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바람이 차다. 아무 외투나 손에 잡히는 걸로 입고 나온 탓이었을까, 눈보라가 거세지고 외투는 조금씩 젖기 시작한다. 얼어붙어오는 살갗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면 얼굴까지 차가워질 것이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다. 삼켜버린 눈물이 목 안에서 얼음처럼 차갑다.
아빠가 재혼을 생각한다며 나의 생각을 물었을 때, 왜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을까. 안절부절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원망스럽다.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고부터 나는 집이 낯설어졌다. 아빠가 집에 계시는 시간에 맞춰 들어오려고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제일 두꺼운 책을 골라 읽었다. 그 두꺼운 책이 끝날 때쯤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지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관문은 늘 무거웠다.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새엄마는 그런 내가 못마땅한지 늘 아버지를 다그쳤다. 두 사람 사이, 몇 번의 큰 싸움 뒤에 나는 결국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옮겨야 했다.
"명문학교야 여기 수영아. 너 하는 만큼만 하면 대학도 하버드나 MIT 충분히 갈 수 있어."
이어폰을 꽂았다.
"어차피 보내려던 것 알아. 아빠 인생에서 나는 그냥 짐 덩어리 같은 존재일 테니까."
아버지는 화가 나 내 방문을 닫고 나갔다. 여느 때처럼 새엄마와 싸우는 소리에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둑한 밤거리로 뛰쳐나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얼어붙는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세상을 향해 눈을 뜨던 날, 엄마는 눈을 감았다. 심각한 임신중독증이었던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일찍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사랑해’라는 엄마의 입모양을 처음으로 볼 때쯤 내가 들었던 말은
"제 에미 잡아먹고 태어난 년" "이기적인 년"이었다.
세상에 엄마가 없는데도 나는 엄마를 앗아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실체 없는 그리움이 내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계속 걷는다. 발걸음이 눈 위에 묻히고, 다시 눈보라가 그 자국을 지워간다.
마치 나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듯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그런 존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