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공짜로 삐삐를 나눠주며 쓰기만 해주십사 읍소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생 새내기였던 나는 그 읍소의 알바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한밤중 서울역을 출발한 기차는 새벽 구례역에 도착했다. 지리산이 유명하니 맛이나 보자며 너털너털 노고단에 올랐고, 거기서 아주머니가 나눠주시는 라면으로 한 끼를 때웠다. 출발지였던 화엄사로 돌아오니 어느덧 하루해가 서쪽 산등성이에 걸려 있었다.
사실 노고단에 오르기 전 나에게는 선약이 생겼다. 어린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는 게 별스러웠던지 스님 한 분이 말을 거셨고 그분은 내게 절에서의 하룻밤을 약속해주셨다. 덕분에 난 스님의 사촌 동생 자격으로 계곡의 물소리를 이불 삼아 잠들고, 새벽의 예불로 하루를 시작했다. 대단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 선배가 살던 광주에 들러 전라도식 콩국수를 얻어먹고 춘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다시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향했을 때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정동진은 가장 유명한 관광지였기에 나는 거기서 당연히 밤을 새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철모르는 소리였다.
정동진 역사의 직원들이 늦은 밤 사람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떠밀리듯 역을 나서자 함께 나선 사람들이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졌고 나만 망연자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젊은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텐트를 쳤으니 자고 가라고 붙드는 것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민박하는 할머니셨다. 저런 데 따라가면 큰일 난다면서 그녀는 내게 1만 원에 방 하나를 내어주셨다. 어차피 남아도는 방을 만원이라고 팔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도움은 적절한 타이밍으로 나에게 주어졌다.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같은 경험이 있으면 떠들 맛이 난다. 그날은 묘하게도 자신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여자, 그것도 나보다 나이 많은 여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 일들이 공통점이었다.
살면서 내가 받았던 도움이 물론 모두 여자의 손에서 나온 건 아니었다. 화엄사의 스님이 그랬고, 꼬꼬마 시절 등교하던 나를 자신의 판초 아래로 이끌어 추위를 피하게 해준 군인 아저씨가 그랬다.
이런 도움을 떠올리면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삶을 버틴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아스트로'의 멤버 문빈이 자살을 했다. 뉴스가 처음 봤을 때는 그가 자살했을 때에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평소 너무 밝았고 또 열심히 했던 친구라서 소식은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었다. 처음으로 시간을 몇 시간만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서울로 올라가 그의 집 대문을 뻥뻥 차는 소란을 벌여서라도 그의 죽음을 막았을 것이다.
스무 살의 여행이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광주에서 춘천으로 가는 야간 버스에서 추행을 당했다.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은밀한 손길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한동안 자는 척을 했다. 하차 후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파출소로 끌고 가고 싶었지만, 최소한 사과라도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화드득 발뺌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터미널에 혼자 남겨진 나는 울면서 춘천역까지 걸어갔다.
그럼에도 그 여행이 끔찍한 경험으로 남지 않은 것은 내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 덕분이었다. 그 상쇄의 경험 덕분에 그 여행이 내게 인간에 대한 실망과 환멸로 기억되지 않았다. 내가 살아온 것은 타인에게 많은 것을 빚진 것인데도 나는 자꾸 그 사실을 잊어버린다. 타인에겐 언제든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도 정작 타인에겐 도와달라고 손 내민 기억은 없는 이율배반도 다반사다.
앞으로 타인을 돕겠다는 다짐보다 나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이 더 마음에 든다. 더 잘 돕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도움으로 누군가 삶을 좀 더 버티고 싶어지게 만들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