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V라는 이름의 50년도 넘게 함께한 가까운 친구가 있다.
V는 내가 얼핏 잊어버린 일을 슬쩍 해놓기도 하지만, 내 물건을 나 모르게 슬쩍 어디에 치워 놓아서 찾느라고 골탕을 먹이기도 한다.
V는 바로 나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그가 하는 일들을 알고 있지만, 늘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는다.
그게 그의 존재의 이유니까.
V는 내 ‘무의식 자아’라기보다는 autopilot mode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오랜 습관이 빚어낸 자동기능 모드.
그는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어도 ‘자동으로‘ 순서대로 스트레칭을 하게 하고,
기억도 안 나는데 어느새 커피를 디카페인 2, 카페인 1 비율로 거름종이에 부어놓고는 물을 채운 포트 스위치를 켜둔다. ’나‘는 종종 물 끓는 소리가 나고 나서 V가 그걸 다 했다는 걸 그제야 알기 일쑤다.
신랑 머리를 잘라주고, 머리카락을 정리해 버리고 나서, ’정신차리고’ 이제 가위와 바리깡을 치우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금방 있던 게 없어서 한참 찾다가 보면 이미 제자리에 다 넣어놓은 것도 바로 V의 소행이다.
어느 모드가 더 ‘정신‘이 없는지는 별들에게 물어볼 일이지만.
나이 들수록 ’루틴‘과 습관이 더 늘어난다고 한다.
에코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편이라 워낙 젊었을 때부터도 ‘루틴‘이 많아서, ‘늘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것’ 하나라도 빠지면 패닉도 잘 하지만 (운동은 꼭 언제 가야 하고, 저녁 이맘 때면 섬유소 가루를 타 마셔야 하고, 등등, ) , 나는 일부러 살면서 ‘없으면 안 되는 것’ ‘안 하면 안 되는 것‘없이 살려고 늘 노력을 했는데도, 요즘은 뭔가 잔잔한 물 흐르듯 사는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당황을 잘하니, 이게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어느새 다 ‘습관‘으로 젖어든 것이지 싶다.
매일 똑같은 것을 해도 즐겁게 스스로 선택해서 하는 거면 문제가 없지만, 그걸 못하면 화를 내거나 크게 당황하면 그건 문제다.
루틴은 사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매일 반복하는 일에 늘 의사결정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 없는 것도 있고,
삶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Coming of Age’에서 시몬 드 보브와르가 말하듯,
미래가 점점 짧아지는 인생 후반기의 단조로운 삶에서 반복되는 일상은,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그리고 다시 내일의 나와 연결하여, 한결같은 ‘자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밤마다 나는 V하고 토닥거리며 잔다.
나는 분명 눈안대를 하고 하고 잠이 드는데 그게 답답한지 V는 자꾸 벗어 던진다. 만지면 안되는 딱지를 자꾸 만지작 거리는 것도 V지만, 자다가 문득 썰렁해서 전기담요 스위치를 켰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면 V가 알아서 꺼놓았기도 잘 한다.
V는 나의 무의식이므로 물론 나를 위해서(?) 그러는 거겠지만, 오늘은 마음먹고 다른 길로 걸으려고 생각했는데, 오디오 북을 골몰해서 듣다가 ‘정신차리고 보니‘ 늘 걷던 길로 걷고 있는 걸 발견하는 식으로, 내가 마음 먹은 나를 거스르기도(?) 하니 어떨 때는 내가 내 마음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응?)
우리 모두는 그렇게 우리 안에 김유신의 말 한마리 쯤을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안의 말과 사이 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나이를 잘 먹는 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