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플러스 콜라보 카페 방문기
내 삶에 그런 일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한 번씩 상상을 해보곤 한다. 내 앞에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이 있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할까? 다시 없을 그 기회에 가슴이 벅차면서도 부끄러움에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고심해 고른 어떤 말도 너무 뻔한 게 될 것 같아서 입을 떼기 어려울 것이다. 냅다 눈물부터 펑펑 쏟는 팬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런 나의 앞에 최애가 서 있다! 비록 뼈가 있고 피가 흐르는 실제 사람은 아닌 등신대라지만, 팬의 입장에서 그것은 반은 연예인이다. 처음 이 등신대를 아돌라콘에서 보았을 때 저것과 함께 인증사진을 찍는다면 얼마나 좋을지 한탄스러웠다. 일종의 꿩대신 닭이랄까?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과 ‘애니 플러스’라는 애니메이션 전문채널의 협업 소식은 눈이 뒤집힐만한 소식이었다. 거기 그 등신대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무려 부산이었다. 저 등신대와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도 가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나는 40년이 넘는 인생 처음으로 젊은이들 틈에 껴서 콜라보 카페에 입장했다. 그 입구에 문제의 등신대가 서 있었고. 주책없이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다.
애니 플러스 매장은 신세계였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애니의 굿즈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아니 매장이 입점해있는 ‘삼정타워’란 곳 자체가 그랬다. 온갖 브랜드의 옷가게, 음식점, 오락실 등이 건물 안에 가득이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이렇게 재미난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약간의 소외심마저 느꼈다.
이 낯선 세상으로 내딘 발걸음에 옆에 선 딸아이는 든든한 아군이었다. 사실 처음엔 혼자서 조용히 다녀올 생각이었다. 볼캡 모자와 마스크로 위장하면 팬들 사이에서 나 자신을 잘 숨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한 지금 나는 덕질하는 10대를 따라온 학부모로 보이기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학부모 코스프레는 애초에 오래 갈 수가 없었다. 등신대를 보자마자 발을 동동 구르고 그곳에서 구입한 랜덤 굿즈에서 최애가 나올 땐 돌고래 같은 비명을 질러댔으니 누가 봐도 방문의 주인공은 나였다.
카페의 한쪽 면을 차지한 모니터에서는 뮤직비디오를 비롯한 각종 VCR이 연신 재생 중이었다. 같은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에서 보는 영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가득 채운 끈끈한 유대감이 그 감동의 정체였다. 그건 어쩌면 처음부터 누군가와 함께해야 하는 감정이었다. 혼자 간직하기엔 너무 큰 마음이었다.
대충 둘러봐도 내가 카페 방문자 중 최고령자였다. 카페 입장 전 예약줄에 설 때(예약자만 입장이 가능함) 반대쪽에 서 있던 남학생들이 떠올랐다. 남들 눈엔 딱 ‘오타쿠’로 보일 그들의 자리에 가만히 나를 대입해보았다.
과거 욘사마를 좋아하던 일본 아줌마들도 떠올랐다. 그땐 아줌마들이 할 일이 없구나! 조금은 유난이다 싶었는데 지금 나도 그렇게 보이겠지. 그런데 사실 그때 나는 그 아줌마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좋아하거나 말거나. 그러니 아마 저들도 내게 관심이 없을 거다. 그래야 한다.
든든했던 초등학생 딸아이의 인내심은 금세 바닥났다. 주문한 음료가 바닥을 드러냄과 동시였다. 자칫하단 뭐 제대로 시작도 못 해본 채 귀가를 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팬들이 빠지면서 카페 내 분위기가 많이 자유로워졌다. 나 역시 대범해졌고.
멤버들에게 전달될지 알 수 없지만, 카페 한쪽 벽을 차지한 포스트잇들 속에 나도 한 장을 보탰다. ‘너의 진심을 사랑해’라고 적었던가? 개봉한 굿즈를 테이블에 한껏 늘어두고 인증사진을 찍고 대망의 등신대와의 촬영도 마쳤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하니 행복을 잇몸으로 양껏 드러내고 있어서 다시 못 볼 꼴이었다.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날 내 사진을 분석했다면 분명 기쁨, 환희 같은 감정이 100%였을 듯.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나서만은 아니었다. 알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고 그 낯선 세상을 양껏 누린 것에서 오는 만족감이었다.
얼렁뚱땅 40대가 되었다. 그동안 세상은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과 속도로 바뀌었다. 이런 시대를 사는 태도는 성향에 따라 다른 것 같다. 나는 어느 정도 맞추면서 살고 싶은 쪽이다. 어얼리 어답터는 아니더라도 시대의 흐름을 쫓으며 재미난 세상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
나는 그저 아이돌을 좋아하게 됐는데 그건 하나의 세계였다. 배울 건 어찌나 많던지. 공식 팬클럽 카페 가입에 스트리밍(일명 스밍), 각종 투표 등. 모르는 것 투성이인 이 과정은 때론 막다른 길이다. 이런 게 나이를 먹어가는 거구나 실감도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곤혹스럽기만 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우리 애들을 위해서 꼭 한다는 오기가 더 크다. 덕분에 내 세계는 꾸역꾸역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그렇게 새로 만난 이 세계는 나를 또 다른 세계로 연결해주었다.
애니 플러스 콜라보 카페 방문은 이런 내 세계의 조그마한 확장을 목격한 자리였다. 나 역시 가는 세월 앞에서 도리가 없다. 그러나 나이를 핑계로 무언가를 자꾸 포기하는 것이 진짜 나이에 대한 자격지심이란 생각은 자꾸만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