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에서 무리와 함께 이동을 해야 했는데, 내가 탈 버스가 나를 찾기는커녕 기다려주지도 않고 쌩 출발해 버렸다. 어이없고 화가 난 나는 총무를 맡고 있는 ‘장’을 찾았다. 그에게 이 일의 부당함과 서운함에 대해 따질 참이었다. 꿈속인데도 분기탱천이 실제처럼 생생했다.
그런 꿈에 시달리느라 자고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오면서 깨닫고 말았다.
아, 나는 아직도 회비 문제로 스트레스받고 있구나!
내 안의 결정은 확고했기에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작년에 이어 재신청한 수필수업에 새로운 단체방이 생겼다. 기존 방과의 차이는 선생님이 있고 없고 차이다. 당연히 새로 생긴 방엔 선생님이 안 계셨고 ‘의견방’이란 이름을 달았다. 총무가 나누고 싶었던 의견은 회비였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위해 1인당 1만 원의 회비를 걷어 선생님께 10만 원을 드리고 남은 돈으로 간단한 선물을 드리자 했다. 이 직전에는 수업 종료 후 함께 식사를 한 후 회비로 선생님 제외 1/n 하자는 의견이 나왔었다.
왜 돈을 못 걷어 난리지?
솔직한, 날 것의 내 마음이었다. 도서관 강사님을 위해 돈을 걷는 걸 하나의 예의쯤으로 생각하는 태도에 거부감이 들었다. 지난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도서관 수업을 해주시는 선생님께 드리잔 의견이 있었고 나는 이번과 동일하게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개별적으로 하면 된다고 얘기했다. 취미반 강사를 스승님으로 봐야 할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다수 의견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할까.
모두 그러자고 한다면 그러지 말자고 하는 사람은 소신대로 자기 의견을 표현하기 어렵다.(실제로 찬성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모난 돌 취급받기 싫다, 분위기 깨기 싫다, 회비 얼마나 된다고- 하면서 내고 만다. 내가 얼마 전만 해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 마음을 내가 너무 잘 안다.
언제나 강제 아니라고, 자유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저 빠져나갈 핑계로 보인다. 다수 의견이란 이유로 나를 몰아붙이는 방식에 숨이 막혔다. 똑 부러지게 내 의견을 전달했지만, 남들이 총무에게 입금을 하고 수고하신다 인사치레 말을 건넬 때마다 내 속은 여전히 시끄러웠다.
날 생각해 보면 나는 누굴 챙기는 걸 귀찮아하는 편인 것 같다. 물론 나도 사람인지라 축하를 받고 위로의 말을 듣고 선물이 건네지면 좋다. 그런데 그건 내게 빚으로 남는다. 그저 축하해 주고 위로해 주고 전하는 감사를 즐기기만 하자고 생각해도 마음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주고받지 말았으면 좋겠다. 말 한 마디면 좋다. 축하해, 힘들었지? 고마워.
다른 이유는 내가 이 수업 자체에 큰 애정이 없다. 수업 특성상 대문자 F들이 많은데, 그들의 말과 행동을 듣고 보는 건 내게 약간의 고통을 준다. 게다가 선생님의 수업 방식이 나랑 맞지 않다. 별로 도움이 안 되었단 얘기다. 같은 수업을 듣는 지인은 이 이유가 가장 클 거라고 단언했지만, 글쎄올시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까?
축하와 위로와 감사의 말들이 우리 삶의 윤활제 같은 역할을 하는 걸 텐데. 그걸 하는 게 번거롭고 귀찮아도 상대에 대한 애정과 배려일 텐데.
과거에 그러지 못한다고 비난했던 남자친구가 슬그머니 떠올랐다. 오래 사귀어 신실한 애정을 공유한 우리는 서로를 가족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그를 탐탁지 않아 했고 그 반응에 남자 친구는 많이 위축됐다. 그럴 때일수록 더 살갑게 행동하길 기대했던지 그 모습이 꽤나 실망스러웠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외동으로 자라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거나 미움을 받는 것에 대해 면역이 없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그의 성향일 뿐이었는데, 과하게 비난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때 그의 마음도 지금 나처럼 시끄러웠을까?
뭔가를 챙기는 걸 귀찮아하는 것도 성향일 확률이 크다. 스스로 이기적인가 굴을 파고 팠던 나지만, 반대로 보면 선생님을 위해 돈을 걷고 선물을 할 그들도 그렇게 해야 자기 마음이 흐뭇하고 편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이니 이기적이긴 매한가지다. 나를 괴롭힐 필요는 없었다. 개체의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건 본능이니까. 리처드 도킨슨이 말한 ‘이기적 유전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자 더 분명하게 남겨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삶의 태도였다. 내가 원하지 않은데 분위기 때문에 끌려가고 싶지 않다는 고집, 나로 살겠다는 다짐. 물론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기에 이젠 정말 그렇게 살기 싫다는 반작용이 조금 과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지금부터 나는 조금 이기적으로 살고 싶다. 그게 날 위한 방향이라면.
그래서 앞으로 어쩔 거냐고? 다음 수업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내년의 나는, 아마 다른 선택을 할 것 같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