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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얼굴 없는 사랑

2022년 7월

by 아타마리에

2022년 7월 (by 수영)


비 오는 날은 아니었지만, 머리가 무겁고 몸도 마음도 눅눅했다. 여름의 습한 공기가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매년 이맘때면 그랬다. 외로움은 익숙했지만, 해가 바뀔 때마다 그것은 낯선 얼굴로 다시 찾아왔다.

7월 19일, 내 생일이자 엄마의 기일이었다. 연구실로 갈까 하다, 문득 광주에 있는 엄마의 납골당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터미널로 돌렸다. 오늘따라 납골당은 조용했다.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조용히 걸어가 엄마의 이름을 확인하고 그 앞에 섰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세 글자를 바라보다, 서른 해 가까이 된 낡은 흰 항아리를 보는 순간, 여섯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얘들아, 이번 주에 어버이날이 있어. 우리를 사랑으로 낳아 길러주신 엄마 아빠께 고맙습니다. 하고 말하는 날이야. 오늘은 엄마 아빠 얼굴을 그려보자.”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크레파스를 들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섯 살의 나는 도화지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 적 없는 엄마 얼굴은 알 수 없었고, 아빠의 얼굴마저 희미했다.

‘대신 할머니 얼굴을 그려볼까.’ 손을 도화지 위로 가져갔다가 이내 멈췄다. 눈물이 차올라 소매로 훔쳐냈다. 결국, 그날 나는 아무것도 그리지 못했다.


내게 엄마는 신기루 같은 존재였다. 젖을 찾아 파고든 적도, 품에 안긴 적도 없었으니 냄새도 감촉도 목소리도 알 수 없었다. 세상에 남은 엄마의 흔적은 지금 눈앞의 흰 항아리뿐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나보다 낫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엄마 곁에는 할머니의 유골이 함께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랑 같이 있어서 좋겠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아빠와 나 사이엔, 엄마만큼의 빈자리가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끝내 아빠의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그런 보통의 부녀가 아니었다. 각자의 슬픔을 끌어안은 채 등을 진 사람들이었다.


아빠는 내 생일마다 늘 용돈만 내밀었다.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좋아하는 것도 사고.” 그 흔한 “생일 축하한다”는 말 대신 그것이 전부였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이 아빠에겐 원망스러운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빠에게조차 상처가 된 존재인 것 같은 죄책감. 그 순간부터 나는 아빠의 사랑마저 바라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서 돌아오며 바랐던 건, 어쩌면 엄마의 진짜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희미했다. 마치 형체 없는 연기처럼...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를 타며 핸드폰을 확인하니 우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었다. 왜인지 답하고 싶지 않아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에 혼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공허한 마음으로 텅 빈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누구를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수십 번 고민을 하다 떠올린 것은 재일과 현승이었다.

'둘 중 누구에게 보내야 하나…’ 현승은 늘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호감형의 얼굴, 밝은 표정, 능수능란한 태도. 대화하면 언제나 긍정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반면 재일은 말수가 적고 표정도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눈빛이 달라졌다. 그의 말에는 무게가 있었고, 한마디가 깃털이 되기도, 칼이 되기도 했다.


잠시 망설이다 문자를 보냈다. “재일 씨, 오늘 바쁘세요? 시간 괜찮으시면 현승 씨랑 지난번에 이야기한 삼겹살 어떠세요?”

1분도 안 되어 답장이 왔다. “네! 어디서 만날까요?”

바로 답장을 하려던 순간, 우진의 전화가 걸려왔다.

“어. 오빠.”

“수영아! 어디야, 별일 없지?”

“… 엄마 납골당에.”

“그래, 그럴 것 같더라. 전화가 안 돼서 걱정했어.”

“아니야. 별일 없어.”

“오늘 늦게 와? 저녁 같이 먹자. 오빠가...”

“오빠, 나 오늘 약속 있어.”

“오늘? 누구랑?”

“… 연구실 사람이야.” 이유도 없는데 거짓말이 나왔다. 지난번 독서모임에서 우진에게 재일과 현승을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불편했었다. 예전 같으면 사소한 것까지 다 공유했을 텐데, 이제는 달라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약속 끝나면 꼭 전화해. 늦어도 꼭.”

“응.” 전화를 끊고 다시 문자창을 열었다.

“오늘 7시에 만나요.”



2022년 7월 (by 재일)


연구실에서 수영의 문자를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거절했을지도 모르는 예고에 없던 저녁 약속. 하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러 급히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삼겹살집 앞. 그녀가 서 있었다. 오늘따라 축 처진 어깨와, 푹 눌러쓴 모자 아래 부은 눈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전기가 흐르듯 가슴이 찌릿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식당 안에는 이미 현승이 와 있었다. 우리 셋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삼겹살 3인분에 소주 한 병 주세요.” 수영이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여자와 삼겹살을 먹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와인이 아니라 소주와 수영의 조합이라니.

현승이 물었다. “오늘 학교 안 갔어요? 평일 급벙이라니, 너무 좋은데요?”

“오늘은 강의 없는 날이라, 볼일 좀 보고 왔어요.” 수영이 짧게 답했다. 나는 더 묻고 싶었지만 삼켰다.


소주잔이 채워졌다. 금세 한 병이 비워졌고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독서모임 이야기, 현승의 회사 이야기, 수영과 나의 논문 이야기.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모임 난 너무 좋아요. 문학을 사랑하는 두 천재 과학자랑 함께라니!” 현승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다 94년생인데 말 편하게 할까?” 수영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좋다! 말 편해야 더 친해지지.” 현승이 맞장구쳤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수영이 불쑥 물었다. “근데, 너희 둘은 연애 안 해? 아니면 숨겨둔 여자친구라도 있어?” 현승이 먼저 대답했다. “나는 1년 전에 헤어졌어. 좋은 사람이었는데, 뭔가 맞지 않더라. 나이 먹으니까 연애가 더 어렵네.”

“좋은 사람이면 같이 맞춰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낮은 수영의 목소리에 그늘이 졌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현승이는 그래도 인기 많잖아. 소개팅도 자주 들어오고.” 내가 웃으며 말하자, 현승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재일이는?” 수영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직… 제대로 연애해 본 적 없어.”

“진짜? 모태솔로야?”

“응.”

“우와, 나랑 똑같네!” 수영이 깔깔 웃었다. 현승은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제일 못하는 게 사랑이거든.” 그녀의 웃는 얼굴에 잠시 슬픔이 비쳤다.

현승이 다시 물었다. “근데 수영아, 너 그 책방 형, 우진 형… 그런 사이 아니었어?”

"우진 오빠?" 수영이 잠시 말을 멈췄다. 소주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우고 한 모금 마셨다. "아… 아니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냥 나 혼자 짝사랑했어. 꽤 오랫동안."

"진짜?"

"응.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때 만났거든."

"그럼, 고백은… 했어?" 현승이 물었다.

"했지. 차였어. “ 수영은 잔을 비우며 담담히 말했다.

“오빠는 나를 동생으로만 생각했어. 원래 친절한 사람이니까. 나 혼자 오해한 거지 뭐.”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금도… 그 형한테 마음 있어?”

수영은 잠시 침묵하다 답했다.

“지금은… 글쎄. 그냥 익숙한 사람? 가족 같은 사람? 이제는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어.”

수영이 말을 멈췄다.

"근데,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별 의미도 없고..."


그 말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짝사랑을 했다는 것도, 거절당했다는 것도, 블로그 속 문장들도. 그녀의 부은 눈에서 이상하게도 슬픔이 묻어났다. 남의 사랑 이야기에 왜 가슴이 움직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입 밖으로는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채로, 잠잠했던 내 마음에서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소주잔을 들고, 고기가 타지 않게 불판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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