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다 보니 기시감이 들어서 찾아보니 역시나
매우 피곤한 한 주였는데 이를 좀 정리해보고자 결국 따지고 보면 험담인 이야기를 한번 해봐야겠다. 같이 일하는 다른 팀 동료가 있다. 우리 본부/부서는 같은 오피스에 근무하는 사람만 약 40-50명이 되는데 그중 외국인이 남미에서 온 이 동료, 북미에서 와서 20년 넘게 여기서 살고 있는 다른 아저씨 동료,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나뿐이다. 이 동료는 이미 독일어를 잘하고 영어보단 독일어가 편한 것 같다. 처음엔 또래기도 하고 여자기도 하고 비슷한 시기에 입사를 해서 그래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일이 아니어도 나에게 이런저런 독일어 조언도 해주고 해서 고맙게 느끼고 있던 상대였다.
그런데 미국팀에서 리드하는 프로젝트에 내가 서포트로 들어가게 되고 이 동료가 유럽 지역 담당을 하게 되면서 업무를 같이 하게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프로젝트 컨셉도 모르고 데이터 분야에 감이 없는 듯해서 도와주고 설명도 따로 해주고 했다 (복선 1). 저 미국팀 리드가 좀 불통의 아이콘이라 여러 사람들이 이 분과의 대화를 안 달가워해서, 중간에서 원치 않게 풀어 설명해주며 범퍼 역할을 해주곤 했었다. 영어 문제는 아닌데 그냥 인간 자체가 친절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캐릭터고, 많은 독일팀은 그게 영어 문제인 줄 알고 그냥 자기가 못 알아들었나 하는 거 같고, 그리고선 엄한 나한테 와서 질문을 과하게 하거나 내 상사한테 와서 불평 겸 에스컬레이션 하고 감 (복선 2, 이거 분명 내 잘못ㅠㅠ 우리 상사도 포지션이 참…) 그런데 거의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도 프로젝트 이해도가 너무 낮고 매번 설명해주면 마치 처음 듣는 것처럼 굴어서 슬슬 뒷목을 잡는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복선 3). 여기까지도 오케이, 근데 이러다가 새로운 사람들이 있거나 높은 직급의 사람이 한 명이라도 끼면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하니 또 속이 터지는 거다(복선 4). 여기까지도 그래… 잘하고 싶은가 보다 싶어서 굳이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옛다 가져가라 하는 마음으로 그냥 두었다.
그런데 뚜둥 이번 주! 지금 이 프로젝트 유럽 지역이 진도가 다른 지역 대비 너무너무 느린데 분명 내가 문제는 너네 매니지먼트의 의사결정 및 탑다운 방식의 추진력이 부재하다고 여러 번 설명해주었는데, 그게 마치 내 쪽에서 개발을 더디게 하여 늦은 걸로 의사소통을 해온 것. 어차피 내 주 업무가 아니니 나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갑자기 느무느무 괘씸해서 여럿 들어온 미팅에서 하나하나 반박해서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주었다. 여태까지 같이 미팅을 한 시간만 합쳐도 30시간이 넘는데 지금까지 내가 기본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좌절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다시 메일로 더 이상의 질의응답은 내 업무가 아니니 미국팀 리드한테 말하라고 하고선 cc로 그를 넣었다. 다른 팀으로 만나면 진상인 미국 리드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 편이면 너무 편하고 믿음직한 분이니 가볍게 토스.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왜 나는 그걸 제때 못 알아차리고 이렇게 끝까지 와서 지저분하게 해결하고 있을까. 나의 어떤 점이 저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이용할 만하게 보이는 걸까. 이게 사실 처음은 아닌 게, 한국에서 일할 때 나보다 늦게 들어온 차장이 도대체 아는 거 없으면서 너무 아는 척을 해서 매번 그거 아니라고 따로 미팅룸에 불러서 알려주곤 했는데 그 배려를 이해를 못 하고 자꾸 뒤통수를 쳐서 화가 많이 난 어느 날 오픈된 오피스에서 선배 꼽 무지하게 준 후배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전 회사에서도 한 팀 전체가 그렇게 내가 한 걸 자기들이 한 것처럼 말하고 다녀서 제법 먼 거리의 동료가 찾아와서 그거 내가 한 일이라고 정정하고 다니기 너무 바쁘다고 알아서 좀 잘 챙기라고 말해준 적도 있었다 (이 분도 사실 좀 오지랖인데 나 이직한다고 했을 때 이해관계없이 순수한 마음에 진심으로 아쉬워해줘서 나름 고마웠다). 아참, 기억해보니깐 지금 회사에서 이렇게 당한 적이 한번 더 있었다. 이쯤 되면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인가…
https://brunch.co.kr/@asyoulikeit/44
공과 사 구분이라는 게 꼭 친구와 동료 뭐 그 구분을 제대로 하라는 것뿐 아니라, 사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싶은 나의 가치관을 굳이 일에서 선을 베푸는 걸로 적용하지 말라는, 일은 주어진 범위 내에서 법과 규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정확하게 + 탁월하게 해내는 것도 함께 의미하지 않나 싶다. 너라고 항상 일을 잘하는 위치에만 있을 것 같냐, 그리고 너도 정말 일을 잘하냐 같은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1) 나는 언제나 내 능력이 좋게 평가받을 수 있는 조직을 골라서 일하고 있고 (무리하게 경쟁하는 곳에서 일해본 적 없음ㅋㅋㅋ 항상 chill), 2) 내 기준에 합당한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 계발을 항상 한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선택해서 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할 수 없는 일을 할 줄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잘 이해가 안 되고, 그 갭을 타인을 이용해 채우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부족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의심 없이 도와줄 수 있는데 이 의심 없는 마음이 독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뜻. 이런 내 성격의 장점은 높은 직급은 내가 안쓰러워할 일이 없어서 의견을 제시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점. 근데 이것의 단점은 결국 위치로 선의를 결정한다는 점. 이것도 차별인가, 아니면 약자 트리거인가.
근데 이게 또 화가 나는 게 내가 왜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 때문에 변해야 하냔 말이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지금 상사와 한 적이 있는데, 강한 쌈닭 캐릭터도 좋긴 한데 평화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나면 그냥 그것도 캐릭터로 밀고 나가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다고. 오래 걸리고 걸림돌도 많지만 방향은 흔들리지 않을 테니 그것도 방법이긴 하겠네, 하고 말을 줄인 적이 있었다.
적고 나니깐 뭔가 짜증은 해소된 것 같다. 한 번씩 이러고 나면 박사과정 길게 하면서 이런 갈등 모르고 산 사람들이나 그냥 주어진 업무 열심히 파는 엔지니어들이랑만 일하고 싶어 진다. 요즘 자본주의형 성공 세포가 도덕은 법 어기지 않는 수준까지 내려놓고 주울 수 있는 건 다 주워 챙겨보고 팔 만한 건 다 팔아볼 마음가짐인데, 나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물론 그걸 원하지도 않아 참 다행인데, 가끔 내 평온한 앞마당에 불쑥 쳐들어오는 사람들로 매번 고요함이 깨뜨려진다. 다음에 또 당하는 순간이 안 왔으면 좋겠지만, 혹시나 또 당하면 얼마 주기로 이렇게 당하는지 모니터나 해봐야지. 아참, 이 모든 건 철저히 내 입장임 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