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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보리차 한 잔으로부터

인생 최고의 음식

by 은섬


은색 샤시로 만든 문은 조금만 힘 조절을 하지 못하면 고막을 긁는 소리를 고함처럼 내질렀다. 그럼에도 약국의 그 문은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어떤 진입구 같았다. 쾌적한 실내, 반듯하게 정리된 수많은 약들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연세 지긋한 약사선생님. 차분한 분위기만으로 실내의 공기가 몇 도쯤은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문 밖에 자리잡은 가벼운 소란스러움, 현실의 추레함을 단박에 잊게 하기도 했다.


그곳에 보리차가 있었다! 어른 몸통만한 은색 물통에 가득 담긴 것이 바로 시원한 보리차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약수를 수돗물 대신 마시던 내게 보리차는 대단한 문명의 이기였다. 땡볕 더위로 얼굴이 발간 아이를 그냥 지나치기 힘드셨던 약사선생님은 언제든 들어와서 보리차를 마셔도 된다고 허락해주셨다. 그럼에도 나는 불쑥불쑥 약국의 문을 열지 못했고, 아껴 두었다 보리차 한 잔을 아주 천천히 마시곤 했다. 그 한 잔에 그해 여름의 더위가 모두 사라질 것 같았다. 그때 내 머릿속엔 밖의 엄마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채소행상이었다. 점포나 제대로 된 좌판도 없이 되는대로 아무데나 채소를 부리고 손님을 맞았다. 당시 구청에선 그런 행상들을 엄하게 금지시켰기에 수시로 단속관들이 떴고 엄마는 도망다니라 행동이 더 날래졌다. 몇 번씩 꼼짝없이 단속관에게 잡혀 채소를 다 빼앗기고 일장 연설을 듣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확한 채소를 농협에 보내봤자 수입이 너무 적어 자식 많이 딸린 집안엔 가난만 더 고였기 때문에. 단속을 피하고, 자릿세를 요구하는 치들, 주변의 텃세를 이겨내고 엄마는 작은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그곳이 바로 동명약국 앞이었다. 맘좋은 약사선생님이 엄마의 처지를 안쓰럽게 생각했기에 가능한 인정이었음을 우리 모두 알았다. 보도블럭 위에 비닐봉지나 보따리를 한데 뭉쳐 깔고 앉아 있노라면 뒤로는 하수구 냄새가 올라왔고 앞으론 지나가는 사람들 발만 보였다. 여름에 엄마는 오이과 가지를 많이 팔았고, 옥수수를 쪄서 대박을 쳤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한 버스 기사의 표정을 모른척 하고 아빠아 엄마는 정신없이 보따리를 버스에 실었다. 대전 중앙시장에 도착할 때까지의 1시간의 시간은 제법 평화로웠다.


방학이 되면 나는 그런 엄마를 곧잘 따라 다녔다. 버스에 내려 엄마가 지게꾼, 나중엔 리어거꾼을 부르러 갈 때 채소를 내가 지켜야 했는데, 그땐 그게 참 무서웠다. 엄마가 오지 않을까봐. 그래도 엄마를 따라 다니며 먹는 음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엄마와의 동행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눈높이가 엄마와 날 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럽단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란 생각은 큰 위로가 됐다.



언제 어디서든 삶은 쉽지 않다. 엄마가 가져간 채소를 그날 모두 팔았다면 나름의 해피엔딩이었을 테지만 그런 요행은 자주 벌어지지 않았다. 해가 저물녁이 되면 엄마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사거리에 내 자리 하나를 마련해줬다. 한 무더미에 채소도 듬뿍 얹었다. 그곳에 앉아 나는 오이를 팔고 가지를 팔았다. 아마도 어린 아이가 시장 바닥에서 채소를 팔고 있어서 그런지 제법 잘 팔렸다. 내가 타인을 상대로 번 첫 수입이었다. 팔 적마다 신이 나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진정시켰다.


그래도 남는 채소가 많았다. 내가 없을 때 엄마는 보통 막차를 타고 왔는데, 남은 채소를 다시 짊어지고 집으로 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저녁도 먹지 못한 빈 뱃속, 다가오는 마지막 버스 시간, 남은 채소의 더미. 그때 엄마에게 온정의 손길을 건넨 사람 역시 약사선생님이셨다. 약국 한켠에 남은 채소를 기꺼이 보관해주시기로 했던 것이다. 그 채소는 다음날 팔렸지만, 새로 가져간 채소가 다시 남는 적이 많아 아마도 밤마다 약국 한켠에선 엄마의 채소가 잠들었을 것이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그 밤. 아마 엄마는 피곤함에 주책맞을 정도로 꾸벅꾸벅 졸았을 테지만, 내 상상속의 그 밤은 끝나지 않을 새까만 어둠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게 너무 까마득하게 느껴져 나는 한 밤의 버스정류장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엄마를 기다렸다.



동명약국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약사 선생님도 아마 운명을 달리하지 않으셨을까? 엄마의 채소행상으로 확실히 집안 살림은 나아졌다. 엄마는 지난 날들을 떠올리면 어떻게 지나왔는지 마치 꿈결 같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그 시절은 우리 모두에게 밤의 터널 속이었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 베풀어졌던 약사선생님의 호의 내지는 다정함은 우리보다 나은 입장에 처해있던 사람의 그것이라서 더 인상적이었다. 그 호의가 엄마를 넘어 내게까지 번지는 달콤함이었음을 그분은 아셨을까?


사람은 자신이 먹고 자란 것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엄마의 밥을 먹었고, 자식들 입에 들어갈 밥 한 숟가락 밖에 생각못하던 부모님의 생활력을 먹고 자랐다. 거기에 가끔 가뭄의 단비 같았던 타인의 호의도 먹었다. 덕분에 부모님의 삶보다 조금 나은 삶을 살고 있는 지금, 타인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내 마음의 시작으로 나는 동명약국의 보리차를 떠올린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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