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은 깊은 잠에 빠져 꿈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떴을 때 집 안은 적막했다. 거실로 나오니 경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책상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캐리어를 바라보다 소파에 몸을 묻었다. 걷힌 커튼 사이로 눈이 녹기 시작한 거리가 보였다. 삼십 분쯤 지났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일었고, 나는 공기의 진동에 가까운 울림에 멈칫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경수의 뺨은 열기가 피어오른 듯 붉게 물들어 있었다.
"추웠어요? “
"괜찮아요. 걷는 거 좋아요. “
오후가 되어 함께 산책을 나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보폭을 맞춰 천천히 걸었다. 경수는 가끔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그가 멈춰 서면 나도 멈춰야 했다. 우리가 머문 자리에는 행인들의 흩어지는 숨결과 차들의 아득한 경적, 하얀 눈의 냄새, 발밑에서 뽀드득 부서지는 얼어붙은 눈의 감촉이 고여 있었다. 정적은 그 모든 소란 사이사이에 존재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경수를 거들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시든 잎을 헹궈냈다. 한때 흙을 품었을 투박한 채소들이 칼끝 아래에서 단단한 심지를 드러냈다. 상처 난 단면 위로 온기가 스며들면 그것들은 비로소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우리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과해 하나의 접시 위에 나란히 놓였다.
“어디서 배웠어요, 요리?”
경수는 잠시 손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와 함께 있던 지난 이틀 동안 약봉지는 줄지 않았다. 몇 번의 과호흡이 있을 때마다, 그는 내게 손을 뻗었다. 괜찮은 걸까. 괜찮아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중얼거리며 물컵에 물을 따랐다. 물속에서 작은 기포들이 천천히 터졌다.
다음 날, 산책에서 돌아온 경수는 내 책상에 앉았다.
배낭을 열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 안에서 본, 줄이 그어진 편지지가 나왔다.
“편지, 다시 쓰려고요? “
“다 못 썼어… 도와줘, 지니. “
“그럼 연습을 먼저 하고, 편지지에 옮겨 적어 완성하면 될 거예요. “
책상 서랍에서 연습장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검은 펜을 들어 몇 가지 영어 문장을 적어 내려갔다. 잠시 망설이더니 노트를 나에게 내밀었다. 영어로 쓰인 노트에 담긴 문장들을 나는 곧바로 한국어로 옮겨 적어 알려주었다. 경수는 새 페이지를 펼쳐 방금 배운 문장들을 몇 번이고 써가며 연습했다.
그를 그대로 두고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카모마일 티를 찬장에서 꺼냈다. 티백을 컵에 넣고 끓는 물을 부으니, 희미했던 허브 향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따뜻한 차가 담긴 두 잔의 머그잔을 들고 경수가 있는 책상으로 돌아왔다.
“잘하고 있어요?”
내가 묻자 그는 펜을 내려놓으며 노트를 가리켰다.
“이것 봐요.”
하얀 연습장 위, 수많은 단어 사이에서 유독 굵은 펜글씨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보고 싶었어, 사랑해.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카모마일 티의 뜨거운 수증기가 눈동자에 닿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스쳐 지나가는 엄마의 얼굴이 창밖에 비쳤다. 엄마는 웃고 있었다. 나는 창문에 비친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눈앞을 가리던 수증기가 카모마일 티와 함께 천천히 가라앉았다.
몇 분이 흘렀을까. 다시 경수에게 눈을 돌려 그가 쓴 문장들을 훑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적어준 ‘기억할게’ 옆에 ‘기억하고’라는 글자들이 수없이 반복되어 있었다.
“경수, 이건 틀렸어요. ‘기억하고’가 아니라 ‘기억할게.‘라고 써야 해요. 이건 ‘ㅔ’, 이건 ‘ㅗ’라고 읽는 거고…”
자음과 모음을 적어 보여주며 설명했지만, 경수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펜을 세게 눌러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페이지 위에는 전과 똑같은 글자, ‘기억하고’만이 무수히 남았다.
내 설명이 어려웠던 걸까. 나는 잠시의 침묵 뒤에 다시 말을 꺼냈다.
“‘기억하다’에서 나온 거지만, ‘기억할게.‘라고 써야 문장이 끝나요. “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그는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를 썼다. 마침표 대신 쉼표를 붙이며, 기어코 기억의 끝을 거부했다.
한참 동안 연습하던 그는 줄이 그어진 편지지를 꺼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숨을 들이마셨다. 검은 펜을 쥔 손끝이 편지지에 닿았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하얀 종이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경수의 옆모습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일그러져 있었다. 수많은 글자들이 문장을 완성하고, 그는 막바지에 다다르자 펜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쫙 펴고 오므리며 손목의 긴장을 풀었다.
다시 펜을 잡은 경수는 마지막 한 줄을 끝냈다.
엄마, 나는 엄마가 보고 싶었어.
나는 엄마를 찾았어.
찾지 못했지만 괜찮아.
나는 찾았으니까 이젠 다 기억하고,
그는 편지지를 네 번 접어 봉투에 넣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경수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것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가를 쓸어냈다.
“길을 잃었니?”
조용히 묻는 내 목소리에 경수는 입을 다문 채 나를 응시했다. 다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그의 입꼬리가 약하게 떨렸다.
“보이지 않는 건, 사라진 걸까.”
그는 작게 흐느끼며 웃었다.
“왜… 왜 웃기만 해?”
가느다랗게 떨리던 내 목소리가 정적을 뚫고 흩어졌다. 하나, 둘. 내 눈에서도 뜨거운 액체가 낙하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어! 돌아갈 자리는 처음부터 지워버렸단 말이야!”
비명처럼 터져 나온 목소리가 빈 공간을 휘저었고, 나는 무너져 내렸다. 경수는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나란히 놓인 내 발등에 닿아, 서서히 젖어들었다. 그와 나 사이, 소리 없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끝없이 내리던 비가 잦아들었을 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창밖의 빛은 여전히 무심했고, 눈부신 파편이 되어 쏟아져 내렸다. 서로를 끌어안았을 때, 뒤섞인 눈물은 하나의 상처 위로 투명하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