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는 아직 배출 카드로 음식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음식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면 잠시나마 이웃들의 주방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집은 파스타를 너무 많이 했나 보다. 암~ 파스타면 양 맞추기가 어렵지.
어이쿠~ 이 집은 시골에서 음식을 많이 보내오셨나 보네, 부모님이 알면 속상하시겠다.
요즘은 오렌지가 제철인가? 오렌지 껍질이 많네.
언제부턴가 내겐 음식 쓰레기통을 여는 일은 번거롭고 더러운 일이 아니라 흥미로운 탐색의 시간이었다.
이런 나의 한가로운 감상을 깨는 침입자도 있다. 음식쓰레기를 담아왔던 비닐을 버리는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음에도 봉지째(그것도 묶어서) 버리는 사람이 있다. 그걸 처음 발견했던 몇 번은 화가 머리꼭지까지 올라서 머리통이 새빨개지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더럽다고 생각했겠지. 자기가 먹은 음식이 뭐가 더럽지?
더럽다고 쳐도 자기도 더러운 걸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너무 양심 없지 않나?
비닐봉지를 먹고 숨을 못 쉴 동물이, 엄청난 쓰레기 더미에서 봉지를 빼내는 어떤 노동자의 수고스러움이 떠올랐다. 지금에야 비닐을 발견하면 그냥 내가 건져서 버리지만, 이기적인 그 사람의 상판이 궁금해서 짧은 잠복을 선 적도 있다.
나 어릴 적 시골에선 ‘음식쓰레기’란 말 자체가 없었다. 뒤꼍에 키우는 개는 된장국에 말은 밥을 먹고 자랐고 채소를 손질하다 나온 부산물은 특식이었을 것이다.
나에겐 무용담 같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자식이 많은 가난한 집안에서 걱정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건 내 부모가 기른 쌀과 푸성귀 정도였다. 공판장에선 상품 가치가 부족한 과일들을 아낌없이 버렸고 나의 부모님은 그걸로 우리의 간식을 충당하셨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고 가장 놀란 건 장금이의 성공 신화도, 음식에 담긴 누군가의 정성도 아닌 상한 과일을 먹어도 식중독에 걸릴 수 있단 사실이었다. 웬만한 과일은 모두 먹어 치웠던 내겐 충격적이었던 일이었다.
이제는 음식쓰레기도 돈을 주고 버려야 하는 시대다. 그 자체가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행위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배출요령이 따로 있을 만큼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매우 까다롭다. 그 번거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고가의 음식물처리기를 척척 산다. 그 말은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행위가 적어도 음식물처리기만큼의 가치가 있는 노동이란 의미다. 거기에 더해 이 노동이 남편의 다정함 척도로서의 가능성도 본다.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다정한 남편은 아내의 다른 일을 대신했을 것이다. 이렇듯 세상의 변화와 더불어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노동의 영역으로 입성했다.
사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음식쓰레기를 봉지째 버린 아주머니에게 해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녀와 다시 만난다면 보이지 않던 노동이 이제 보이기 시작했다고 그녀의 귀에 은밀히 속닥여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