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이 비운 자리를 신록이 차지했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그친 하늘은 말간 파란색이고 피부를 감싸는 공기는 따뜻했다. 그것만으로도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일부러 텐션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이 절로 마음의 고도가 높아졌다. 그래도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웃는 연습을 해본다. 지금 차가 향하는 곳이 봄이 만개한 피크닉 장소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난해 독서회 선생님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자신이 수업을 맡고 있는 작은 도서관을 소개해줄 테니 계획서를 준비하라고. “네네, 좋지요.” 화답했지만 사실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후임으로 날 떠올린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올해 1월 갑자기 전화가 와서 독서회 강사 자리를 넘겨주셨다. 황송함, 고마움으로 나는 부지불식간에 독서회를 맡게 되었다.
독서화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다! 시립도서관에서 평일 오전 시간대 독서회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참여를 했더니 그게 어느새 10년이다. 유치원생이었던 아이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간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갔고 권태기도 오고 가길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독서회는 여전히 전날엔 설렘을 느끼는 내 일상 속 중요 이벤트다.
두서너 해 전부터 나도 나만의 독서회를 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내가 주도하여 원하는 빛깔로 독서회를 채우겠다는 욕심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독서회를 리드하기에 부족함이 없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럴 때 평산책방의 ‘독서 리더 양성 아카데미’를 알게 되어 초급반, 고급반까지 수강하게 됐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수업 후 나만의 독서회를 포기하게 됐다. 갓생을 살고 싶은 MZ들은 돈을 내고서라도 독서회에 참여한다지만 중장년층에겐 딴 세상 이야기다. 가장 흔한 모임이 독서회인데, 내 주변을 둘러보면 굳이 돈을 내가면서까지 독서회를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돈도 안 되는 일로 속을 썩일 생각을 하니 내 색깔이고 뭐고 굳이?라는 생각에 깔끔히 포기했는데... 그런 내게 이런 확실한 제안이 오다니! 포기하고 있었음에도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은 걸 보면 그 포기는 진심이었을까?
3월 첫 독서회에 참석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사이 서로를 소개하고 요즘 읽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이라서 관장님이 진행 아닌 진행을 하셔 어려움은 없었다. 역시 중장년의 여성들은 무언가를 보태지 않아도 원활하게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조용히 장단을 맞추며 첫 모임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두 번째 모임은 마음자세부터 달랐다. 솔직히 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을 리더감은 절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리액션해 주는 거라면 꽤 괜찮을지도? 회원들을 성별과 나이를 고려할 때 이런 진행 방식이 더 맞을 것 같다는 건 빅 데이터에 의한 나름의 결론이었다. 기존 독서회에서도 선생님이 말을 많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최소한의 개입만 바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부담이 안 됐냐면 절대 아니다. 매우 부담이 되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일단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분위기는 아니더라도 강사라면 큰 가이드라인은 제공해야 할 것 같았다. 이야기가 산으로 가면 다시 주제로 끌고 와야 했고, 이야기가 조금 더 깊어지도록 디딤돌을 제공해야 했다. 무엇보다 나는 공짜 참여자가 아닌 돈을 받는 강사가 아닌가? 돈값은 생각보다 무섭고 무거웠다.
4월의 주제는 '단종'이었다. 우리는 관련 책을 읽고 만나기로 했다. ‘왕과 사는 남자’ 덕분에 나도 호기심이 일었고, 책임감에 일반 회원으로 참여할 때마다 책을 더 열심히 읽었다. 관련 책도 여러 권 읽고 시험공부하듯 메모도 하고 동영상도 살폈다. 단기기억이겠지만 단종과 세조라면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화로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에서 단종과 세조, 사육신, 엄홍도까지 이야기의 폭이 넓어졌다. 회원들이 책에서 읽은 얘기를 할 적마다 나는 잘 살피고 있다 보탤 역사적 진실들을 대화 사이에 끼워 넣었다. 왜 강사가 말이 많아지는지 이해가 되었다. 나름의 애씀이었다.
그러나 역시 예상대로 대화는 종횡무진했다. 15세기 벌어졌던 단종애사를 이야기하다 현대사로 점프하길 수차례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에 잘 살게 되었는데 요즘 사람들이 너무 욕만 한다고 억장 터져하다가 역사를 배우지 않는 현실에 백년대계를 걱정한다. 과거 배급으로 먹었던 옥수수빵 얘기를 하다가 이태리 여행담이 나온다. 나는 흔들리는 동공을 부여잡고 회원들을 다시 단종의 세계로 데려온다. 낙오하는 양이 없도록 두루 눈을 맞추며.
역대 관객이 가장 많이 찾은 영화 1,2위가 모두 역사 영화니 희망은 있다고, 다양성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단종애 대해 함께 이야기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냐며 600년을 건너뛰는 정신없는 이야기보따리의 입구를 조심히 오므리며 모임을 마무리했다.
회원들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첫 데뷔를 마친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어젯밤 약간의 설렘과 큰 부담으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음에도 피곤함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단종 얘길 입에 단내 나게 했더니 배신자, 신숙주를 씹고 싶어졌다. 비록 가려던 쌀국숫집이 휴무라서 그 계획은 실패했지만 괜찮았다. 부담감에 잘할 수 있을까 염려하던 내가 생각보다 더 독서회를 즐겼으니까.
무언가에 익숙해지고 나아가 더 잘하기 위해선 언제나 시작이 먼저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시작은 서툴다. 거기엔 설렘도 초심도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그 기억이 오래가는 건 아마도 그 마음 덕분일 테다. 그렇게 나의 첫 시작은 봄날처럼 산뜻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