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보낸 시간들
에효... 또 밀렸네. 이 기간 동안 완벽한 휴식을 즐겼다. 맨날 휴가고 쉬고 하는 것 같지만 이번 휴가처럼 온전하게 오프라인인 적은 또 없었어서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다시 일로 복귀한 지금 버퍼링이 오래 걸리는 것 같지만, 그게 또 새해 같고 새 시작 같아 마냥 좋기만 하다. 정확하게 한국에서 다시 독일로 돌아온 건 2022년 4번째 주이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나중에 구획을 나누어 제대로 쓰도록 하고, 얼마나 휴가를 잘 썼는지에 대해 자랑이나 실컷 해봐야겠다.
대궐 같은 집은 아니지만 부모님 댁에는 언제 돌아가도 내가 혼자 생활할 수 있는 방이 있다. 퀸사이즈 침대가 있고 내 옷들을 걸 수 있는 옷장도 있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물론 부엌과 가까워 일찍 일어난 엄마, 아빠가 나누는 대화가 살짝 들려 모닝 알람이 되기도 하지만, 내 모든 전자기기와 읽고 싶었던 책들을 늘어둘 침대 위에서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가끔 친구 집에서, 언니와 동생 집에서 자던 날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 편한 침대를 생각하면서 집에 가고 싶어 했었다.
서울 사람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버스를 선호하는 사람들, 아니면 지하철을 선호하는 사람들. 극단적일 수도 있지만, 차나 택시가 편하다는 사람은 서울 사람이 아니거나 본인이 운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거나 (그곳에서 운전하는 게 스트레스가 아닐 만큼) 시간과 인내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다에 한 표. 나는 버스보단 지하철을 좋아한다. 밀리거나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날 경우가 적고, 그 안에서 책을 읽어도 멀미가 나지 않고, 버스보단 사람들 간의 거리가 보장된달까. 가끔 출근길 지하철에선 최소 몸의 3면이 타인과 접촉되어 있을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심리적 거리감은 버스보단 있는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내가 주로 타는 지하철 라인에선 한강을 볼 경우가 적고 땅 속으로 다니지만 그럼에도 익숙한 지하철 역 플랫폼을 창문으로 보면서 어느 정도 왔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나에겐 서울 풍경의 일부다.
내가 가고 싶었던 곳들이 공교롭게도 마지막 회사 근처였으니 막 불가능한 확률은 아니지만, 마지막 회사에서 같이 일한 사람이 채 백 명이 안 되고 그나마도 7년 전이고 30%는 다 이직을 한 상태라 그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칠 일이 정말 낮았고 일부러 점심시간을 피해 다녔음에도 우연찮게 길거리에서 옛 동료들을 두 번이나 만났다 (다들 참 한량들인 건 비밀이고, 지나고 보니 참 좋은 회사였네 싶다). 다른 친구를 거기서 만나려고 갔다가 저 멀리서 바로 며칠 전에 만난 전 직장 친구가 달려와 아는 척을 했던 건 너무 웃긴 상황. 먹는 거에 진심인 기업문화 덕분에 그 근처 맛집을 열심히 다녔었고 택시 타고 밥 먹으러 다니던 때도 있었으니, 어떤 때 어떤 걸 먹어야 하는지 머리에 맛집 지도를 다시 상기시켜보는 것도 재밌었다.
떠나오고 나서 돌아갈 때마다 만나는 친구들이 이제 어느 정도 정해졌는데, 자주 보지 않더라도 만날 때마다 익숙한 느낌으로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친구들만 남은 것 같다. 그곳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이 백신 접종 패스 + 최대 4인 기준일 때였던 건 여러모로 아쉽지만. 친구들과 나눈 대화들 중에 재밌었던 거 몇 가지. 예전에 같이 놀러 갔다가 나눈 북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우리도 통일이 되고 인구 팔천만은 되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며 결국은 쪽수!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순간.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통일에 대한 관점을 물으면 생각보다 쉽게 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해 알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마더 테레사나 간디가 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잘 돌보면서 도덕과 법이 허용하는 만큼의 이기심을 가지고 가까운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선 자신이 베푼 선행에 아주 약간의 자기 만족감을 느끼는, 적어도 의무교육과정에서 배운 올바른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 되는 건 중요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면 그런 사람들을 찾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어도 된다고 생각하거나, 아직도 '선진국 수준'에서 보면 높지 않은 세금을 내면서 다짜고짜 국정운영에 사사건건 내 돈임을 주장하며 못되게 굴거나, 맥락과 상관없이 차별을 이야기할 때 '역차별'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는 경우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는 때에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고, 혹시나 내가 그곳에 남아 살아갔더라도 힘겨웠겠지만 나를 지킬 수 있었을 거란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는 워킹맘들에 대한 것. 모성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맹신, 일하는 나와 육아하는 나를 함께 가져가지 못하는 어려움, 둘 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양쪽 모두에 부채감을 느낌과 동시에 과잉보상을 하게 되는 비정상적인 상황...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언제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바닥에 깔고 살아가지 않았을 텐데, 지금을 둘러볼 여유를 가지고 살았을 텐데, 기괴한 부채감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가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다들 진짜 고생이 많아, 정말로.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접하는 한국이 거의 전부 다 보니 크고 요란한 목소리들만 들어오다가, 내가 믿고 이해할 수 있고 충분히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균형감각도 생기고 좋았다. 해외에 나와 살아가는 많은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지만 가끔은 나와 공통점이라곤 해외에서 사는 한국인이라는 점뿐 인 걸 깨닫고 다시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었거든. 직장생활에도 연차가 있듯, 해외생활에도 조금씩 다르지만 연차가 있다. 시기에 따른 고민이 있고 성취의 분야가 늘어가고 포기의 영역이 생겨난다. 지금의 나는 해외생활인인 것보다, '어른생활인'이 더 중요하다.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주어진 환경에서 그 가치관대로 살아내는, 나를 잘 지켜내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되는 게 제일 중요한 목표다. 그러다 보니, 돈!!! 성공!!! 맛!!! 등 모든 게 샤우팅하는 공기가 잘 맞지 않더라고. 마침 한국에 있는 내 친구들과 가족들도 거기 있다. 내가 떠나고부터 엽떡 먹은 일이 없다는 맵찔이 친구들은 아침마다 회사 책상에서 오늘의 결핍을 채우려 최선을 다하는 영양제 소믈리에가 되었고, 아직도 점맥은 진리라고 믿는다. 한 번에 트루 콜링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느 순간 꼭 그런 게 있어야 하나 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 진심으로 일하고 또 진심으로 노는 어른이 되었다. 나만큼 불만족을 스스로 해결하고자 떠돌이로 살았던 한 친구는 마지막 이직을 한 뒤 얼마 전 처음으로 개인연금을 들었다고. 혹시나 유학을 가거나 공부를 하게 되면 목돈이 필요할 테니 거의 모든 월급을 예적금으로만 두었던 그 친구가 개인연금에 가입하던 마음이 어땠을지 너무 이해가 되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이벤트는 없었지만 바쁜 시간을 보냈고, 그래도 짬이 나는 대로 미술관과 갤러리에 갔었다. 까먹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야겠다. RM이 한국 미술계에 기여한 바 진짜 어마어마하게 큰 듯! 물론 매우 일상적이지 않은 옷을 입고 와 멋진 사진을 찍고 가는 수많은 '인플루언서'들도 잊으면 안 되겠지만, 삼청동에 늘어선 갤러리들에 평일 낮에 어린 친구들이 보인다는 건 RM이 다녀갔다는 흔적이더라고. 우연찮게 그런 한 갤러리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를 만났고 그 주변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들을 봤다. 노동자의 소리를 대변하고 모계사회 이야기를 담은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명품을 휘감은 인플루언서를 볼 때나, 영국 미술계의 계급 문제에 엿을 날리는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와 그 위층에 있는 프라이빗 짐을 볼 때 느끼는 그 복잡함이란. 메시지와 상관없이 외향과 힙만 좇는 가벼운 문화는 여전히 천박하다고 생각하지만, 서울이란 공간이 가진 그 모순이 '바로, 지금'의 모습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예전에 이스트런던에서 한국 돼지껍데기 집 인테리어의 악어 고기가 메뉴에 있던 재즈클럽에서 칵테일을 마시던 때가 떠오르면서, 메트로폴리탄이란 뭘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선 다시 드는, 인간 뭘까... 하는 생각.
네이버 메인 화면도 오랜만에 보니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유명인들의 이름 옆에 나와있는 파트너나 애인 이름이 그랬고, 자극적인 기사 제목들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기사 내용들이 그랬다. 매일매일 따라잡다간 같이 미쳐버릴 것 같은 대선후보 관련 뉴스들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저녁마다 부모님이 챙겨보는 연속극은 유전자 검사와 기억상실증 없이는 이야기 진행이 어려운 듯했고 (과학기술이 한국 드라마에 기여한 바? 매우 큼), 아직도 유행이 끝나지 않은 듯한 음식이 소재인 예능들에서 끊임없이 쩝쩝거리고 온갖 얼굴 주름을 찌푸리며 맛있음을 표현하는 게 대세인 것 같았다. 한없이 치켜세워줄 땐 언제고 야멸차게 돌아서서 잘근잘근 씹어대는 인터넷 문화도 무서웠고, 온갖 셀럽들의 삶이 시사상식보다 중요해 보이는 분위기도 어려웠다. 언니, 동생,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그냥 흘려보내면서 사는 것도 가능은 하다고 해서 좀 위안이 되었다.
내가 사는 독일 동네에서보다 자주 본 메르체데스(사는 지역이 지역인지라 BMW는 좀 보는 편ㅋㅋㅋ),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뽀얀 피부에 또렷한 눈 (알고 보니 피부과 시술 + 아이라인 문신 + 속눈썹 연장의 결과물)은 여전히 새로웠다. 키나 체형, 심지어 영하의 날씨와 상관없이 입는 롱코트도 신기했다 - 이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가 너도 어렸을 때 그랬다며 내 안의 꼰대 본능을 콕 짚어주었다. 간판이 제대로 없(어야 찐이라)는 맛집들도, 적당하게 편집해다가 들여놓은 세계의 음식들도 재밌었다. 커피를 주문할 때 '고소하거나 산미가 느껴지는' 빈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것도 제법 과분하게 느껴졌고.
실은 국내여행도 다녀왔고 조카랑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말은 많이 못 하지만 어른들 이야기마다 아는 척을 너무너무 하고 싶어 하는 23개월 아이와 노는 시간은 정말 정말 즐겁고 살짝 힘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나이가 많은 93세 고모할머니도 뵈었다.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도 다녀왔다. 책도 조금 읽었고 영화도 봤고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했다. 엄마가 어느 날 저녁 많이 아파서 응급실에 다녀왔고, 자살로 목숨을 잃은 환자의 가족들도 거기서 봤다. 검사차 엄마 병원에도 따라갔다가 결국은 별 큰 문제가 없이 자연스러운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안경도 맞추고 병원에도 가고 피부과에 가서 점도 스무 개 넘게 빼고 미용실도 갔었네. 흐지부지 돈도 많이 쓰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무엇보다 집밥을 든든히 먹었다.
아참, TV나 짧은 영상들을 보다가 원더걸스 선예가 <엄마는 아이돌>이라는 프로그램에 나온 걸 봤다. 어렸을 때 영재 선발 프로그램부터 봐서 나 혼자 내적 친밀감이 있는 가수라 눈이 갔고, 감정표현이 많지 않아도 울림이 커 좋아했었다. 이 영상을 보는데 박진영이 선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친구는 책임감이 강한 친구라 본인이 한 선택을 옳은 선택으로 만들려고 얼마나 억척같이 잘 살아내려고 노력했을까 생각하면...'하고 말을 줄이는 순간이 괜히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그런 스케일의 삶과 저런 큰 결정을 한 사람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냥 저 말이 나한테도 큰 위안이 되더라고. 그리고 내가 나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위로이기도 했고.
아름다운 30대 여성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멋진 언니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나아가고 있고 누군가는 하드캐리하고 있다. 이 부채감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https://youtu.be/hT7nDP7sKXw?t=1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