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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항구의 온도

키워드 : 여행, 그날의 온도

by 은섬

그와 나는 소렌토의 해변을 말없이 걸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작별이었다.


잠시후 나는 카프리로, 그는 나와는 다른 장소를 향해 떠나갈 것이다. 데크를 따라 걷는 우리의 발걸음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가 달라붙었다. 휴가철이 제법 남은 바닷가에는 그와 나 뿐이었고 하얀 요트에 반사된 햇살이 눈부셨다. 나는 이 길이 조금 더 길기를, 너무 빨리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나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그 길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우리의 인연은 여행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날 나는 베니스에 있어야 했지만 교통편에 문제가 생겨 스위스의 인터라켄을 떠나지 못하고 머물 곳을 급히 찾아야 했다. 가까스로 찾은 게스트하우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우리가 지금 만나기 전 그러니까 루체른의 유람선 안에서 이미 만난 적이 있노라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반가웠지만 혼자 있는 모습이 익숙해 차마 말을 걸지 못했다는 고백도 함께였다.


그가 말해준 우리의 처음은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던 말처럼 나를 꿈꾸게 했다. 동시에 그날의 나와 나의 여행을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당시엔 미처 몰랐던 그 시선에 묻어 있었을 따스함에 나 자신이 물들어 가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따스함을 맛보려고 이곳에 하루 더 묵게 된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계획의 변경, 그 여행의 변주도 나쁘지 않다고, 아니 사실은 매우 기껍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여행 중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우연, 하나의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리 중앙역에서 나온 나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우연이라 여겼던 새로운 인연이었다. 남부 이탈리아의 강렬한 햇빛이 눈이 익숙해질 무렵 더 익숙한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어!”

스위스에서 헤어진 지 수 일이 지났는데, 우연만으로 이렇듯 유럽의 한 도시에서 마주칠 수 있는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말문이 막혔다. 나폴리에서의 숙소도 같았고 이후 여행할 도시도 비슷한 우리는 잠시 여행의 메이트가 되기로 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나폴리의 유명한 피자 맛집을 찾아 나섰고 그곳에서 피자 한 판씩을 클리어한 후 소렌토행 기차에 올랐다. 규칙적인 기차 소음에 기대어 잠시 지금껏 혼자였던 시간과는 부쩍 달라진 여행의 결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었던지 그날이 주말이었던지 기차 안엔 승객들이 꽤 많았다. 서는 역마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가 내 앞을 막아선 자세가 되었다. 그의 뒤쪽으로는 떠들썩한 이탈리아인들이 가득했기에 그들로부터 차단된 작은 공간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다만 내 앞 그의 숨결이 닿는 것이 어색한 나는 손가락을 꼬물거렸고 창밖으로 고갤 돌린 그는 귀끝이 빨갰다.


본래 우리의 일정은 폼페이에 들렀다 소렌토로 향하는 것이었으나 서로 마음이라도 통한듯 멈추지 않고 소렌토로 향했다. 여행 중 이탈리아인들이 한국인과 정서적으로 가장 닮았단 이야기를 들었다. 무리지어 다니고 시끄럽고 오지랖이 넓지만 도움도 가장 잘 준다는 점에서. 시끌벅적한 이탈리아인들의 열기 속에서 있노라니 이미 사라진 도시쯤은 그냥 역사 속에 내버려 둬도 될 것 같았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확보된 그와 나만의 시간이 짧아지는 손톱처럼 아까운 마음도 그 결정을 도왔다.


소렌토의 기차역을 나서자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로수에 시선이 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흔치 않게 폭격을 피한 이 도시에는 아스팔트나 시멘트보단 돌로 만든 길이 많았고 해안의 절벽도 그 어느 도시보다 단단해 보였다. 쌓인 시간 위를 걷는 듯한 발걸음 끝에 단단함이 고여 들며 바위의 온기가 마음을 덥혔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나 오긴 전 어떤 로맨스를 꿈꿨다. 실제 여행을 하면서 지분거리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기도 했다. 어쩌면 나 또한 그런 짧은 로맨스를 꿈꿨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인연이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는 사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여행이 어떤 식으로든 내 삶을 바꿀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길지는 않아도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우리 둘은 벽난로의 온기가 가득한 공간 안에서 이 여행의 우연을, 함께 만든 추억을 곱씹으리라. 때론 파도의 포말이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서 우리 역시 하얀 맥주 거품을 입에 묻힌 채 오늘 서로를 향해 내민 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인생의 여러 지점에서 꺼내 볼 이 여행이라는 페이지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고 또 온전하길 바라는 마음은 온기가 달라붙던 손끝을 다시 차게 만들었다. 그것은 여행에서 꿈꿔왔던 따뜻한 시선과 다정함을 소렌토의 항구에 남겨두고 오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몰랐던 시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카프리로 향하는 여객선 안. 항구에서 산 딸기는 미적지근해서 단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소렌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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