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첫눈에 사랑에 빠질 때 종소리가 들린다고 했고 또다른 누군가는 상대에게서 후광을 보았다고 했다. 낮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가 밤엔 펍이 되는 그곳에서 우연은 같은 아르바이트생으로 그를 만났다.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자신 주위의 소음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그래서 그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눈을 뗄 수 없었는데, 그의 공간만 다른 시간의 적용이라도 받는지 그 모습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렷히 보였다. 우연은 그 느린 움직임이 어떤 감정의 전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혼자 속앓이를 하던 우연이 겨우 그 마음을 고백했다. 학생들이 모두 떠난 중앙도서관 앞 벤취에서 그로부터 ‘사귀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연은 검은 밤하늘에서 갑작스레 별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시간은 밤이건만 주위가 전혀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연도 그도 서로에게 첫사랑이었다. 처음 갖게 된 그 마음이 너무 소중해서 둘은 그 감정을 조금씩 베어물며 서로에게 스며들었다.
데이트를 할 때 그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캔음료의 입구를 꼭 자신의 새하얀 옷깃으로 닦아 우연에게 건네곤 했다. 함께 식사를 할 때도 반찬에 생선구이가 나오면 그는 언제나 가시를 바른 생선살을 그녀의 새하얀 쌀밥 위에 올려 주었다. 그리고 보여주는 그의 무해한 미소. 그때마다 우연은 마음이 조금 따끔해졌다. 처음엔 감동일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그것이 제 마음의 불편함임을 우연은 깨닫게 되었다. 처음 알게 된 균열이었다.
우연은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어린 시절 사촌오빠에게 받은 폭력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뾰족한 감정의 정체였다. 우연에게 사랑이란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고귀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행동 뿐 아니라 감정의 공유까지 포함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은 일부러 소리내야 했고, 그것엔 조금의 거짓도 없어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이니까. 거기서 우연은 길을 잃었다.
우연은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물론 세상 사람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을 알지만 말하지 못하는 마음은 너무도 불편했다. 우연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그가 부러웠고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 그를 돌이킬 수 없도록 더럽히고 싶었다. 과거의 진실을 말하고자 마음을 먹었다가 뒤를 돈 순간 말하면 안되겠다고 다짐하는 식이었다. 그 뒤에 벌어질 결과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우연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꼭 그 사실에 진실이란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런 추악한일에 붙이기엔 ‘진실’이란 단어는 너무 대단한 단어다. 그럼에도 우연에게 그 사건은 현실을 압도하는 그 어떤 진실처럼 느껴졌다. 이미 지난 일인데도 그 일이 그녀의 현재에 드리우는 불안한 기세는 이럴 때 더욱 강해졌다.
우연은 그와 이별을 했다. 사귈 때 더 없이 친절했던 그는 작별할 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주저함이 없었다. 우연은 이 이별을 돌이킬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이별의 원인은 표면적으론 사소하게 쌓인 서운한 감정들 - 예를 들면 그가 우연에게 하는 만큼 감정의 돌봄을 돌려받지 못했다던가 그런 종류의 것들 –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연은 자신이 먹었던 사특한 마음이 이별의 원인은 아니었을지 또 그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했다면 관계가 어그러지지 않았을지 묻고 또 물었다. 이별은 언제나 한 사람에겐 너무나 또렷한 진실이지만, 상대에게는 끝까지 풀 수 없는 미스테리니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와의 작별로 진실을 이야기해야 했던 유예기간은 보류되었다. 우연은 슬프고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사촌오빠는 10대 초반이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는 재혼으로 새 가정을 꾸려 떠나는 불행을 경험했다. 어느날 아침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오빠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우리집으로 왔다. 당신의 자식들도 충분히 많아 입에 풀칠하는 것이 쉽지 않은 때였다. 방은 두 개 뿐이었고 우리들이 쓸 방은 윗방이 유일했다. 그곳 우연의 옆 자리가 오빠의 자리였다. 사촌오빠 옆에 잠들기에 우연의 언니들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함께 살던 시절의 오빠는 사춘기였기에 성적 호기심이 왕성했을 거였고, 우연은 자신이 피해자가 된 데에는 옆에 있었다는 것이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10살의 우연은 잠에서 깬 척을 하면 안된다는 걸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 어떤 협박이나 위협이 없었는데도...
종종 아버지는 사촌오빠가 독립 후 안겨줬던 선물과 용돈에 대한 추억을 곱씹었고, 연락이 닿지 않는 그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거기엔 자식처럼 키운 오빠에 대한 배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우연은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다시 진실의 유예기간이 도래함을 느꼈다. 진실을 드러낸 후 아버지의 표정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우연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진실을 알고 분노하리라는 것, 어쩌면 쓰러지실 수 있다는 것 나아가 그로 인해 자신의 안온한 일상이 다시 파헤쳐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우연의 목구멍을 틀어 막았다. 고통 받는 건 그 시절의 어린 우연 하나면 족했다.
“올해 유독 많은 태풍이 예보되어 있습니다. 12호 태풍 개미는 베트남에서 큰 피해를 입힌 후 그 기세가 줄어들어 한반도엔 많은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비가 예상되고 있으니 가정에서는 외출을 삼가시고 폭우피해가 없도록 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뉴스 속의 기상캐스터가 전하는 것과 달리 문 밖의 비는 그렇게 거세지 않았다. 태풍의 상륙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면 흔한 여름비려니 생각했을 터였다. 문밖의 좁은 뜰에 깡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던지 그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가는 빗물이 제법 영롱한 소리를 냈다. 늦은 시간이지만 우연은 쉽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날씨 때문인지 유독 마음이 심난했다. 공기 중 가득 녹아 있는 수분이 그런 마음을 더 부채질하는 듯 했다.
괜히 마음이 일렁이던 우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집을 나섰다. 그냥 바람이라도 한 줌 쐬고 올 요량으로. 우산을 받쳐들자 우산에 투두둑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금 더 선명했다. 늦은 시간 골목 안 조심스런 생활의 소음들을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빗소리의 존재를 더욱 크게 만들었고 가만가만 걷는 우연의 발소리조차 빗소리에 잡아먹혔다.
편의점에 들른 우연은 시원한 음료를 한 잔 사서 단숨에 마셨다. 식도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시원함에 정신이 바짝 드는 것과 반대로 육체는 바로 쓰러져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씨 탓인지 자꾸만 늦은 시간 첫사랑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욕망을 누르기 힘들었다. 지난 몇 달 간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가끔 어떤 계기가 있으면 모른척 했던 마음이 불쑥 머리를 들었다. 낮에 우연히 그의 이메일 닉네임이 ImissYou인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 You가 우연인 것 같아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내는 편의점 문을 열고 자동 우산을 팡하고 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아마도 편의점 안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남자 하나가 우연의 곁으로 슬쩍 다가왔다.
“저 우산이 없는데 좀 같이 쓸 수 있을까요?”
남자의 손에는 우산이 없었고, 몸은 이미 조금 젖어 있었다. 우연은 시선을 돌려 건너편의 거리를 살폈다. 젖은 도로 위에 긴 소리의 꼬리를 남기며 몇 대의 차가 달리고 있었고 차량의 전조등 불빛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더 선명했다. 이런 날씨에 우산을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감기에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연은 조금의 친절함을 베풀기로 마음 먹고, 우산을 키 큰 남자에게 건넸다.
처음 보는 남자와 우산 하나를 나눠쓰는 일에 어색해 우연은 자신이 베푼 친절에 대해 금새 후회를 했다. 그때 그런 우연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남자가 말을 걸었다.
“비가 너무 굵어지는데, 잠깐 저쪽에서 비 좀 피했다 갈까요?”
남자가 가르키는 곳은 이미 불이 꺼진 5층 빌라였다. 1층 현관문은 도어락이 없이 반쪽만 열려 어두운 실내까지 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우연이 알기로 그쪽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주거지가 많은 곳이었다. 남자를 저곳까지 안내한 후 우연은 슬그머니 제 갈 길을 갈 계획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빌라의 1층 안으로 들어서자 뒤에서 남자가 우산을 접는 소리가 들렸다. 우산이 접히며 빗방울 몇 방울이 드러난 우연의 다리에 튀었다. 우연과 남자가 들어서자 센서등이 불을 밝혀 잠시 눈이 부셨다. 그곳은 비오는 날의 눅눅함의 냄새와 구석구석 쌓인 먼지가 만나 익숙한 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왔다. 뒤돌아서려는 우연의 뒷덜미에 갑작스레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그리고 불쑥 뻗어진 두 팔이 우연의 상체를 결박했다.
우연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처음엔 성가신 일이 생겼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성가신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남자를 뿌리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돌덩이 같은 남자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피하고 옷을 헤짚는 손길을 밀어내려고 하자 우연의 아랫배에 주먹이 날아 들었다. 순간 숨이 막히면서 그 어느 때보다 눈 앞의 현실이 명징하게 다가왔다. 일상 속 하나의 에피소드는 바닥으로 추락해 산산히 부서졌고 우연 역시 잔인하리만치 현실의 바닥으로 끌려 내려왔다.
그 순간 우연은 첫사랑과 사귈 때 진실을 운운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겨우 그 정도 일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혼자 힘겨운 고민을 했던 게 참으로 덧없이 느껴진 탓이다. 마치 세상이 우연에게 묻는 것 같았다. 이래도 그 일이 네 삶의 단 하나의 진실이냐고? 현실이 우연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절대 곱게 자랐다고 볼 수 없는 우연이었지만 그녀에게 가해진 물리적인 폭력은 처음이었고 그만큼 파급효과가 대단했다. 그가 우연의 몸을 침범해 오는데, 우연은 두려움 안에 갇혀 비명을 지를 수도 어떤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지금 경험하는 이 일이 다가올 미래엔 아주 천천히 자신을 말라비틀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바로 다음에 이어질 현실의 폭력이 공포 그 자체였다. 우연은 경직된 몸 그대로 얼어붙었고 시간조차 멈춰 버렸다.
우연의 등 뒤로 누군가의 평온한 일상의 공간이 온기를 전해왔다. 늦은 시간이니만큼 집 안의 가족은 깊은 잠에 빠졌을 것이다. 우연은 시선 아래의 남자에게 향했던 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했다. 힘을 내 달리면 미처 숨이 차기도 전에 빛의 도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리였다. 닫힌 유리문 너머로 바람이 몰고온 비가 내달리며 이리 저리 몸을 뒤채겼다.
“미친년”
겨우 도망친 우연이 좁은 골목을 지날 때 건너에서 오던 행인이 짓씹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때 우연은 허리춤이 너무 큰 청바지만 겨우 입고 있었다. 우연은 자신을 몹쓸 균이라도 되는 듯 멀리 비켜 가는 행인을 제 차림도 잊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행인의 눈빛엔 경멸이 가득했다.
골목에 위치한 헌옷수거함에 겨우 손을 넣어 건진 것이 큼지막한 청바지였다. 멀지 않은 집을 최대한 골목으로 돌아서 가자 집까지의 길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태풍이 오는 밤, 거리에 사람들은 없었지만 모든 기척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의 경멸에 찬 혼잣말을 듣자 행인이 자신을 그냥 지나쳐 갈 것이라는 것을 우연은 예상할 수 있었다. 행인은 어쩌면 내일 친구들과 골목에서 만난 벌거벗은 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진심으로 우연을 오해하고 지나쳤지만 그날 그 무심함이 너무 다정해서 우연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날 새벽 우연은 덜덜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겨우 진정하고 그곳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들끓는 두려움에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릴 것 같았지만 그곳에 남아 있을 자신의 흔적이 너무 끔찍해서였다. 그곳을 찾는 움직임은 스스로 생각해도 기이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지갑에 있던 현금 얼마가 사라졌고, 학생증을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버려진 채 여전히 비를 맞고 있었다.
우연은 종종 그때 일을 떠올렸다. 매해 8월이면 그날이 생각났다. 특히나 비가 오는 8월이면 마음이 아픈 것도 같았고 몸이 아픈 것도 같았다. 한 해, 두 해, 셈을 하다가 어느새 세지 않게 되었다. 사실 겉으로 우연은 너무나 멀쩡했다. 그 당시엔 좀 침울했을지 몰랐지만, 그녀에겐 영위해야 할 일상이 있었고 그 일상을 따라가는 것만 해내도 남들 눈엔 멀쩡해 보였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도 매체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성범죄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살이나 자해 시도도 하지 않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그녀의 일상은 평온했다. 누구에게라도 그런 속사정을 얘기했다면 실없는 농담 말란 대답이 돌아왔을 것이다.
졸업을 얼마 안남긴 대학생 우연은 교양수업의 팀 과제를 위해 팀원들과 함께 영화를 봤다. 성범죄 생존자의 이야기로 눈물 콧물 빼게 만들어진 일종의 신파 영화였다. 영화는 세간에 제법 널리 알려진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자체로도 꽤 유명세를 얻었다. 숨죽이며 영화를 본 팀원들이 영화가 끝나자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여자 팀원은 분노했고 주눅 든 남자 팀원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들은 피해자를 동정했고,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을 비판했다. 그들은 성범죄가 얼마나 끔찍한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해보고 있어 그것이 그들 표정에 선명히 드러났다.
우연은 조금 역겨움을 느끼며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보던 중 자신도 사실은 성범죄 생존자라는 것을 상기했다.
“왜 평생 고통받을 꺼라고 생각해요?”
결을 달리 하는 우연의 질문에 앞에 앉은 팀원들이 눈알을 굴리는 소리가 우연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낙서를 끼적이던 남자 팀원까지 고개를 들어 우연을 살폈다.
“사실 잊고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도 있잖아요? 무슨 범죄의 피해자는 동정받는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매뉴얼이라도 있는 건가?”
우연이 한 마디를 더 내뱉자 그 팀원들은 못들을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얼굴이 새하얘졌다. 물론 그녀라고 해서 생존자들의 고통을 폄혜하거나 그들의 노력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냥 저런 전형적인 반응이 제3자의 한계구나 싶어 한숨부터 나왔다. 그 뒤로 팀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이 어색해졌고, 모임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극장을 나서던 우연이 중얼거렸다.
‘그래봤자 몇일짜리 동정이면서...’
“너 정상 아니야.”
대학 졸업 후 사회인으로 사귄 첫 연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우연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 그 말이 아니었다면 우연은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잊고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와는 꽤 잘 맞다고 생각해왔던 우연이었기에 그 말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를 통해 우연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녀는 대체로 모든 일에 무덤덤하고 담백한 편이었다. 남자친구는 그것을 우연이 이런 관계에 서툴러서라도 결론 내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연이 항상 자신에게 선을 긋고 더이상 다가오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다가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 벽은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육체적 관계를 가질 때도 우연이의 몸이 지나치게 경직되고, 눈빛이 공허해지는 것은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그러다 그녀가 퓨즈가 끊어지듯 기절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그는 이별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이 범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연은 정신과에서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이후 상담 선생님은 우연에게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다. 자신을 상처 그 자체로 바라보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누가 아닌지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다. 생존자의 정체성은 상처의 경험도 질병도 아니었으므로. 자신이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우연은 상담실을 나서며 콧방귀를 꼈다. 그 사건은 자신의 삶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 일이 우연의 삶에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심하는 시도 자체가 불필요했다. 의미를 부여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니까. 단순히 그녀는 운이 나빴을 뿐이고, 교통사고처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므로 그 어떤 충고도 동정도 필요하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남자. 그가 들고 있던 담배를 우연이 가져갔다.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후 고개를 뒤로 젖힌 우연의 입에서 하얀 연기를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녀 손가락 사이에 껴진 담배의 재가 위태로웠다. 그녀 아래의 남자가 조금은 몽롱한 눈으로 실소를 짓더니 손을 들어 우연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우연은 잘록한 허리를 흔들며 생각했다. 10년전 그날, 그것이 범죄가 아니고 원나잇에 의한 하룻밤이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상황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건 스스로 결정한 일었기 때문에 참담함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로 그녀는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자신의 삶에서 육체적 관계가 빈번히 일어나 그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면 그런 상황도 가볍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가해자에게 자신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준 것이 우연 자신인 것 같아 억울했다. 그 일이 다시 생긴다면 좀 뻔뻔하게 어쩌면 그 상황을 즐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연은 적지 않은 남자들과 가벼운 관계를 맺었다. 남자를 고르는 허들은 매우 낮아서 역겹지만 않으면 문제 없었다. 그것은 예방주사였다. 모두가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지 못할 일이 우연의 삶에선 이미 일어나 버렸고 그렇다면 이후 얼마든지 다시 벌어질 수 있으리라. 우연은 다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참담해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그냥 맘에 안드는 원나잇 상대라고 생각하면 그뿐이니까.
그날은 예고없이 다가왔다. 너무나 급작스런 일격에 우연은 제 존재가 뜨거운 불에 달궈진 쇠꼬챙이에 꿰어져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이 정수리를 달구던 그때, 제각각 자신의 직장을 향해 걷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 조금 더러운 인도 위였다. 우연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이 그 일과 대면해야 함을 깨달았다. 사귀던 남자친구의 작별 통보를 카톡으로 받은 직후였다.
우연은 나름의 최선을 다해왔다. 그 노력들은 다 무용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들이 소진된 것을 알게 되었다. 명백히 실패였다. 미루고 미뤄왔던 감정을 더이상 피할 수 없이, 이젠 정말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혼란스럽지 않을 정도로 적확하고 당혹스런 대면이었다. 우연은 자신이 괜찮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지만 한 번도 위로받지 못한 10살의 아이도, 21살의 그녀도 어쩌면 전혀 괜찮지 않을지 모르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모르는 답을 찾아야 하는 상황은 막막하기만 했다.
우연은 스스로 그 일을 돌아보게 되는 데에만 때론 10년이 때론 20년이 걸렸다. 공소시효라는 것은 어쩌면 생존자로 하여금 겨우 살아나갈 수 있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인지도 몰랐다.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그랬을까? 아니 사실 그날 그때부터 우연은 많은 걸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의 중간 중간이 뭉텅뭉텅 베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경험일텐데 기억은 초라할만큼 미미했다. 가장 신기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남자 얼굴이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정말 어느 날 갑자기 그 남자가 우연을 찾아와 코 앞에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고 해도 우연은 무슨 일인지만 궁금해하며 눈을 꿈뻑거렸을 거였다.
그제서야 우연은 지금껏 기다려온 것이 바로 자신을 속절없이 무너뜨릴 누군가임을 깨달았다. 괜찮다며 견고하게 쌓아둔 벽을 허물어 여전히 울고 있을 과거의 자신을 만나게 해줄 누군가 또는 무언가. 그 벽은 우연 혼자 세운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성범죄 생존자에게 기대하는 역할들이 그 벽을 더욱 높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가해자가 보이는 전형적인 뻔뻔함 또한 그들의 무기가 됐다.
그날의 일에 대해 마르고 닳도록 얘기하면 자신 안의 상처와 분노도 마를 것 같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음 아파할 가족들, 그런 상황 자체를 불편해할 사람들, 어쩌면 이어질지 모를 2차 가해. 그렇게 과거의 우연들은 견고한 벽 안에 철저히 고립되었고 평온을 위장했다. 자신을 완벽하게 깨뜨리고 망가지게 해 과거의 그녀를 만나게 해줄 멸망이 필요했다.
제 안에서 흔들리는 칼날이 자신을 베든 타인을 베든 그 칼날을 손에 쥐어야 할 때였다. 그렇지 않다면 우연은 지난 연인의 표현 그대로 퓨즈가 나가서 언제고 다시 쓰러질 것이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예행연습인지도 모른다. 우연은 사촌오빠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연락이 끊겨버린 사촌오빠의 소식을 수소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던 사업이 잘 되지 않았던지 오빠는 몰려드는 채권자들을 피해 잠수를 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한때 한솥밥을 먹고 한이불을 덮은 시간 때문인지 연락을 받은 오빠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 주었다.
“오빠,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오빠는 우연의 물음에 도통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우연이 그때 일을 알고 있음을 암시하자 그는 크게 뜬 눈을 들어 우연을 향했다가 잠시 후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가가 좁아지는 것 같더니 다문 입술이 집중하듯 슬그머니 떨어졌다.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리는 손짓이 빨랐다. 한동안 과거를 더듬던 오빠의 입에서 탄성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오빠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걸 겨우 떠올린 모양이었다. 정말 까맣고 잊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거짓 없는 모습이었다. 깨달음 후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고 마른 세수를 했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나온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찾았다 저 혼자 분주했다. 그리고 불을 부치려는 찰라 건너편의 나를 보더니 다시 담배를 주머니 안에 도로 넣었다. 풀기 힘든 난제라도 만난 듯 난감해하며 한동안 상체를 숙이고 있던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지금껏 얼굴을 물들인 당혹감은 천천히 얼굴에서 옅어지고 있었다.
“작은 아버지는 아셔? 하긴 아셨으면 너 혼자 왔을 리가. 얼마나 붙같은 분이신데...”
그는 왜냐고 묻는 우연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답은 너무 뻔해서 입에 올릴 필요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우연의 얼굴이 치욕으로 붉게 물들었다. 우연 너머의 오빠는 10살 사촌동생에게까지 발정하는 짐승이었다.
그는 그 일은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지만 모두 지난 일이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듯 우연에게 물었다. 그의 말처럼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수도 있고, 그가 우연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고 밖에서 사고를 쳤다면 뒷감당을 하느라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됐을 수도 있었다. 완전히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가해자가 입에 담기엔 지나치게 뻔뻔한 소리였다.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우연은 입안이 썼다.
자기 할 말을 다 마친 오빠는 건너편의 우연은 흘낏 쳐다보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에 홀가분함이 묻어 있었고 카페의 문은 눈치없이 명랑한 종소리를 냈다. 우연은 괜히 찾아와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 건 아닌지 후회의 마음이 들면서도 그 일을 평생 까맣게 잊고 살 그를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우연은 그 자리에 앉아 손톱으로 손바닥의 가장 여린 살을 찌르고 또 찔렀다. 계속 짓씹어대던 입 안의 여린 살은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잠시 후 우연의 머릿속이 차게 식었고 뜨거웠던 머리 속의 열기가 발밑으로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멀거니 카페 문을 바라보고 있던 우연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일어서느라 성급하게 부딪히는 테이블 위의 유리잔 속 물이 조심성없이 흘러 넘쳤다. 카페를 성큼성큼 빠져나온 우연이 앞선 오빠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그 움직임이 꽤 의외였던지 그가 살짝 휘청하며 몸을 돌렸다.
“넌 비겁했어. 네 욕망이 먹어치운 게 뭔지 똑똑히 봐!”
이제야 제대로 홀가분해진 우연이 큰 보폭으로 거리를 가로질렀다. 생각지 못한 반격이었던지 금방이라도 달려와 머리채를 잡지 않을까 걱정했던 오빠는 쫓아오지 않았다. 우연은 괜히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우연은 사촌오빠에게 협박 비슷한 말을 운운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추행에 대한 공소시효는 오래전에 끝났다. 빚쟁이가 된 그에게 아직 사회적 명예란 게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요하다면 그의 주변에 오빠의 만행을 알릴 계획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우연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냥 그의 삶에 작은 불안의 씨를 심고 싶었다. 싹을 틔우고 줄기를 살찌게 하는 것은 오빠의 몫이다.
그의 삶에 당장 어떤 변화가 없던 것처럼 우연의 삶도 어제와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그날도 우연은 점심시간에 커피 한 잔을 뽑아 회사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옆에 선 직장 동료가 쉬지 않고 수다를 떨고 있었고, 우연은 그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업무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말 한 마디가 우연의 정신을 일깨웠다.
“저 잠깐만 이것 좀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우연의 고개가 돌아간 곳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는 옆의 동료에게 커피잔을 넘기고 쪼그려 앉아 구두끈을 묶고 있었는데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체형이었다. 분명 아는 사람 같은데, 누구인지는 바로 떠오르지 않는 옅은 익숙함이었다. 그리고 구두끈을 다 맨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우연은 자신에게 확 끼쳐오는 비냄새를 맡았다. 어둑한 실내, 높은 습도에 녹아 더 짙어진 먼지의 냄새도 섞여 있었다. 순간 등이 서늘해지고 미약한 온기가 등 한가운데서 피어났다.
다시 커피잔을 건네받은 그가 함께 있던 이와 한담을 나누며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우연은 뒤에서 들려오는 동료의 부름도 듣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우연은 이 걸음의 끝을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날카로움은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흐르는 빌딩숲 속의 거리에는 오늘도 ‘성범죄 없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플랭카드를 든 미투 1인 시위자가 서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