가 있고, 한국행 이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을 테니 봄이 가까워지는 3월에 아직 못 가 본 포르투갈에 한번 가볼까 생각 중인데, 이탈리아의 작은 소도시가 더 나으려나. 아, 그러고 보니 이게 또 독일 사는 꿀 중에 꿀이다. 





얼마 전 중고로 구매한 커피 테이블에 책들이 쌓였다. 종이책은 캐시홍의 마이너 필링스와 닉혼비의 하우투비굿, 그리고 킨들과 크레마. 끝내지 못하고 있는 책들이 그렇게 머물러 있다. 절대 지루하거나 읽기 싫어서 계속 테이블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책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에너지가 부족해서 차마 책을 펼쳐 계속 읽어내려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핑계치고 제법 진지하지 않나. 날이 춥다. 수면양말을 신었고, 난방 하이쭝 수리를 마쳤다. 밤에 마실 허브티를 찬장에 쟁여두었고, 이왕이면 일찍 잠들려고 한다. 너무 오래 깨어있는 건 위험하다. 웬만한 건 오프라인 상점에서 사려고 하고 있고, 시내에 나가 쇼핑하는 평일 일정을 넣어둔다. 깨어있는 시간이 실내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노력한다. 한번에 이어보면 마치 다른 두 사람이 쓴 것 같은 내 격주정리는 2주에 한번씩 1년을 만나도 누군가를 제대로 알긴 힘들다는 반증 같기도 하다. 여름과 겨울 사이 온도 차의 모든 곳에 내가 있고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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