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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 돌아왔다

키워드 : 우연

by 은섬


설거지를 마친 혜윤의 손끝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오랜 시간 서 있던 탓에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뻣뻣하다. 그래도 설거지를 마쳤을 때의 개운함은 소란스러운 모든 것을 초기화되는 느낌이라 꽤 기분이 좋았다. 가끔은 신성하게 느껴졌고 가끔은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다른 손엔 스마트폰을 든 채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혜윤은 습관처럼 지인들의 카톡 프로필을 훑었다. 그곳에선 그동안 연락없이 지낸 지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고 친분이 얕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여지가 퀴즈 퍼즐처럼 존재했다. 적지 않은 그 프로필들을 둘러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들의 세상엔 즐거움만 가득했다. 물론 혜윤도 특별히 잘 나온 사진으로 프로필 사진을 정하고 자랑할만한 일을 일상인척 상태메세지에 적곤 하니 남들 눈엔 자신 또한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혜윤은 자신의 삶만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눅눅해졌다.

그날 남편의 폰을 본 건 100% 우연이었다. 남편인 종석과 혜윤은 서로의 스마트폰을 공유하지 않았다. 딱히 공유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서였는데, 비밀번호조차 설정해두지 않은 것은 그만큼 서로를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날 종석이 폰을 보다 말고 잠깐 자리를 비웠던 건, 혜윤이 커피를 타러 일어났는데 눈 닿은 곳에 종석의 카톡 화면이 열려 있던 건 사고 같은 거였다. 거기 그리운 이름 하나가 있었다. 반계현. 혜윤의 첫사랑이었다.

종석에게 왜 자신의 첫사랑 연락처가 있는지 혜윤은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았다. 흔치 않은 이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종석과 첫사랑의 접점을 떠올릴 수 없었다. 정말 종석의 폰에서 그 이름을 보게 될 꺼라곤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 없었다.

혜윤이 계현을 만난 건 20대 초반 호주에서였다. 골드 코스트 내에서도 서퍼들이 유독 많은 surfer’s paradise는 혜윤이 어학연수 중 답답한 마음을 내려놓던 몇 안되는 장소였다. 친구들은 호주에 왔으면 무조건 해야 할 일로 서핑을 꼽았다. 물론 그녀도 서핑을 배워보려 했지만 쉽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보드 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도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도 당황스러울 만큼 어려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만 커져서 몸이 더 뻣뻣해졌다. 같이 수업을 시작했던 다른 사람들이 제법 파도를 타는 모습을 볼 적마다 혜윤은 자신이 부끄럽고 위축돼서 실력은 계속 제 자리였다.

그렇게 몇 번 서핑 레슨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던 날들 중 하루, 혜윤은 서핑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처음 배워보자 용기를 냈던 것도 지금껏 배운 것도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게 뭐라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나 자괴감이 들어서였다. 레슨 받으러 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괴로울 수 없는 며칠이 쌓인 결과였다. 포기를 하자 놀랍도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후 혜윤은 서퍼들의 날렵한 움직임을 눈으로 즐겼다. 큰 파도가 밀려오면 아슬아슬하게 파도 위를 미끄러지는 서퍼들의 모습에 혜윤까지 가슴이 칼날 위에 선 듯 초조해졌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했다.

서퍼스 파라다이스에서 계현을 만났다. 이름이 특이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건 적당히 검게 그을린 구릿빛 피부 위로 번져가던 시원시원한 미소였다. 그 미소는 호주의 말간 햇살에 근심과 우울 같은 건 모두 다 증발한 것처럼 깨끗했다. 그는 서핑이 좋아서 몇 달째 골드코스트에 머물고 있다고 쑥스러운듯 뒷덜미를 쓸며 말했었다.

그와 골드코스트의 핫플레이스, Q Deck 바에서 칵테일을 마실 때 혜윤은 그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고 둘의 관계가 좀 더 발전할 것이란 짐작을 했었다. 햇빛을 받아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보여주었던 골드코스트의 바다는 밤이 되자 검푸른 색으로 일렁거렸다. 그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그 빛을 담은 계현의 눈빛이 은근해서 혜윤은 입술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칵테일이 몸의 온도를 높이고 자신의 등 뒤로 뻗은 그의 팔 하나로 몸이 은근히 긴장하며 묘하게 기분이 들떴다.

갑작스런 귀국만 아니었더라면 혜윤은 그와 더 깊은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오면 꼭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몇 달 열렬한 연락을 주고 받았지만 서로의 일상 속에서 상대의 존재는 조금씩 흐릿해졌다. 너무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어진지라 그것은 이별이 아니라 잠시 그들의 관계가 동결된 것 같았다. 가끔씩 좋은 감정만 남은 그 관계가 떠올라 혜윤은 끝 간 데 없이 마음이 설레였고, 호주의 바닷가를 떠올리면 오래 머문 곳이 아닌데도 향수병이 날 것 같았다.

남편 종석은 성실하고 가정적인 남자였다. 그의 첫인상은 혜윤의 마음에 전혀 차지 않았다. 그녀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맘에 안드는데 크지 않은 키와 통통한 몸매를 보자 혜윤은 주선자를 비난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주선자가 직장 상사라는 점 때문에, 남녀 간에 어떻게 한 번만 보고 이런 중대사를 결정하냐면서 3번만 만나보란 말이 제법 그럴싸하게 들려 그녀는 빚쟁이한테 빚 갚듯 3번의 만남을 이어갔다.

3번째 만남에서 그는 다시 받아보기 힘들 사이즈의 큰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곰돌이 인형의 손엔 커플링이 들어 있었다. 그동안 만날 적마다 조심스럽게 혜윤을 배려하는 모습도 뒤늦게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배려가 몸에 밴 그와 있으면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아찔할 상대와 결혼해봐야 부정맥만 심해질 꺼란 생각도 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아! 이런 남자가 결혼할 남자구나! 혜윤은 그때서야 어른들이 여자는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야 한다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의 직업이 안정적인 공사라는 점도 배우자의 좋은 조건 중 하나였었다. 그의 겉모습이 조금 더 매력적이었다면 분명 그가 자신의 차례까지 오지 않았으리란 것도 혜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런 마음으로 종석과의 결혼을 결심했다. 커플링 안에 자리잡은 다이아몬드가 해사하게 반짝였다.

이런 식으로 첫사랑과의 재회를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우연히 종석의 폰에서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하고 혜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는 사람이 좋아 친구들 연락도 잦은 편이었고 만남의 자리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12시를 넘기지 않고 너무 술에 취하지 않은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지인의 지인으로 계현과 인연이 닿았을 것이다.

이후 혜윤은 그의 친구들이 연락을 해 올 때마다 은근슬쩍 누구인지를 묻고 모르는 이름이 있으면 어떤 관계인지 티나지 않게 물어보았다. 어느 날 종석의 폰으로 첫사랑의 연락이 왔을 때 발생할지 모를 집요한 질문에 대한 면역을 형성하듯이.

드디어 종석이 첫사랑을 포함한 친구 둘과 약속을 잡았다. 혜윤은 은근슬쩍 이 친구는 누구냐면서 첫사랑의 프로필을 손가락 끝으로 콕 찔렀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서핑보드. 순간 골드코스트에 대한 그리움이 확 밀려왔다. 남편의 대답을 한 귀로 흘려들은 혜윤은 지금껏 써보지 않은 떼를 써보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자신도 나가면 안되겠냐고.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고.

약속장소인 호텔 레스토랑은 유명한 뷰 맛집이었고 뷰만큼 환상적인 음식 맛으로도 유명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종석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애처가로 유명했기에 좋은 곳에 아내를 데려간다고 해도 친구들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종석은 어차피 2차, 3차 갈 생각이 없다면서 식사 후 간만에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약속이 정해지고 혜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쇼파와 한 몸이 된 종석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그 바쁜 일 중 하나였다. 안그래도 처음 만날 적부터 통통했던 몸이 결혼 후 티가 나게 살이 올랐다. 그 점을 지적할 적마다 종석은 맘이 편해서 그렇다고 변명했지만, 첫사랑과 만날지도 모르는 장소에 너무 아저씨스러운 남편과 동행하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혜윤은 매일 종석의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함께 했고 식사때마다 종석의 밥 양도 티나지 않게 조금씩 줄여 나갔다.

혜윤은 준비할 게 더 많았다. 푸석해진 피부를 위해 마사지 예약을 잡고 집 안의 모든 옷을 뒤집어 엎은 후 백화점으로 옷 쇼핑을 가야했다. 간단한 시술이라도 받아볼까 했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넉넉하지 않아 포기 했다.

그런 와중에 혜윤은 뜬금없이 치받고 올라오는 발칙한 상상과 마주치게 되었다. 어둠에 잠긴 검은 바다 위에 한 점씩 떨어진 배의 조명은 밤하늘의 별처럼 보일 터였다. 그곳에서 의자 뒤로 손을 맞잡은 자신과 계현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꽉 조여 들어 혜윤은 혀를 빼물고 혼자 숨을 헐떡였다. 막장 드라마가 곧 제 삶에서 펼쳐질 것 같아 심장 여기저기가 찌릿했다.

야경을 한 면에 고스란히 담은 엘리베이터가 고층으로 올라감에 따라 그녀의 긴장도 조금씩 높아졌다. 혜윤이 입고 있던 블라우스가 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그래서 종석과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설 때 혜윤은 약간은 졸도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약자 명단을 확인하고 안쪽으로 들어서자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보였고 그 중 한 명이 종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있던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뒤늦게 고개를 들어 종석과 혜윤을 건너다 보았다.

“여보~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혜윤이 일어서자 종석이 그녀의 손을 살폿이 잡고 같이 나가줄까? 하는 눈빛을 건넸다. 그녀가 다시 그의 손을 꽉 쥐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번 끄덕였다. 돌아서는 그녀의 등 뒤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흥겨움이 가볍게 차올랐다. 레스토랑을 벗어나자 몸 안의 열기가 한 번에 쑥 빠져나갔다. 혜윤은 그동안 참고 있던 단전 아래의 숨을 여러 번에 걸쳐 천천히 내뱉었다.

몸매를 맵시있게 보이기 위해 조금 타이트하게 입은 옷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목구멍 아래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점이었다. 첫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종석의 친구, 반계현은 어이없게도 종석보다 더 배가 튀어나오고 앞머리까지 살짝 까진 동명이인이었다. 혜윤은 맥이 빠져 그의 친구들과 어떻게 인사를 나눴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특이한 이름이 동명이인일 줄이야!

저 멀리 파도가 해안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고 혜윤은 조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다음 달엔 카드값이 많이 나오겠구나 싶어 어떤 부분에서 절약을 해볼 수 있을까 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옷 아래로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하고 살짝 잡아당겼다. 그것은 아직 떼지도 않은 새옷의 택(tag)이었다. 택이 그대로이니 혹시 환불이 가능하지 않을까 헤아리며 혜윤은 천천히 종석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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