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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셰익스피어 책방

by 아타마리에

2022년 5월 (by 수영)


비는 며칠째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남색 우산에서 빗방울을 털어내며 책방 문을 열었을 때, 익숙한 에스프레소 향이 진하게 퍼져 나왔다.

우진이 없는 책방은 유난히 고요했다. 불을 켜고 카운터 앞으로 가 가방을 내려놓았다.

커피머신에 손을 올렸을 때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오늘도 손님들이 많았을까.’ 파란 텀블러에 커피를 내리려는 순간, 카운터 위의 노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수영아, 냉장고에 케이크 사놨어. -우진


작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냉장고를 열자 작은 케이크 상자가 한쪽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크를 꺼내려다 말고, 다시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오늘은 첫 독서모임을 하는 날이었다.

테이블에 앉아 오늘의 책을 꺼냈다. <오셀로>. 표지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다시 들춰보게 되는 작가였다. 익숙한 대사를 반복해 읽으며 곱씹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번에도 그랬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건 어제 새벽 세 시쯤이었을 것이다.

누가 이 문을 열고 들어올까. 어떤 사람들이 이 작은 공간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조금은 긴장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혹시… 여기가 독서모임 맞나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두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둘 다 마스크를 벗으며 다가왔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인상의 두 사람. 첫인상부터 대조적이었다.

유난히 흰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해 서구적인 느낌이 드는 한 사람과, 눈빛을 읽을 수 없이 시선을 떨군 다른 사람. 반쯤 빗물에 젖은 그의 운동화에 시선이 머물렀다.

"맞아요. 저는 이수영입니다. 모임을 진행하고 있어요."

"저는 현승이고요, 이쪽은 재일입니다."

"책방 밖에 북클럽 모임 포스터를 보고 왔어요. 고전만 다룬다고 해서요."

현승의 목소리는 호기심이 가득 찬 듯 살짝 격양되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앉으세요. 커피나 차는 뒤쪽에서 직접 내리시면 돼요."

잠시 후 다른 모임원 세 명도 도착했다. 재일과 현승은 내 맞은편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현승은 주변을 흥미롭게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피고 있었고, 재일은 커피를 담은 머그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책 표지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주 책은 <오셀로>였어요. 다들 읽어보셨나요?"

현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오셀로 처음 읽어봤어요. 이야기는 재밌는데… 읽는 내내 오셀로에게 답답한 마음이 들어서 힘들더라고요."

웃음이 났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많이들 그렇게 반응하시더라고요."

그 순간, 조용하던 재일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전… 오히려 데스데모나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궁금했어요."

그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편안한 인상을 준다.

"사랑한다고 믿었다면, 오셀로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을 텐데요. 그때 단 한 번이라도, 단호하게 말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지켜내는 게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나는 숨을 삼켰다. 가슴속으로 눅눅한 습기가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가슴 한쪽을 서서히 찔렀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순간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그랬을까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어요. 때로는 상대를 몰아붙여 상처를 주는 것보다 침묵이, 모르는 척 넘기는 게 사랑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고 싶을 때가 있거든요."

내 말이 끝나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순간, 재일과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내 마음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순간, 알 수 없는 민낯의 감정이 드러난 기분이었다.

이상했다. 처음 보는 낯선 눈빛이 마치 나를 읽어내는 듯, 아니면 위로하는 듯 스쳐 지나갔다.

모임이 끝나고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다.

"저는 이수영이에요. 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치고 있고요, 고전문학을 좋아해요. 남들이 재미없다 하는 것들에 끌리는 편이에요."

그 말에 작은 웃음소리가 났다. 현승이었다.

"하하, 웃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제 친구한테 늘 그런 말 하거든요. 재미없는 거 다 좋아하는 희한한 놈이라고요. 그렇다고 수영 씨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현승은 펀드매니저였고, 독서모임은 처음이라고 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참에 책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왔다고 덧붙였다.

다른 모임원들의 소개가 이어졌고, 마지막은 재일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가 천천히 들며 말했다.

"신재일입니다. 물리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어요."

나는 들고 있던 텀블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물리에 박사과정이라니.

현승의 말대로라면 재미없는 놈의 범주에 속할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재일과 나의 시선이 부딪쳤을 때, 그는 아래로 눈을 피했다.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때, 다른 모임원들이 하나 둘 돌아가고, 현승과 재일은 여전히 대화 중이었다.

오늘따라,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괜히 냉장고를 열었다.

우진이 사둔 케이크가 보였다.

‘좀 이상하게 생각할까.’ 고민은 잠시였다. 냉장고 문 쪽에서 화이트 와인을 꺼냈다.

"시간 괜찮으시면, 와인 한 잔씩 하실래요?"

이유도 없이, 누군가를 붙잡고 싶은 밤의 온도가 책방 안을 감돌았다.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마음속에 울리던 밤이었다.



2022년 5월 (by 재일)


"느닷없이 웬 독서모임이야?" 오랜만에 전화가 온 현승에게 물었다. 책상 위 책장에 꽂힌 몇 권의 새 책들을 눈으로 훑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니, 너 책 좋아하잖아. 특히 고전… 아니었어?"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 다른 어떤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그건 맞긴 한데, 너는 책 안 읽지 않아?"

"이제부터 읽으면 되는 거 아니냐? 나 혼자 가기는 좀 그래… 같이 가자. 너도 사람들 사귀고 얼마나 좋아."

현승다운 말이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끌어냈다.

"글쎄… 나 요새 바쁜데."

"야, 연애도 안 하는 놈이 뭐가 그렇게 맨날 바빠…"

"아니 논문 쓰던 게… 아직…"

"잔말 말고, 가자. 응?"

결국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첫 독서모임이 끝났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감도는 이 조용한 책방에는 현실과는 다른 공기, 다른 시간, 다른 언어로 말하게 되는 신기한 마법이 존재했다.

말주변이 없는 나인데,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말이 술술 나왔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라니.

어느새 두 시간을 넘게 열띤 대화를 했다. 모임이 끝난 게 아쉬웠다.

간단한 자기소개 후 다른 멤버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비 오는 목요일 저녁, 다들 약속이 있었을까?

책방에 남아있는 사람은 현승과 나 그리고 수영뿐이었다.

"다음에 이 책으로 할까요? <위대한 유산> 어때요?" 현승이 책장 한쪽에서 디킨스 책을 꺼내 들며 말했다.

표지를 넘기며 웃는 얼굴이 밝았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현승은 항상 그랬다.

어떤 말을 할 때 주저하질 않았고, 농담 한마디에도 자신감이 실려 있었으며, 어떤 자리에서도 대화를 이끌어 내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 친구로 지낸 만큼이나, 때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좋아요. 어릴 때 읽고 다시 안 읽었네요." 수영이 대답했다.

그녀는 은은한 조명 아래,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에 기대 웃고 있었다.

청바지에 목선이 드러나는 하늘색 반팔 가디건 차림에, 잔머리가 살짝 빠져나온 하나로 묶은 머리, 대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웃음… 마치 신비로운 공기처럼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근데 여긴 진짜 분위기 좋네요… 수영 씨가 직접 운영하시는 거예요?" 현승이 물었다.

"아, 사실 여긴 제 책방은 아니고요, 지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제가 독서모임 하는 동안에만 빌린 거예요. 사실 평일에도 틈틈이 일을 돕기도 하고요. 워낙 오빠가, 아니 주인이 바빠서요. 물론 보수는 없지만요."

"엄청 가까운 지인이신가 봐요?"

"음… 뭐, 지인이라면 지인이죠? 제가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던, 친오빠 같은 사람?"

'오빠 같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시간 괜찮으시면, 와인 한 잔씩 하실래요?" 수영이 카운터 아래 작은 냉장고를 열고 와인병을 꺼냈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상했다.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앉아 있다는 게.

"재일 씨, 이것 좀 들어주실 수 있어요?" 그녀가 청량한 청록색 와인병과 와인잔을 내놓았다.

"근데, 재일 씨는 왜 독서모임 하게 됐어요?" 수영이 와인 코르크를 돌리며 물었다.

찰나의 침묵이 스쳤다. 나에게는 늘 대답을 생각해야 하는 그 순간이 길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의미를 찾으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느낀 그 의미가…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건지, 문득 궁금해지더라고요."

수영은 동의하는 듯 작은 끄덕임으로 답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더니 이내 와인잔에 금색 빛 와인이 따라졌다.

그리고는 나에게 잔을 건넸다.

화장을 해서였을까? 아니면 조명 탓이었을까. 빛이 나는 이마와 뺨, 맑은 피부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동그란 눈동자.

그녀의 얼굴에는 신비로우면서도 어딘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수영 씨, 얘가 좀 진지해요. 근데 한 마디 할 때마다 신기하게 꽂힐 때가 있어요, 친해지면 또 나름 매력이 있어요, 약간, 뭐랄까. 스며드는 스타일?" 현승이 와인잔을 받으며 말했다.

그는 늘 이렇게 나를 소개했다.

"저 그런 거 좋아해요. 나도 모르게 마음에 남는 말들이요."

순간, 그녀를 바라봤다. 차가운 와인 잔을 쥔 손끝에 열이 올랐다.

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말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눈빛이, 아니면 내 말에 반응한 듯한 그 순간이,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고요 속에서 내 심장 소리를 들킬까 봐 벌컥, 한 모금 마셨다.

'셰익스피어 책방…' 참 이상한 공간이었다. 고작 몇 시간 그 안에 있었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꿈에서 깬 것처럼 기억이 흐릿했다.

수영이 자기를 소개했을 때, 나는 그녀가 우리 학교 교수일 거라 짐작했다.

올해 초 교지에 미국에서 온 최연소 생화학 교수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학계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그녀에게 그 말을 묻고 싶었지만, 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현승은 수영에게 분명 관심이 있어 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친구라 그런지, 그의 행동은 읽기가 쉬웠다.

둘의 자연스러운 대화에 나는 몇 번이나 끼어들 타이밍을 놓쳤다. 하려던 말을 다시 삼켰다.

이럴 땐 현승이 부러웠다. 그는 모델 같은 외모에, 유쾌한 언변으로 어느 모임에서나 인기가 있었다.

나는 옆에서 함께 앉아 있는 그저 조용한 친구였을 뿐. 그래도, 현승은 그런 나를 먼저 챙겨주는 친구였다.

아마 이 모임도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여기 오지 않았겠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독서모임에서 읽었던 <오셀로>를 다시 펼쳤다. 데스데모나의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 살기를 원했을 뿐이에요. 그것이 과감한 선택이었다면, 세상이 판단하겠죠."

대사를 읊던 수영의 목소리가 또렷하다. 책을 덮고 불을 끄려다 무심코 핸드폰 화면을 켰다.

메신저를 열려다 다시 닫았다. 보내도 되는 건지, 아직은 아닌 건지.

늘 타이밍을 놓치게 되는 쪽은 나였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마법 같은 상상이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누가 누구를 먼저 사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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