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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우연의 얼굴을 한 운명

두번째 독서모임

by 아타마리에

2022년 5월 (by 수영)


"오늘따라 입을 옷이 없네…"


연구실에서 급히 집에 들러 옷장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순간이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급하게 화장을 고치고 청바지에 하늘색 니트를 꺼내 입고 책방으로 향했다. 오늘은 두 번째 독서 모임이었다.

사람마다 다른 문장을 사랑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대화가 오가는 동안, 오래 잊었던 설렘이 작은 불씨처럼 살아났다.


열띤 대화 끝에 모임이 끝났다. 오늘도 여운이 길게 남았다. 현승과 재일은 그 자리에 앉아 여전히 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갈 생각이 없나 보네…?'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옆 벽장에 세워진 와인병을 만지작거렸다.


"다들… 오늘도 와인 한 잔씩 할까요?"

고민 끝에 와인병을 꺼내서 들어 보이자 재일은 미소로 답했고, 현승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 조명, 커피 향, 그리고 디킨스에 와인까지… 저 여기 살아도 되겠는데요? 저 진짜 잠만 자고 다니는데… 지인분께 부탁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책방에서요?"

현승의 농담에 웃음이 나왔다.

"네."

우리 셋은 크게 웃었다. 와인병을 들고 재일과 현승이 앉은 테이블에 앉았다. 재일은 오늘도 조용한 편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눈썹을 살짝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 모습에 시선이 갔다.

"와인을 좋아하시나 봐요." 재일이 잔을 들어 올리며 입을 뗐다.

"네, 다 제가 마시려고 사다 놓은 와인들이에요. 책방 주인은 술을 안 좋아하거든요…"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수영아."

너무도 익숙하고 따뜻한,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숨이 멎었다. 기억 속 어느 겨울밤처럼.

목소리의 주인공은 우진이었다.

"어?"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올 시간이 아니었다. 공연이 코앞이라 밴드 연습이 있는 날일 텐데.

"아직 안 끝났어?"

어깨에 기타를 메고 걸어 들어오는 우진의 반대편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너 데려다주려고 왔어. 연습이 일찍 끝났거든. 진호가 일이 생겼대. 밥은? 혹시 안 먹었을까 봐 분식 좀 사 왔는데… 손님들 있는 줄 알았으면 더 챙겨 오는 건데."

"아니야, 괜찮아. 오빠… 들어와."

검은 봉지를 받아 들자 우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진이라고 합니다. 이 책방… 제 친구가 잠시 빌려 쓰는 곳이에요."

어색한 표정을 뒤로 감추고 나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소개했다.

"여기는 현승 씨, 재일 씨. 독서모임 멤버야. 모임 끝나서 와인 한 잔 하고 있었어."

우진은 망설임 없이 내 옆자리에 앉아 기타를 내려놓았다.

"기타 치시나 봐요?" 재일이 물었다.

"네, 밴드하고 있는데, 뭐… 그냥 저희끼리 하는 거죠."

"그래도 인디밴드 중에선 워낙 유명한데, 뭘… 그리고 오빠가 곡도 다 쓰고 있어요."

우진은 밴드의 곡 대부분을 직접 작곡하고 작사에 참여했다. 큰 에이전시의 제안도 여러 번 거절하고 자신의 음악만을 고집해 왔다.

"아니, 유명하긴…"

"오빠, 그러지 말고, 자랑 좀 해봐!"

우진은 머뭇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밴드 이름이 혹시… Lost Sky인가요?" 현승이 뭔가를 기억해 낸 듯 말했다.

"어, 맞아요."

현승은 재일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야… 엄청 유명한 밴드야…"

재일은 놀란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와… 영광입니다. 인디 쪽에서 엄청 유명하잖아요… 저도 대학에서 밴드 했었거든요… 제가 노래만 알고 멤버들 성함을 몰랐어서 몰라봤네요."

"알아봐 주셔서 제가 고맙죠. 밴드라면? 혹시 보컬?"

"아, 아니요… 드럼 쳤는데, 지금은 안 하고 있어요."

"얼굴이 너무 잘생기셔서, 보컬일 거라 생각했어요… 저희 곧 공연 있는데, 좋아하시면 한번 보러 오세요."

우리 넷의 대화는 생각보다 편했다. 대화의 주제는 책에서 우진의 밴드로, 다시 대학교 시절 밴드를 하던 현승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재일은 그저 말없이 와인잔을 비우고 있었다.

비어 있는 내 와인잔을 보고 우진이 나지막이 물었다.

"수영아, 더 마실 거야?"

"응."

우진은 내 앞에 놓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턱에 닿던 갈색 머리칼을 자연스레 넘기던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 옆의 작은 점이 반짝였다. 옆에 앉은 그의 온기가 어깨에 닿았다. 따뜻했다. 너무 익숙했던, 그런 따뜻함이었다.

"두 분은 어떻게 만나신 거예요?" 불쑥 재일이 물었다.

"아 그게…" 우진이 말을 시작했을 때 나는 급히 말을 끊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 나는 어떤 말을 막고 싶었던 걸까.

"캐나다에서 만났어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거든요. 학교에 한인들이 없어서 친하게 지냈어요."

"우와, 캐나다에서 인연이 지금까지… 그때 수영 씨는 어땠어요?" 현승이 궁금한 듯 물었다.

"수영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아니 토론토 전체에서요. 천재 소녀로 유명했거든요. 올림피아드 킬러라고."

우진의 말에 힘이 들어간다. 다시 내 쪽을 돌아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와 진짜요? 제 주위에도 그런 친구 하나 있는데…" 현승도 웃으며 재일에게 눈짓을 한다.

"하지 마, 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천재는 무슨…"

"야, 과학고 수석 졸업이면, 그 정도면 천재 아니야? 너는 야, 내 평생 자랑이야…"

"야, 그러지 마…"

재일은 민망한지 현승의 입을 막으려는 시늉을 했다.

"우와, 재일 씨 대단하네요…"

어느새 감탄이 나왔다. 재일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눈동자 속 내가 비쳐 보였다.

‘어쩌면 나랑 많이 닮은 사람인 것 같아.’

왠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분위기에 먼저 취해 와인 두 병이 비워졌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잔들이 붉은 와인 색으로 물들었다.

"오늘도 즐거웠어요. 먼저들 가세요, 저는 이거 대충 치우고 오빠랑 문 닫고 가려고요."

그렇게 재일과 현승이 돌아갔다.

와인잔을 설거지하다 우진이 말했다.

"와인 색이 잘 안 빠지네…"

"그럼 그냥 일단 물만 반쯤 채워둬. 내일이면 빠지겠지."

"그럴까?"

그는 와인잔에 물을 담아 카운터 한쪽에 밀어두었다.

"근데, 수영아… 둘 다 남자였어? 그것도 엄청 잘생긴 분들?"

"응? 그래? 얼굴은 오빠가 더 잘생기지 않았나? 아니야?"

나는 당황한 나머지 장난스럽게 넘기려 했다.

"근데, 오늘은 유난히 잘 웃더라. 수영이 너."

"뭐야, 오빠 혹시 질투하는 거야?"

우진은 말없이 웃었다. 그러곤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아냐. 그냥… 내가 모르는 네 얼굴이 있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다 했으면 가자, 오빠."

붉은 물이 든 와인잔들이 남아 있는 셰익스피어 책방에 불이 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2022년 5월 (by 재일)

문자 한 줄. 고작 그거 하나 보내는 데, 손가락이 다섯 번은 멈췄다.

"재미있었어요. 어제도."

"수영 씨, 잘 들어가셨죠?"

"오늘… 날씨 좋네요."

'… 아니다. 아니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고 화면을 꺼버렸다.

다시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와 차갑지만 또랑또랑한 말투, 책 이야기만 나오면 반짝이던 눈빛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독서모임을 시작한 이후, 책방의 공기는 매일의 일상에도 머물렀다. 갑자기 만난 우진이라는 사람이 머리에 스쳤다.

'어떤 사이일까? 그냥 오빠라고 했지만 가까워 보였는데… 둘이 사귀는 건가? 아니면 그냥 썸?'

아무것도 모르는데,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답답함에 현승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뭐 해."

"어, 나 이제 퇴근하려고. 왜, 무슨 일 있어?"

"그냥… 독서모임은 어떤 것 같아?"

"책방? 아, 진짜 좋더라. 분위기도 그렇고, 대화는 재밌고, 와인도 맛있고. 근데…"

현승이 말을 멈췄다.

"… 수영 씨, 진짜 특이한 사람 같지 않아? 뭔가 시니컬한데 말끝마다 웃고, 진지한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기도 하고, 교수라 그런가, 카리스마가 있어. 근데 또 귀엽기도 하다?"

오늘도 현승은 내 마음을 대신해서 말했다. 수영을 이야기하는 현승의 목소리가 너무 밝아서 신경이 쓰였다.

"… 그렇지. 그렇네."

"그 우진형은, 남자인 내가 봐도 반하겠더라… 얼굴도 잘생겼는데, 목소리 톤이 너무 사기야…"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조심스레 현승의 의견을 물었다.

"그래 보이지는 않던데, 뭐 예전엔 그랬을 수도 있겠지?"

"어, 뭐, 그럴 수도 있지."

"맞다. 너랑 같은 학교인데 지나가다 마주친 적도 없어?"

"없어, 물리랑은 거리가 멀어. 나는 학교 가면 연구실만 가는데 뭘."

"정말 신기하지 않아? 수영 씨가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라는 게.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또 그렇지도 않다?"

"나는 사실 수영 씨를 알고 있었어… 교지에 실렸었어. 그리고 뉴스에도 났다던데… 국내 최연소 생화학 교수라고… 천재라고 학교에서 한동안 많이들 이야기하더라."

"아 그래? 진짜?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어쩐지 수영 씨 글도 엄청 잘 쓰더라."

"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리 회사 여직원이 수영 씨를 SNS에서 팔로우하나 봐. 그래서 블로그를 알게 됐지. 나도 거기서 본 거야, 독서모임."

SNS와는 거리가 먼 나였지만 현승에게 수영의 블로그 주소를 물었다.

"그나저나 우리 셋, 나이도 같은데 친해지면 좋겠다. 수영 씨한테 월요일에 점심 같이 먹자고 해볼까? 너네 학교로 내가 점심시간에 갈 수 있는데…"

그 말에, 답답했던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좋아. 나도 갈게."

현승과 전화를 끊고, 수영의 블로그를 검색했다.

블로그 제목은 '기억 너머'였다.

아무 글이나 클릭했다.

당신이 떠난 자리에 먼지 하나 앉는 것도 싫어서, 닦고 또 닦다… 눈물이 떨어지는 것도 몰랐다. 나는 오늘도 빈자리를 눈물로 닦는다.

천천히 글자를 따라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뜨거운 무언가가 속에서 천천히 차올랐다.

밤새 블로그 글을 읽다 화면을 끈 건 새벽 2시가 넘어서였다. 침대에 누웠다. 그날 책방의 공기가 다시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사랑을 해 왔을까. 내가 궁금해해도 괜찮은 걸까?

다음 날 연구실에 들어가는 길, 내내 수영의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연구실 동료 제희를 마주쳤다.

"김제희!"

"어, 실험 들어가?"

"어…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뜸을 들이다 말했다.

"그, 전에 네가 이야기하지 않았어? 우리 학교 교수 중에 미국에서 온, 젊은 생화학 교수님…"

"아! 이수영 교수님? 어, 알지. 나 며칠 전에도 학교에서 봤어. 실제로 엄청 미인이시던데?"

"그 교수님, 어떻게 한국에 오신 거야?"

"몰라. 근데 존스홉킨스 박사에 MIT 포닥까지 하고 바로 정교수 스카우트 됐다던데… 거의 현실감 없는 캐릭터 터지."

'그 정도라면, 미국에 남았을 텐데… 한국엔 왜 왔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몰라. 뭐 한국에 숨겨둔 남자친구라도 있나 보지! 나 들어간다. 이따 봐."

제희가 들어간 길 위에 혼자 멈춰 있었다.

'난 뭐가 이렇게 궁금한 걸까…'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아주 깊숙한 곳, 그 어딘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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