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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중년모델 도전기

by 은섬


패션모델 위금영씨는 눈 앞에 쭉 뻗은 길이 영원히 끝이 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런웨이에 설 때만 해도 무슨 정신으로 걸었는지 몰랐고 넘어지지 않는 게 목표였다. 턴을 한 후 땀이 흥건했던 몸이 여전히 생생하다. 지금의 금영씨는 이 길이 끝나지 않아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않고 내내 걸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동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눈빛들이 있을테니까. 그 길을 걷는 동안이라도 스스로가 제법 쓸모가 있는 사람일 것이므로. 그녀가 쿵! 한 발을 내디뎠다.


찰칵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들리고 번쩍번쩍 플래쉬가 터졌다. 끝을 아는 그 길을 걷는 지금, 시간은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유영한다. 런웨이를 바라보는 어떤 이의 눈꺼풀이 느긋하게 올라가고 쇼가 지루한지 백 안의 스마트폰을 뒤적이는 누군가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비틀거리지만 꿋꿋하게 런웨이를 걸었다.



딸이 육아휴직을 받았다.

아니 사실 육아휴직을 받은 사람은 위금영씨다. 출산을 하고 업무에 복귀를 하는 둘째 딸 나현을 대신해 손자 녀석의 육아를 담당한 사람이 위금영씨였기 때문이다. 고로 이 육아휴직은 금영씨의 육아 중단을 의미했다. 육아를 위해 일을 쉰다는 의미의 육아휴직이지만 업무보다 더 힘든 것이 육아이므로 과연 ’쉴 휴‘자를 쓰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육아에서 해방되고 누군가는 육아에 얽매인다.


금영씨라고 처음부터 손자 육아를 맡고 싶진 않았다. 회사 복귀를 앞둔 딸이 딱히 일도 없이 아침부터 집에 와 뭉개는 것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낌새가 그랬다. 설마 하면서도 그녀는 열심히 모른척을 했다. 이제야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할 일 다 해내고 한숨 돌리려는 찰나에 웬 육아란 말인가? 게다가 애 보는 공은 없다는데, 만에 하나 손자 녀석이 어디라도 깨지고 피라도 흘렸다간 나현은 금영씨를 찜쪄먹을 게 분명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누군 딸 없는 사람을 보면 안쓰럽다고 한다. 그 부분에 대해 금영씨도 매우 공감하는 바다. 사실 어릴 적에만 해도 딸은 엄마가 지켜줘야 할 것 같아서 불안하고 안쓰러운 존재였다. 내심 아들이라도 하나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그 가녀린 딸이 결혼하고 출산을 하면서 확실히 금영씨의 편이 되어 주었다. 사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매해 어버이날마다 아빠에게 보내는 카드엔 엄마에게 더 잘 해주라는 당부가 적혀 있어 아빠를 서운하게 했다. 그런 걸 보면 엄마를 안쓰러워하는 건 모든 딸의 숙명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딸은 금영씨가 말하기 어려운 부분들을 알아서 미리 처리해주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남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적어졌다. 가끔 딸과 수다를 떨고 있노라면 지금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이 동네 아줌마인지 딸인지 헷갈릴 정도랄까?


나이 들수록 딸이 있어야 하는구나... 느끼는 건 맞는데!

요즘 사람들은 딸 가진 엄마보고 빵점이란다. 아들 가진 엄마는 100점. 이유는 딸들이 친정 엄마한테 외손주 육아를 맡겨서! 아들 가진 엄마는 시엄마를 믿지 못하니 애를 안맡기는데 딸들은 아이를 맡겨야 한다면 1순위를 친정엄마를 찾으니 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라서 반격할 수 없는 게 억울했다. 그렇게 나이 육십이 다 되어 금영씨는 빵점 인생이 되었다.


차라리 나현이 “엄마, 사정이 이러니까 엄마가 하윤이를 맡아줘요. 제가 용돈 넉넉하게 드릴게.” 이렇게 까놓고 말했다면 차라리 맘이 편했을까? 아니면 당당하게 안된다고 손사레를 칠 수 있었을까? 지도 미안한지 용건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음을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약 먹은 닭처럼 구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속상할 수 없었다. 딸 혼자 낳은 애도 아니고, 나라에선 낳아라 낳아라 난리를 떨고 애 안낳은 요즘 젊은 사람들을 이기적이다 손가락질 한다.. 그런데 애를 낳은 딸만 왜 저렇게 구질구질 변명하고 미안해하는지 속에서 천불이 났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말하고 말았다.

“그래. 하윤이 내가 맡을 때니깐 넌 일하러 가.”

아뿔싸! 그 말을 뱉은 그 마지막 날숨이 사라지기도 전에 후회를 했다. 사고쳤구나 싶어서.


맨 처음 시작은 알록달록한 옷 때문이었다.

첫째 가현이 어느날 묵직한 상자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평소에도 종종 가현의 집에서 제 용도를 다 했으나 버리가 아까운 물건들이 금영씨의 집으로 옮겨져 오곤 했다. 사실 금영씨도 필요로 하는 물건이 아닌 탓에 그것들은 고물 아닌 고물로 자리만 차지할 께 뻔했다. 그래도 아직 쓸만하다는 이유로 금영씨네 집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물건이 제법 많았다.


그날 가현이 가져온 것은 가현의 딸, 소윤의 철 지난 옷들이었다. 손녀 소윤의 옷 모으기 취미는 대단해서 이 일로 가현과 날을 세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금영씨가 보기에도 소윤의 옷에 대한 욕심은 넘치는 부분이 있었다. 저런 옷은 도대체 어디서 구입을 하는 건지 궁금해 소윤에게 어디서 샀냐고 여러 차례 물어 보았다. 인터넷에서 샀다는 소윤의 대답에 금영씨는 저런 이상한 옷들만 모아 파는 곳도 있는가보다 했지만 매번 감탄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날 가현은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자신의 속내를 금영씨에게 털어놓았다.

“엄마~ 내가 생각해 봤는데, 소윤이가 옷을 자기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거 같지?”

“무슨 소리야? 정체성이라니?”

“옷이야 뭐 깨끗하고 깔끔하면 되는 거 아냐? 근데 소윤이는 옷 입는다고 자기가 다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 뭐야, 영화 마스크처럼.”


요즘 형광등처럼 뒤늦게 깜빡이며 불을 밝히는 금영씨의 머리는 천천히 영화 마스크가 어떤 영화인지를 떠올렸다.

“그게 나쁜 건가?”

“아니 뭐 꼭 나쁘단 건 아닌데, 결국 옷 안에 든 정소윤이란 사람은 똑같은데, 너무 겉에 입는 옷에만 집중하는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하고.”

그 말을 한 가현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마도 자신의 딸에 대해 너무 박한 평가를 내린 건 아닌가 스스로를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리라.


금영씨도 가현의 염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20대 초반 이른 결혼을 한 위금영씨를 누구보다 닮았던 첫째 가현은 빠른 결혼까지 자신을 닮았다 여자는 엄마의 발자국을 밟고 자란다더니 가현을 보면 참으로 맞는 말 같아서 가끔 금영씨는 무섭고 두려워 자신의 말과 행동을 뒤돌아보게 됐다.


금영씨야 워낙 사는 게 급급해 결혼하고 아이 키우며 살면서도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생각도 결국은 허리 펴고 한숨 돌릴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시절의 금영씨와 남편 현태씨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고 그건 차라리 다행스런 일이었다. 모든 시련과 힘겨움을 맨 정신으로 이겨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엿다. 가현의 모습을 보면 더 그랬다.


가현은 이른임신과 결혼으로 그 시절 많이 힘들어했다. 자기 코가 석자라서 어린 소윤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금영씨도 경험으로 알고 있듯 모성애라는 게 수도꼭지 틀면 물 쏟아지듯 그런 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때의 가현은 핏덩어리였던 소윤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스런 아이가 아니라 자기 발목을 챈 외계인 같았겠지.


뒤돌아보니 그때 가현은 산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금영씨가 가현을 돌보고 소윤을 살폈지만 아무리 정성을 다 해도 엄마 품과 같을 수 없었다. 부모 자식간의 정도 서로 주고 받는 감정들이 많아야 돈독해지는 법인데, 그런 점에서 가현과 소윤 사이는 좀 삭막했다. 가현은 한 번 소윤이랑 둘이 있으면 많이 어색하노라고 금영씨에게 고백했던 적이 있었다.


응당 엄마에게 받아야 했던 애정에 대한 결핍을 소윤은 옷에서 찾는 듯 했다. 사시사철 알록달록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옷들을 사들였다. 그렇다고 가산을 탕진하고 그런 건 아니라 대놓고 타박할 수도 없었다. 용돈을 아껴 구입하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옷을 사는데 그것까지 반대하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금영씨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소윤이 어쩌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외할머니나 엄마처럼 운명에 발목잡혀 이른 결혼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혹시 모를 운명 앞에서 최대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을 가진 건 아닐까? 최첨단의 시대에 살고 있는 소윤이 운명을 따라가는 자신을 상상하는 모습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지만 때론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더 강하게 결정짓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어쩌면 소윤의 정체성이고, 소윤의 두려움이기도 했던 옷들이 우리집으로 온 건 패션을 돌고 도는 것이니 절대 이 옷들을 버리면 안된다는 소윤의 단속 때문이었다. 다락방에 올려 놓으라는 금영씨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던 가현은 결국 거실 한 구석에 놓인 상자를 내버려두고 갔다. 그렇게 그 상자는 며칠 있는 줄도 모르고 그 자리를 지켰다.



등을 가르는 식은 땀은 느긋했다.

작은 활자들은 눈앞에서 초점이 맞지 않은 채 아른거렸고 컬러풀한 화면은 정신을 더 산란하게 했다. 갑자기 난독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뭐가 뭔지 전혀 연관이 안돼 이해하기 어려웠다. 글씨도 가물가물한데 사실 기계를 잘못 건드렸다 고장이라도 내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 때문에 주문기계가 고장난다고 생각하면 아찔했다.


금영씨의 생각엔 카운터에서 ‘돌솥밥 하나 주세요’ 주문한 후 계산하는 것이 더 할 수 없이 간단한데 주문 기계라니! 이는 번거로움을 자처하는 꼴이었다. 직원을 줄이고 키오스크 기계를 들여놓은 사장에게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이 음식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점점 사람들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었다. 음식점에 들어섰는데 키오스크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죄 지은 것도 없건만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해서 되돌아 나간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은 그 집의 돌솥비빔밥이 꼭 먹고 싶었다. 평소 먹기 힘든 귀한 나물들을 삭삭 비벼 먹고 돌솥에 눌러 붙은 밥을 긁어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입에 침이 고였다. 나이가 들면서 식욕도 밋밋해졌기에 이런 식탐에 가까운 식욕이 생경했다. 오늘 반드시 그 집 돌솥비빔밥을 먹어야겠다고 다짐한 금영씨가 당당하게 그 음식점을 찾았다.


식사시간을 비껴 간 것은 금영씨의 얕은 잔꾀였다. 스마트폰도 어렵지 않게 조작할 수 있겠다, 주문하는 기계로 천천히 해보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착각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렇게 기계를 기웃거리고 있는 사이 한가한 음식점 안으로 젊은 친구들 몇이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왔다. 분명 혼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금영씨였기에 금새 온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졌다.


“뭐지? 왜 안하고 서 있기만 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너 많이 배고파?”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였지만 듣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금영씨의 청각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도움을 청할까 카운터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아직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에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뒤쪽의 아이들에게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후 아이들에게선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비켜달라고 해야하나?”

“혹시 잘 모르시는 거 아닐까? 도와드린다고 말씀드려 볼까?”

마음은 급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 속이 타들어갔다. 그때 뒤에 선 아이 하나가 금영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요...”


위금영씨는 뜨거운 것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작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쉼없이 달려 집으로 왔다. 현관문이 닫히기도 전에 냉장고로 뛰어가 찬 물을 식도에 털어 넣었다. 찬물이 들어가자 귀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던 열기는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겨우 숨을 돌리고 금영씨는 큰 딸에게 전화를 했다.


“어~ 엄마.”

대수롭지 않게 받는 큰딸 목소리에 금영씨는 더 서러운 마음이 터져 나왔다.

”가현아~ 이제 엄마 끝났다!.“

”엄마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었어?“


”좋아하는 음식점에 갔는데, 키.. 키스... 아무튼 기계로 주문하는 걸로 바뀌었거든. 근데 주문을 못하겠는거야. 음식 주문도 못하고 내 인생 이제 다 끝났어.“

의식주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게 먹는 건데, 이제 먹는 것도 주문 못하면 굶어죽을 것만 같았다. 말이 안되는 것도 알지만 그냥 그땐 그렇게 절박한 문제로 다가왔다. 앞으론 이것보다 더 빠르게 그야말로 눈이 핑핑 돌만큼 바뀔텐데, 어떻게 살아나갈지 한 마디로 앞날이 깜깜했다.


”키오스크? 아유~ 우리 엄마 진짜 왜 이렇게 소녀 같으실까? 그깟게 뭐라고~ 참네. 주문 하나 못했다고 세상 끝난 것처럼 그래?“

”넌 내 맘 몰라. 그깟 음식 주문도 하나 못하는 데 앞으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냐?“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모든 시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들 말하지만, 금영씨가 바라본 지금의 변화는 이전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변화 앞에서 금영씨가 이전에 어렵게 익힌 것들은 무용해졌다. 그런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을 젊은 사람들 앞에서 꺼내놓으면 꼰대 소리를 들을까 싶어 미처 입밖에 내지도 못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예 적응해야겠다, 배워야겠다는 의지 자체가 꺽여버렸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무능으로 더 멀리 뒤처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자존감까지 뚝뚝 떨어져 나갔다.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586세대‘란 호칭. 금영씨는 지금의 세대가 누리는 자유와 문명의 이기들이 결국 자신들이 이룩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그들이 쌓아올린 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지금껏 자신이 익히고 배워둔 모든 지식들이 이 새로운 시대에 ’라떼는 말이야‘로 우스개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은 몸만 커다랬지 어떤 면에선 아이들보다 모르는 것이 많았다. 금영씨는 앞으로 얼마를 살지 알 수 없기에 다가올 미래가 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엄마~ 나도 키오스크 만나면 주춤해. 내가 다음에 같이 가서 주문하는 법 가르쳐줄게요. 한 번만 해보면 엄마도 금방 해. 왜 키오스크 화면은 하나같이 다 달라서 사람 헷갈리게 하는 지 몰라. 다 똑같으면 참 좋을텐데...“

위로하는 큰딸이 기특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지만, 그 마음이 온전히 금영씨에게 전달되진 못했다.

‘넌 모르잖아. 이 막막한 마음을.’

위로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 엄마를 보고 있으니 가현은 조금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꼈다.


“엄마~ 내가 지금 갈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괜찮다며 엄마가 힘없이 전화를 끊어서 가현은 금새 하던 일로 돌아갔다. ’이제 끝났다‘고 나라 잃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자꾸 뒷꼭지를 잡아챘지만 그 찜찜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 금영씨는 거실 한 구석에 있던 상자에 눈이 갔다. 상자 속 알록달록한 옷 하나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 마치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지의 세계가 금영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기듯이 그곳으로 다가가 상자를 열어 젖혔다. 지금껏 자신은 옷이라고 인정조차 하지 않던 온갖 옷들이 그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 상자 안이 아니라 의류수거함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과하게 찢어진 청바지, 배꼽이 아슬아슬 보일 것 같은 크롭티, 갑옷처럼 묵직하게 느껴지는 검은색 가죽 자켓 등... 옷들은 어떤 질서도 없이 그렇게 상자 안에 혼재해 있었다.


금영씨는 만지면 안되는 것인냥 그 옷들을 손가락 끝으로 겨우 집어 들었다. 이상하게 그날 그녀는 그 옷을 입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지금 자신이 기분이 이렇게 엉망인데 이깟 옷 입는 게 뭐가 대수인가? 다 찢어진 청바지는 엄두가 나지 않아 한쪽으로 치워두고 품이 아주 넓은 바지를 하나 꿰어 입고, 그 위에 어깨가 드러나는 블라우스 하나를 걸쳐 보았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요리조리 살펴보던 금영씨는 제 모습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였다. 그 뒤로 금영씨는 종종 소윤이 놓고 간 요망한 옷들을 한 번씩 입어보며 기분 전환을 했다. 물론 그것은 그녀 혼자만의 일탈이었기에 온 집안에 아무도 없을 때만 할 수 있는 기행이었다.


그날도 다리에 쫙 달라붙은 쫄쫄이 같은 옷을 입어봤다. 요즘 밖을 돌아다니면 이런 흉한 옷을 입고 다니는 젊은 아이들이 많아서 민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긴 티셔츠로 엉덩이라도 가리면 좋을텐데, 부끄러움을 모르는 요즘 세상이 말세다 싶었다. 겨우 다리를 쫄졸이 안으로 밀어넣자 다리가 숨을 못쉬는 것 같았다. 그때 금영씨의 머릿속엔 옷장 안에 있던 화려한 에스닉 블라우스 하나가 생각났다. 과거에 색이 고와 사놓긴 했는데 그 화려함이 과해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옷이었다. 그걸 가져와 쫄쫄이 위에 매치하니 자신이 패셔니스타가 된 것 같았다. 뭔가 허전해 옷장 깊숙한 곳에서 좀약 냄새를 풍기는 털코트를 입었더니 자신이 자신같지 않았다.


찰칵!

그때 뒤에서 들리는 난데없는 카메라 소리. 금영씨는 스스로도 놀랄 빠른 속도로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몸을 상대로 한 옷입히기 놀이에 얼마나 심취를 했던지 누가 들어온지도 전혀 몰랐던 것이다.

“할머니, 웬일이야? 웬일?”

첫째 가현의 딸, 소윤이었다. 금영씨는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지만 소윤의 행동이 더 빨랐다.


“잠깐만... 진짜 잠깐만 있어봐요.”

할머니가 금방이라도 옷을 벗어던질 것 같자 소윤은 옷 상자를 뒤엎을 참으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구석에서 구두 하나를 꺼내 들더니 만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빨간색 샌들로 발등 위를 가로지른 빨간 스트랩이 강렬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소윤이 할머니의 발에 샌들을 끼우더니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엉거주춤 금영씨가 소윤의 손을 잡고 일어서자 소윤이 박사를 짝 쳤다.

“완벽해요, 할머니.”


소윤이 사진을 찰칵찰칵 찍었다. 부끄럽다는 금영씨의 투정에 옆모습, 뒷모습 위주로 찍고 그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소윤이 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힙(Hip) 그 자체였다. 그 뒤로 금영씨와 소윤의 비밀 놀이가 시작됐다. 둘은 서로의 옷을 콜라보해서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물은 사진으로 남겨져 소윤의 SNS에 올라갔다. 금영씨는 소윤이 SNS에 올리는 것을 옆에서 면밀히 관찰했지만, 그걸 배운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소윤이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려 대단한 걸 해내는 그 과정에서 금영은 항상 아기로만 봐왔던 소윤이 낯모르는 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시물은 천천히 좋아요와 덧글이 늘어났다. 그리고 소윤이 금영씨에게 중년 모델이 되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녀의 인생에 돌반 변수가 난입한 것이다.



“금영씨, 예쁘게만 걸을 것 같으면 뭐하러 중년 모델 찾겠어? 젊고 예쁜 애들 천지인데...”

그 말이 금영이 고개가 바닥으로 쳐지자 모델이란 말이 무색한 통굽이 있는 효도화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나이에 하이힐 신지도 못해. 관절이 다 닳아 없어졌는데, 그거 신고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골다공증으로 다리 부러지면 이제 잘 낫지도 않잖아? 그러니깐 그런 건 다 생각하지마.”

속으로 역시 모델은 자신에게 맞지 않다고 한 번 더 생각하던 금영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중년모델 학원의 선생님을 바라봤다. 소처럼 순한 눈이었다.


“금영씨 낼 모레면 60 이잖아~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잘 생각해봐. 그냥 그냥 산 것 같은데, 그래도 뒤돌아보면 굴곡 참 많았다.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녀는 잠시나마 짧지 않았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았다. 너무 까마득해서 제가 살아온 삶 같지 않았다. 어디 드라마에서 본 거라면 몰라도.

“못 살 것 같아요.”

개미 소리 같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자 그것 보란 듯이 선생님이 다음 말을 이었다.

“못살아! 당연히 못살지! 나도 못살아. 근데 그 시간 때문에 중년 모델을 찾는 거야. 그 찐득찐득하고 징그러운 세월 산 노인네들 그거 보고 싶다는 거라고. 그냥 금영씨답게 걸으면 돼,”


한 번도 예쁘지 않은 모델, 당당하지 않은 모델은 생각해보지 못한 금영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다른 모델들처럼 곱지 않았고, 조금 주눅들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다리까지 다쳐 걷는 게 불편했다. 같은 모델학원 동기들은 제2의 인생을 산다며 한껏 들떠 있었지만, 금영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키오스크 사건으로 요즘 말로 멘붕이 온 시점에 소윤의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인생 전체에 대한 환기가 필요한 것 같아 모델학원에 등록했지만 그 마음을 먹는데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이 나이에 일을 만든다면 이후에 벌어질 번거로운 일들을 감수할 수 있을까? 해봐야 성공할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을 벌여서 주위의 비웃음을 사는 게 아닌가? 마음이 복잡했다.


그럼에도 금영은 새로운 옷을 입고 소윤의 격려를 받았을 때의 짜릿함을 잊을 수 없었다. 이제 시간도 많아졌는데, 뭔가 할 일이 생긴 것도 반가웠다. 실패한다고 해서 잃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냥 자신을 보여주면 된단다. 젊은 날의 상처로 살짝 저는 다리는 자신의 일부였다. 그때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어서 사라졌다. 자신의 다리를 보고 그들을 떠올릴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금영은 깊은 심호흡 후 런웨이의 시작으로 돌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쿵! 한 발을 내딛자 누군가의 선창이 들리고 이에 화답하는 군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있는 줄도 몰랐던 몸 안의 뜨거움이 존재감을 드러냈고 금영은 데지 않기 위해 다른 다리를 내디뎠다. 순간 다리가 시큰하면서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녀는 걷기를 멈추지 않았다. 런웨이의 끝에 도착하자 환영은 사라졌고, 선생님이 박수를 치며 칭찬했다.

“엑설런트! 불편한 다리로 걷는 그 워킹이 바로 금영씨의 스토리야!”



금영은 평소 애국심, 민주화 이런 무거운 문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학생이면 공부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 나랏일에 관여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그녀는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학생들이 무리지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칠 때 그 무리에서 번져나가던 그 뜨거움을 보고야 말았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연 최루탄 가스 속에서 들려오는 전경들의 발소리. 바닥을 끄는 전경 방패의 소름 끼치는 소리도 함께였다.


그날 밤 금영은 동기들을 통해 소식을 접했다. 같은 학교의 학우 한 명이 최루탄에 맞아 숨졌다고. 동료에게 잡힌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초점 없는 눈빛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질문은 하나였다. '같은 사람한테 이렇게 한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길래?' 뱃 속 깊은 곳에서 날 것의 무엇이 올라왔지만 결국 토해낼 순 없었다. 아무 것도 몰랐던 금영은 그때 이유없이 절실해졌다.


시간이 지나 금영은 그때의 그 뜨거움이 자신도 있는 줄 미처 몰랐던 사명감이었는지 아니면 금방 새빨갛게 물들어 버리고 마는 군중심리인지 가만히 곱씹어 봤다. 그게 뭐였든 그때는 어떻게 돼도 좋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역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짜릿함도 한 몫 했다.


그런 금영이 백골단과 마주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 시위대의 외침이 아스라이 들리고 코 끝엔 최루탄 가스가 맴돌았다. 그때 만난 청자켓에 스노우진 그리고 하얀 운동화. 말로만 듣던 백골단이었다.

“저... 전... 전 아니에요. 전 시위 안했어요. 진짜에요. 믿어주세요.”

뒷걸음질치던 금영은 골목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못을 보지 못해 다리가 쭉 찢겨 나갔고 때를 놓치지 않은 짧은 곤봉이 피가 흐르는 그녀의 다리를 가격했다.


지금껏 뭔가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부풀어 있던 금영은 급작스레 차가운 현실로 추락했다.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하는데, 발가락만 바닥에 디뎌도 고통이 찌르르 온 몸을 관통했다. 마치 몸이 뜨거운 꼬치에 꿰어진 것 같았다. 남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떤 일을 겪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와 함께 주택가 골목 안으로 도망쳤고 겨우 작은 틈을 발견해 숨었다. 문 밖으로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졌다.


한숨을 돌린 금영은 남자와의 거리가 너무 좁은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좁은 공간 안에 서로의 몸은 지나치게 가까워 서로의 호흡이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금영의 눈 앞엔 땀에 젖은 티셔츠가 있었고 그 아래 그의 가슴은 크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때 멀어졌던 발소리가 다시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남자 둘이 지척에서 멈춰서는 것이 들렸다.

“하~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넌 오늘 몇 개 잡았냐?”

“뭐 일일이 세가면서 잡나? 한 7~8개 한 것 같은데...”

“이것들 때문에 퇴근도 못하고, 마누라가 맨날 바가지 긁어서 못살겠네.”


금영은 금방이라도 그들이 자신들이 숨어 있는 문을 열어 젖힐 것 같았다. 손에서 시작한 떨림이 온 몸으로 번져갔고 눈에선 어찌해볼 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 앞의 남자가 고개를 내려 금영을 살피더니 떨리는 금영을 살짝 안아주었다.


그 접촉에 금영은 떨림이 다소 진정되었지만 오히려 몸엔 열이 오르며 갈증이 났다. 두려움에 잠식되어 제 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충동적으로 까치발을 하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남자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살짝 젖은 입술이 말캉하게 부딪혀왔다. 담 너머에 있는 백골단은 더 없이 가깝게 느껴져 그 대조가 선명했다. 금영은 허겁지겁 그의 입술을 빨고 혀를 빨고 그에게서 온기를 찾았다. 어쩌면 마지막 따스함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더 갈급이 났다.



여러 개의 작은 패션쇼에 섰다. 떨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예상보다 많이 떨리지 않는 것이 의외였다. 60여년을 살면서 별 일을 다 겪었는데, 남들 앞에서 걷는 것이 무슨 대수랴?

“누님 안떨립니꺼?”

“응... 별로. 수호씨는 떨려요?”

“누님, 저는 사실 쪼까 떨립니다. 누님은 무대 체질인갑네요.”


쑥쓰러운 웃음을 짓는 최수호씨는 금영과 같은 중년 모델로 모델이 되기 전엔 강력계 형사를 했다고 한다. 조금 이른 은퇴를 하고 아들의 추천으로 모델에 도전하게 되었다고. 평소 멋스럽게 옷을 입는 아버지에게 모델이 어울릴 것 같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최수호씨는 동양인치곤 드물게 수염이 아주 근사하게 자라 멋지게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다. 실전에서 다져진 근육 덕분에 그가 입은 슈트는 호리호리한 10대, 20대 모델들과는 사뭇 다른 핏을 보여 주었다.


홀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일사분란하게 터지는 카메라의 셔터음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쇼엔 중년 모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젊은 모델들과 한 무대에 서니 비교하지 않으려 해도 눈이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발의 준비를 하고 위금영씨는 사실 그 어느 때보다 떨면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떨림을 인정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아 박수호씨 앞에선 허세를 부려본 것이다. 서울패션위크는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쇼로 이 무대 위에 서는 것이 꿈만 같았다. 언감생신 꿈도 꿔볼 수 없는 큰 무대였기에 운이 좋았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 무대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성공을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런 일이 마법처럼 이뤄지자 무서웠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이 어쩌다보니 맨 앞에 서게 되었다. 순간 눈 앞의 모든 것이 부담으로 금영의 존재를 짓눌렀다.



때로 상상 속의 미래는 현실보다 더 가혹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스스로 믿지 못하는 마음, 제 손으로 확정지어버린 비극을 먹고 그 몸체를 불린다. 실제는 훨씬 더 가벼울 수 있었다. 금영은 덩달아 딸 가현을 또 어린 소윤을 떠올렸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앞선 걸음이 없어 두려웠던 자신, 그러했던 자신의 발자국을 밟고 온 가현, 그리고 다시 그 뒤를 그대로 따를 수도 있는 소윤.


금영은 비록 자신의 앞엔 누구도 없었지만 자신의 뒤로는 많은 발자국이 따라올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 발자국은 낯 모르는 타인의 발걸음이겠으나 거기에 내 딸이 있고 내 손녀가 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자신의 걸음에 매겨지는 지엄함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역사의 가운데 있던 것 같은 뜨거움이 지글지글 끓어 올랐다. 보는 사람 입장에선 찰나의 시간이었겠지만 그 동안 금영은 조금 달라진 모습을 감춘 채 런웨이로 발을 내디뎠다.



“선생님, 만나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사람들에게 들려준다고 하는데 이만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요?”

최나린씨는 그동안 많은 매체에서 보아왔던 위금영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동안 남성들에 의해 독점 되다시피한 ’멋진 중년‘이란 표현을 여성에게도 돌려준 인물이었다. 평범했던 그녀가 중년 모델로 성공하고 제2막의 삶을 산다는 것이 더없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많은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선생님, 패션모델이신데 옷이 너무 소박하신 거 아닌가요?”

처음 위금영씨를 만났을 때부터 최나린은 그녀의 옷에 눈이 가던 참이었다. 오래 입어 색이 적당히 빠진 청바지에 밋밋한 흰 티셔츠를 입은 그녀는 모델이라기보단 그냥 조금 세련된 할머니 같았다.

“하하... 패션모델도 이제 옛말이죠. 제 옷이 사실 몇 개 없어요. 아마 트렁크 하나에나 다 담길까?”


최나린씨는 최근 위금영씨의 변화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 위해 그녀를 만났다. 서울패션위크는 물론 서머셋하우스에서 열린 런던패션위크에도 섰던 그녀였다. 런던패션위크에서 위금영씨를 부른 것은 독창적인 디자인 덕분에 패션계의 이단아로 불리던 디자이너 ’안나 맥퀸‘이었다. 안나 맥퀸은 위금영씨는 물론 여러 나라의 중년 모델들을 자신의 무대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과거 유행했던 옷을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한 옷을 입었는데, 그 어떤 패션쇼보다 특별했기에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세간에선 레트로 패션쇼라고 열광했지만 그 말로는 표현이 충분치 않았다.


그 쇼에서 위금영씨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를 입고 워킹을 했을 때 무대 위엔 호흡 하나 조심스러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옆으로 길게 트인 그 치마 사이로 그녀 다리의 흉터가 그대로 보인 것이다. 누군가는 패션쇼에 어울리지 않는 기괴함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중년모델의 진짜 매력을 봤다고 추앙했다.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그 흉터가 그녀가 과거 6.10 민주항쟁에서 얻은 상처임을 알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는 두 컨텐츠의 조합이 한국사회를 흔들었다.



“선생님, 패션모델로서 인터뷰는 많이 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오늘 인터뷰는 좀 다를 꺼에요. 최근 선생님의 색다른 행보에 몰리는 눈이 많습니다.”

“그렇겠죠. 패션모델이었다는 사람이 옷을 다 집어 던지니 노망이 났나 할 수 있겠죠.”

“패션쇼 폐지 활동가라니 삶이 너무 극단적이신 거 아닌가요?”


“그러게요. 저도 미처 생각지 못한 변화입니다. 패션모델이 될 줄도 몰랐고, 이렇게 패션쇼 폐지활동가가 될 줄도 몰랐어요. 나이 먹어서 이런 변화들이 다가오는 것이 사실 기대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위금영씨는 정말 그 변화를 달게 받고 또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덩달아 최나린 역시 자신의 삶에 어느날 불쑥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되는 것 같았다. ’나도 과연 즐길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여쭤보면 대답해주실 겁니까?”

최나린의 질문에 위금영씨는 잠깐 먼산을 바라봤다. 저 초고층 빌딩들 사이로 산이 있다면 그랬을 거였다. 그러고 보니 빌딩들 사이로 조막만한 하늘이 보인다. 채도 높은 파란 하늘에 띈 새하얀 구름이 청량하다.


“우연히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가나에 가게 되었어요. 저개발국들 아이들을 돕기 위한 활동이었는데, 공식적인 활동이 끝난 후 현지 가이드에게 부탁을 했어요. 진짜 가나 모습을 보고 싶다구요. 본래 내가 살던 곳이 아닌 곳에 가면 현지 시장을 꼭 가보곤 했거든요. 그곳에서도 그런 걸 볼 거라 생각했어요.”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금영씨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이미 가난 포르노를 질리도록 보고 온 그녀였을텐데 뭐가 그녀로 하여금 저런 표정을 짓게 했을까? 최나린은 궁금증이 일었다.


“카타만토 시장이었어요. 그 나라 과일이나 조잡한 먹거리가 있을 꺼라고 생각했던 그곳에 1주일마다 컨테이너가 들어온다면서 거길 가보자고 하더라구요. 컨테이너 안엔 헌옷이 들어있었는데, 매주 1,500만개가 들어온대요. 카타만토 시장은 아주 규모가 크고 아주 유명한 헌옷 시장이었어요.”

잠시 숨을 고른 위금영씨가 마치 눈 앞에 그 풍경을 보고 있는 듯 그 모습을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최나린은 목이 바싹 말라버린 것도 잊은 채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지요. 그 시장 뒤로 옷의 산이 불타고 있었어요. 옷의 무덤이었죠. 화마가 미치지 않는 곳엔 소들이 합성섬유를 풀처럼 먹고 있더군요. 오다우강엔 옷들이 가득 차서 흐르고 있었어요. 거기 물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만큼 많은 옷이었어요. 최기자님, 우리나라가 헌옷수출국 세계 5위란 사실을 알고 있나요?”


최나린은 평소 분리수거를 열심히 했다. 또 쓸모없어진 옷들을 옷수거함에 넣으며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일 꺼란 사실에 위안 받았고 쓰레기봉투 비용을 절약한 간사함을 모른채 했다. 매년 1,000억개의 옷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 330억개의 옷이 재고로 불타 사라진다는 사실을, 세계 2위의 의류생산기지인 방글라데시의 다카에서 노동자들은 한 달에 12만원을 받는다는 것을, 여과장치 하나 없이 배출된 폐수와 옷 짜투리가 흐르는 부리강가강의 검은 물살을 그녀는 미처 몰랐다. 가나와 방글라데시와 같은 나라들이 우리들의 소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을 줄은 꿈에서라도 상상하지 못했다.


“옷의 무덤, 옷의 강을 보고 나니깐 머리가 차게 식더군요. 지금 내가 뭘하고 있지?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옷 소비와 재고를 촉진하고 있는 패션쇼에 서는 제가 머저리 같았죠. 나이 60에 길을 잃은 것 같았어요.”

길을 잃었다고 말하는 위금영씨의 모습은 정말 절망적으로 보였다. 저 나이에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감히 상상되지 않는 상실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위금영씨의 얼굴에 조금씩 힘이 돌아왔다.


그 뒤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행보가 이어졌다. 급작스레 패션쇼 모델 은퇴를 선언한 위금영씨는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특히 패션쇼 폐지를 위해 애쓰는 활동이 대중의 시선을 받았다. 자신의 활동이 누군가에게 하나의 자극이 되길 바란다고 소소한 바람을 말하는 위금영씨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킬힐에서 내려온 그녀는 어릴 적 외할머니에게서 느끼던 따스함이 가득했다.



인터뷰를 마친 위금영씨가 최나린의 손을 살짝 잡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손길이 따스하고 담백했다. 위금영씨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던 소녀를 만나 팔짱을 낀 채 커피숍을 빠져나갔다. 카페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리고 위금영씨가 소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여 뭐라고 속삭이자 둘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그 소녀는 위금영씨의 매니저로 알려있는 외손녀, 소윤양일 것이다.


최나린은 고개를 기울여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위금영씨가 패션모델은퇴를 선언하고 환경운동가로 돌아설 즈음 소윤양에게 보낸 편지로 대중에게 공개되어 꽤 반향이 있던 편지였다.


「 사랑하는 아이, 소윤에게


소윤아~ 우리집 안에 화분 하나가 있었어.

선물 받은 화분이었는데, 그걸 또 죽일까봐 난 일부러 모른척 했었다.

그러다 그 화분의 존재조차 까먹어버린거야.

어느날 문득 눈에 걸리는 그 화분을 발견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았지.

한동안 고작 물이나 준 게 다인데, 어쩜 그 잎은 두껍고, 윤기가 흐르고 쑥 자라 있어 놀랐다.

그 식물이 고맙고 대견하고 뭔가 신비하면서 마음이 뭉클해지는거야.


우리에게 네가 그렇다.

모두 충분히 아껴주고 보살펴주지 못했는데, 넌 그 식물처럼 잘 자라 주었잖니?

네 엄마는 네가 겉모습을 채우는 일에만 열중한다고 걱정을 하지만,

나는 알 것 같다.

그렇게라도 넌 너의 삶을 열심히 견디어내고 있었다는 것을.


뒤돌아보니 우리는 너에게 열정으로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주었구나.

앞으로 열심히 살지 않아도 좋아.

17살의 너나 60살의 나나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겠지.

설레면서 두렵고 기대하면서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너의 시작과 나의 시작이 다르고 가닿은 곳이 다르더라도

가는 그 길에 나는

소윤, 너의 손을 잡고 싶다.


20OO년 7월의 어느 날, 너를 사랑하는 금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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