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전 딱 한 번 엄마와 단둘이 나들이를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내장산 단풍놀이였는데 그때를 추억할 때 먼저 떠오르는 건 단풍이 아니었다. 단풍의 화려함은 우리 나들이의 조연 정도? 엄마가 챙겨온 배를 깍아 먹었던 것, 늦은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은 것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썩썩 깍은 배의 과육이 입 안의 모든 미뢰를 적시는 시원함, 산채비빔밥의 가격이 터무니없음을 억울해했던 엄마의 투덜거림. 그런 것들이 떠오르면 자연스레 마음이 흐물해진다.
사실 이 단풍놀이의 타이밍은 적절치 않았다. 평소 아픈 일이 잦던 아버지는 그때 편찮으셔서 곡기도 제대로 때우지 못한 채 누워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언제부터 아팠는지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꽤 오래 전부터의 일인 것 같다. 어떤 병명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냥 못먹고 고생만 많이 한 게 병이 되었다. 자주 시름시름 아팠고 또 언제 아팠나 싶게 엄청난 일을 해치우다 또 드러눕곤 하셨던 기억이 나의 유년시절에 많이 존재한다.
집 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어찌할 바 없이 집 안엔 우울, 옅은 짜증, 자포자기 같은 마음들이 스며든다. 그것은 언제나 발목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는 감정이라서 우리는 수없이 그 감정에 휘둘리곤 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런 일상의 무거움은 잊고 싶은 날이었다. 애써 무시했다고 해야 하려나? 사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엄마와 단둘이 여행을 갈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조금은 서운할 아빠의 마음도 아픈 몸에 가로막혀 버렸으니까.
내 엄마는 아픈 형제나 자매가 있는 사람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주요했겠지만 엄마가 자녀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조건 없는 애정과 관심은 아픈 아빠로 인해 쉽게 좌절되었다. 본래 타고나길 무던한 건지 아니면 이런 환경 속에서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건지 몰랐지만 아무튼 엄마는 덤덤한 사람이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안위에 마음 졸일 때 엄마는 당신도 처음인 엄마로서의 자리, 아내로서의 자리에서 혼자 무럭무럭 자라났다.
과거 어느 때 먼 곳에 사는 오빠네 일로 엄마가 잠깐 집을 비운 적이 있었다. 우리 가족에겐 아주 드문 엄마의 부재였다. 내가 아빠를 책임져야 하는 그 상황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을 정도로 기껍지 않았다. 아빠의 아픈 밤은 하루하루가 고난과 공포 그 자체였다. 아버지의 아픈 팔, 다리를 주무르느라 손가락 지문이 다 없어질 것 같았고 혹시라도 이럴 때 아빠가 잘못될까봐 무서워 마음을 졸였다. 엄마가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 시간이 어찌나 까마득하던지... 나에겐 고작 1주일의 악몽이었지만 엄마에겐 일상인 시간이었다. 엄마는 이런 시간을 살고 있었구나! 처음으로 엄마의 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에겐 당신의 삶이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의 삶은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었다.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벌려나갔던 거리감은 처음엔 미세했지만 이젠 그 거리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의 우리 자매는 혹시라도 엄마보다 아빠가 오래 사실까봐 마음이 조금 초조하다. 나이를 먹어 성질이 많이 죽었다고는 하나 별난 아버지를 누구도 감당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뻔뻔하게도 우리는 그런 아빠를 도맡아 주고 있는 엄마의 수고로움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그 두려운 밤과 엄마와 단풍을 보고온 가을 위로 10년이 넘는 시간이 쌓였다. 이제 엄마는 어디가 아파 병원을 가도 ‘나이 들어서 그렇다, 너무 많이 써서 그렇다’ 라는 뻔한 말을 듣는다. 눈에 띄게 발전한 의술이 이렇게 무책임하고 무용지물임을 깨닫자 발목을 적신 우울이 크게 번진다. 살면서 어쩔 수 없는 것은 자꾸만 많아지고 나는 여전히 그 과정의 한 가운데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엄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났던 그때가 엄마의 가을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조금 늦은 가을이었겠지. 봄날 엄마의 종종거림을, 여름날 뜨겁게 달궈졌던 엄마의 정오를 먹으며 나는 자랐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와 보낸 그 가을을 추억하는 것뿐. 이미 엄마는 겨울을 맞이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