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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기숙사, 그 밤

by 아타마리에

2022년 7월 (by수영)

공연장은 들뜬 관객들로 꽉 채워졌다 선선한 여름바람에 머리칼이 날려 코에 닿았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환한 조명들이 하나 둘 켜졌다.

"우진 오빠!!!"

"와!!!"

"사랑해! Lost sky!" 무대에 우진의 밴드가 등장했을 때 터져 나온 함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인데, 이번엔 꼭 공연에 와야 한다는 그의 말을 나는 또 거절할 수 없었다. 수많은 인파와 무대의 모든 에너지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인디 밴드 페스티벌. 우진은 대학을 그만두고 음악을 택했다. 그를 처음 만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밴드 공연에서였다. 체육관에서 사람들을 비집고 맨 앞자리에 섰을 때, 얼굴이 희고 눈빛이 맑은 동양인 남자아이가 웃는 얼굴로 기타를 치고 있었다. 나만 그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보컬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숨어든 너의 공간,
너의 체온이 가까워지는 밤
난 숨이 멎을 것 같았어
너의 이마 너의 입술 너의 어깨
너라는 파도가 다가올수록 난 겁이 났어
도망쳐야 할까
달빛은 나를 쫓아와


가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며,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앞이 흐려졌다. 누군가에게 들킬까 입술을 꼭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어느 순간 노래도 함성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눈물로 가려진 시야에서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우진과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날이 떠올랐다.


***


여름 방학이라 기숙사는 유령의 집처럼 조용했다. 친구들은 다 가족이 있는 도시로 돌아갔고, 남아 있는 건 가족이 너무 멀리 있는 유학생들과 나뿐이었다. 이번 방학엔 우진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거나, 밴드 연습실에서 매일 시간을 보냈다. 우진이 기타를 연주하는 동안 나는 책을 읽었다. 저녁이면 텅 빈 기숙사로 돌아와 다시 책장을 폈다. 혼자 있는 공간은 익숙해질 만한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날도 기숙사 방 불을 끄고 독서등만 켠 채, 침대 구석에 앉아 책장을 펴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여름의 공기는 무거웠고 창밖은 어두웠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노크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창문 밖에 모자를 푹 눌러쓴 우진이 웃고 있었다.

누가 볼까 무서워서 창문으로 달려갔다.

"뭐 하는 거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람 없어서 기숙사 감시도 잘 안 해. 창문 좀 열어줘."

급하게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밖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창문틀을 붙잡고 한쪽 다리를 올리더니 금세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누가 보는 것은 아닌지 조마조마 한 마음에 켜져 있던 독서등을 껐다. 방은 어두워졌다. 닫힌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무슨 일이야?"

"그냥 너 생각나서 왔어."

기숙사 방은 달랑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들어가는 좁은 공간이라, 앉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우진이 내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나도 침대의 한쪽 끝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꿈속처럼 우진의 실루엣과 마주 앉았다. 침대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이 그의 윤곽을 희미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정적을 깨며 말했다. "음악 들을래?"

우진이 몸을 웅크려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침대 안쪽에, 우진은 바깥쪽에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꽂았다. 음악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좁은 침대에 나란히 앉으니 반팔을 입은 서로의 살결이 닿았다. 여름밤이 더워서인지, 여기까지 오는 길에 땀을 흘렸는지 우진의 뜨거워진 몸과 땀 냄새, 창밖의 더운 공기가 뒤엉켜 나를 휘감았다. 닿아있는 우리 둘의 팔에 땀방울이 맺혔다. 한참을 몸을 뒤척이지 못한 채로, 우리는 그대로 있었다.

눈을 감았다. 우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때, 온기가 느껴졌다. 내 팔에 닿아있는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나는 움찔거렸다. 떨림을 품은 그의 손가락은 내 팔 위를 움직여지나,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내 다리에 닿았다.

떠지려던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 땀이 났다. 어쩌면 이어폰 속 음악보다 더 크게 들렸던 건 우리의 심장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우진의 손은 한참을 내 다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밤은 그렇게 흘렀다. 말 한마디 없이 우리는 서로의 소리를 들었다. 침묵만으로 터질 것 같던 작은 기숙사 방, 그의 옆에서 나는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우진은 없었다.

‘꿈이었을까’


문자가 와 있었다.

발신자: 김우진

"수영 굿 모닝, 일어나면 우리 산책하러 가자."


우리는 버스에 올라탔다. 여름의 파란 하늘 아래, 반짝이는 호숫가를 걸었다. 우진은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열여섯 살의 그날, 나는 시간이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정말로 우리가 영원히 함께 걷게 될 줄 알았다.


***


"수영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공연이 끝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관중 사이를 비집고 우진이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뭐야 여자 친구인가 봐." "김우진 아니야?" 주위에서 우리를 보며 웅성이기 시작했다.

"너, 괜찮아?!" 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 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나가자 일단."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내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무대 뒤 대기실까지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너 정말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그냥 머리가 좀 아팠어."

"공연도 안 보고 계속 멍하게 있길래. 너무 걱정이 돼가지고..."

"아니야 요새 너무 무리했나 봐. 공연에 집중 못해서 미안해, 정말."

열심히 준비했던 무대에서 나를 보느라 실수라도 했을까 봐,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것 같아서 그에게 미안해졌다.

집 근처에 주차를 하고 나란히 걸었다. 손이 스치며 우진과 나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했다. 공연장에서 내 손을 잡았던 게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까워졌다가도 늘 닿지 못하고 식어버리는. 이런 일이 반복될 때마다 늘 혼란스러웠던 건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을 수 없던 그였다.

"아까 그 노래 있잖아..."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냈다.

띠리리 띠리리. 전화가 울렸다.

"어 진호야. 어. 알겠어 금방 갈게."

"수영아, 공연장에 뭔가 문제가 좀 있나 봐. 나 지금 가야겠다. 들어가서 자, 나 회식 늦게 끝날 것 같아서 통화도 못하겠네."

"응 그래. 나는 괜찮아. 가봐."

우진이 떠났다. 또다시 그가 떠난 자리에 나는 혼자 남겨졌다.

우리는 여전히 목적지에 이륙하지 못한 채 같은 활주로를 맴도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밤의 기억 속에서, 우진의 손끝에서 느꼈던 떨림을 다시 기억 속에 묻어야만 했다.



2022년 7월 (by 재일)


월요일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점이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책방에서만 보던 수영을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까. 현승이 기어코 성사시킨 점심 약속이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카라티뿐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옷만 입고 살았을까. 마치 고등학생 같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여러 번 뒤져서 겨우 찾아낸 남색 셔츠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후에는 어차피 실험실에 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서랍 한구석에 넣어둔 향수에 손이 닿았다. 작년 생일에 동료가 선물해 준 것이었다.

학교 근처의 일식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수영이 정한 곳이었다. 동료들과 몇 번 와본 적 있는 곳이었지만, 막상 혼자 들어서니 낯설게 느껴졌다. 이른 점심시간이라 식당 안은 아직 한산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물을 마시며 기다렸다. 현승이 도착했고, 곧 수영이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블라우스와 포멀 한 바지를 입은 수영은 평소와 달라 보였다. 가지런히 묶은 머리와 연한 화장이 그녀의 맑은 피부를 더욱 빛나게 했다. 어쩐지 단정한 모습이 평소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와, 오늘은 되게 거리감 느껴지는데요. 수영 씨?" 현승의 말에 수영이 웃으며 답했다.

"강의 끝나고 오는 길이라서요. 저 근데 재일씨랑 같은 학교인 거 정말 몰랐어요. 미리 말이라도 좀 해주지."

"오늘 말하려고 했죠." 나는 멋쩍게 웃었다.

수영이 자리에 앉았다.

"박사과정 힘들지 않아요? 진짜, 절대 식사 때 놓치지 마세요. 몸 상하는 거 금방이거든요."

그녀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리는 간단히 점심 메뉴를 고르고, 초밥이 나오기 전까지 독서모임 이야기를 나눴다.

수영은 나와 현승의 눈을 번갈아 맞추며 미소 지었다. 현승은 여전히 말이 많았고, 나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입으로는 음식을 씹고 있었지만, 눈은 수영을 향해 있었고 귀는 그녀의 말에 쏠렸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공간의 공기마저 책방과 닮아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집중해서 식사를 한 적이 언제였을까.

눈 깜짝할 새 비워진 그릇들을 뒤로하고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어머! 교수님!" 학생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그들의 시선이 나와 현승에게로 향했다.

"어? 식사하러들 왔어?"

"네. 교수님도 식사하러 오셨어요?"

뒤에서 학생들이 귓속말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친구인가 봐."

"아닐걸, 교수님 남자친구 없다고 하셨는데."

현승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남자친구는 아닌데, 남자친구 후보들 정도는 어때 보여요?"

학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피식 웃었다.

"두 분 중에 누가...?"

한 학생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와 현승은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얘들아 그런 거 아니야. 내 지인들이야 인사해!" 수영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진짜 멋지세요! 연예인 누구 닮았는데..."

"근데 진짜, 교수님 연애하시면 저희 과 남자애들 다 울어요. 저희한테는 교수님이 연예인이거든요."

"혹시 연애하시게 되더라도, 비밀연애 부탁드립니다!"

학생들의 농담에 수영도 깔깔대며 함께 웃었다. 나이 어린 교수답게 학생들과 친구 같은 사이인 것 같았다.

"그럼 교수님 내일 봬요~ 사랑합니다 교수님!"


사랑합니다라니.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수영은 정말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일 것이다. 대학 다닐 때나 대학원 생활 내내 늘 조용했던 나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내게는 동기들 모임도, 친구들과 술자리도 재미없었다. 독서를 제외하면 딱히 취미도 없었다. 집과 학교 연구실, 주말엔 등산이나 가는, 현승 말대로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독서모임에 나가게 된 건 큰 용기였다.


그녀는 달랐다. 그녀가 가는 곳마다 생동감 넘치는 아우라가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오늘 이렇게 얻어먹어서... 고마워요." 수영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음엔 제가 살게요. 뭘 좋아하세요?"

"음... 저는 수영 씨가 정한 데면 다 좋습니다." 현승이 바로 답했다.

"저도요."

"그럼... 삼겹살에 소주?" 수영은 살짝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오, 역시 교수님!"

현승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럼 다음에 삼겹살로 만나요."

수영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씩씩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니 현승도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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