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는 떠나야 했다. 열두 시간의 긴 비행을 하고 나면, 아마 답답한 공기를 수도 없이 들이마신 끝에 착륙할 것이다. 엄마를 찾기 전, 그가 머물던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니면 엄마를 잃은 후, 떠나 있어야 했던 그곳으로 다시 갈 것이다. 어쩌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전혀 다른 곳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가 떠나던 날, 집 앞에서 그는 나에게 흰 봉투 하나를 건넸다.
“나 대신, 보내주세요. “
“어디로요? “
그는 대답 대신 가만히 웃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나는 경수를 배웅했다. 그가 버스에 오르고, 멀어지는 차창 속의 얼굴이 흐릿해지다가 풍경 속으로 섞여 들어갔을 때 나는 몸을 돌려 섰다. 집으로 돌아와 빈집의 불을 켰다. 현관에 서서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신발을 벗었다. 삼십 분 전까지 그에게 쓰이던 물건들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마치 아무도 손대지 않았던 것처럼. 책상 위에는 약봉지와 펜을 꽂아둔 약병이 있었다. 그 옆에, 익숙한 정갈한 글씨체의 쪽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잘 지내, 진희.
너 기억하고,
나는 웃었다. 마치 그날의 경수처럼. 희미하게 시작된 웃음은 점점 집 안을 채우며 커졌다. 그 소리는 열려 있던 거실 창문 밖으로 새어나가, 찬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가 떠난 지 한 달이 지났다. 나는 다시 회사 일에 복귀했다. 재택근무로 보내던 일주일 중 이틀은 사무실에 나가게 되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약을 처방받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있었다.
대중교통은 여전히 힘들었다. 나는 출퇴근 시간마다 자주 내려서 걷곤 했는데, 어깨를 스치는 행인들의 기척 사이에서 종종 나를 닮았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끝나지 않았던 그의 문장처럼, 그를 향한 기억 뒤에는 여전히 마침표 찍지 못한 것들이 남았다. 라벤더 향이 밴 소파, 카모마일 티가 남은 머그잔, 그가 앉았던 의자와 조리도구들. 내 집을 채우고 있던 물건들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더는 빈집의 불을 켤 때 나는 ‘딱’ 소리가 무섭지 않았다. 나는 밥을 먹고, TV를 보고, 산책을 했다.
냉장고 자석 위에 붙은 경수가 남긴 쪽지를 바라보다가, ‘기억하고,’ 나는 문득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책상 서랍 구석에서 구겨진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나는 그의 부탁대로 우체국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창구 앞에 서 있었고 몇 번이나 창구 직원과 눈이 마주친 뒤에야 한 발짝 다가섰다.
“어디로 보내실 거죠? “
가방 속에서 검은 펜을 꺼내 들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꾹꾹 눌러쓴 글씨로 겉면의 주소란을 채웠다.
받는 사람
To. Ryan
If you ever come back.
경수에게
“미국으로 보내주세요.”
묵직한 편지는 미국행 우편함으로 떨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버스를 다시 탔지만, 식은땀을 닦고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어느새 얼었던 땅은 녹아 검은흙 사이로 푸릇한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멈춰 선 자리에서, 가방 속 전화기를 꺼내려다 딸려 나온 약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다시 밀어 넣었다. 전화기를 열어 낯선 숫자들을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 울렸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지 않았다. 다시 들이쉬는 숨은 심장이 아닌 폐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깊은 심호흡을 시작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