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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첫사랑의 계절

처음 만난 너

by 아타마리에

2009년 9월 by 수영


“Hi, my name is Soo young. You can just call me Sue. Nice to meet you.”

아빠의 권유로 전학 온 지 일주일이 되었다. 원한 적 없는 기숙사 학교였지만, 막상 옮기고 보니 좋은 점도 있었다. 더 이상 새엄마 눈치를 보며 현관문을 열 필요가 없었다. 싸움 소리가 들려오던 숨 막히던 집안의 공기와 달리, 기숙사 방은 좁아도 내 숨이 놓였다. 무엇보다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서관이 마음에 들었다.


그 무렵 학교는 축제 준비로 들떠 있었다. 반 아이들은 분주했지만 다행히 모두 친절했다.

“수, 오늘 밴드 공연 갈 거야?” 뒷자리 레베카가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밴드… 공연?”

“응, 우리 학교 축제의 하이라이트야. 진짜 재밌어. 나 갈 건데, 같이 가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체육관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었다. 사람들의 어깨에 떠밀리며 앞으로 나아가다 겨우 맨 앞줄에 섰다. 스피커가 눈앞에 서 있었다. 처음 보는 무대의 웅장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때였다. 작은 앰프 위에 앉아 기타 줄을 조율하는 동양계 소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키는 앉아 있어도 180은 넘어 보였고, 하얀 피부에 턱선을 덮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순간 고개를 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그 눈빛이 선명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체육관은 폭발했다. 아이들의 함성, 손을 흔드는 파도 같은 열기, 깜빡이는 스트로브 조명까지…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 순간, 살아 있다는 기분이 처음으로 온몸을 관통했다.

‘살 것 같아.’

착각이었을까. 공연 내내 몇 번이나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 듯했다. 스쳐간 눈웃음마저 내 환상 같았던 시간이었다.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와도 그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달빛이 창을 넘어 방 안에 스며드는 동안에도, 나는 좀처럼 잠에 들지 못했다.


며칠 뒤, 도서관에서 생물 과제를 끝내고 나니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그냥 나가려다 ‘파우스트’를 집어 들었다. 대출을 마치고 나오며 주머니를 뒤적였는데 이어폰이 잡히지를 않았다.

‘어? 어디 갔지…’

급히 다시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뛰어올라 자리로 향했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 네 거야?”


뒤돌아본 순간, 공연에서 기타를 치던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어… 맞아. 고마워.”

그는 너무 커서 고개를 올려다봐야 했다. 연한 갈색 머리칼이, 그의 큰 눈망울 밑의 반짝이는 작은 점이 그림 같다고 느껴졌다. 낮게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사람은 별로 없는데, 낯선 얼굴이라 바로 알겠더라. 나는 김우진, 11학년이야. 너는?”

“이수영.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어. 10학년.”

“그럼 내가 오빠네? 우진 오빠라고 불러.”


그가 웃었다. 순간, 뱃속에 셀 수 없을 만큼의 나비들이 날아드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목구멍부터 위장까지 조여드는 설렘이…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듯한 떨림이.


그날 이후 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방과 후엔 연습실에서 그가 기타 치는 걸 구경했고, 도서관에선 나란히 앉아 공부했다. 책에 관심이 없었던 우진은, 내가 읽은 고전을 빌려가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둘이 앉아 주인공의 대사를 읊조리며 웃고, 또 울었다.


“수영아, 네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야?”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왜?”

“희극은 웃기지만, 비극도 이상하게 아름답게 쓰잖아. 그런데 오빠, 슬픈 이야기도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건 비극일까?”

“제삼자가 보니까 그렇지. 당사자라면 얼마나 슬프고 무너졌겠어.”


말하는 그의 옆모습을 보다가, 나는 고개를 떨궜다.


빨간 단풍이 흩날리던 날도, 하얀 눈이 쌓이던 날도, 기숙사 앞 나무가 새 잎을 내던 날도. 우리는 늘 함께 책을 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감정은 커졌다. 우진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솟구치던 날들이 늘어갔다.

행복과 떨림, 아픔이 동시에 몰려오던 시간. 그것은 내 첫사랑의 계절이었다.



2010년 12월, by 수영


겨울의 공기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기숙사 복도를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얼음장 같았다. 나는 손을 비비며 우진에게 툭 말을 던졌다.


“오빠, 연말에 기숙사 문 닫는다면서… 하, 진짜 귀찮다.”

“응, 원래 그래. 딱 2주 닫아. 근데 애매하잖아. 부모님은 기간이 너무 짧다고 그냥 홈스테이 하래. 한국 들어오지 말고.”


그의 대답은 담담했지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토론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벌써부터 무겁게 다가왔다. 새어머니와 부자연스러운 공기, 그 사이에서 늘 눌려 있던 아빠와의 거리감이 생각만 해도 갑갑했다.


“… 하, 난 집에 가고 싶지 않아. 그래도 가야겠지?”

“응. 아버지 기다리실 거야.”


우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늘 그렇듯, 나를 위로하려는 배려가 배어 있었다. 나는 그런 말들이 고마웠다.


“아, 어떡하지… 벌써 불편한 기분이야.”

“그래도 집에 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나는 고개를 숙이다가, 문득 말을 꺼냈다.

“오빠, 토론토 쪽에 홈스테이 구하면 안 돼? 한 시간 거리잖아. 나랑 매일 도서관 가면 되잖아.”


그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 음, 그럴까?”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날. 나는 결국 본가로 향했다. 우진은 약속대로 근처에 홈스테이를 구했다.

집은 여전히 낯설었다. 새어머니의 눈치를 피하려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 일찍 집을 나섰다.


“저 나가요.”

“수영아, 어디 가는데? 아침은?”

아빠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도서관. 점심도 밖에서 먹고 올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그렇게 집을 등지고 나오면, 도서관 앞엔 언제나 먼저 도착한 우진이 서 있었다.


우리는 대학 도서관 한쪽 구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는 온종일 책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진이 내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수영아, 뭐 하고 있어?”

“응… 사이언스 저널 보다가, 궁금한 논문이 있어서 읽고 있었어.”

“그거 어제도 읽지 않았어?”

“아니야, 이건 다른 거야.”

“우리 나가서 좀 쉴까? 나 배고픈데.”

나는 손에 쥔 책을 놓지 못한 채 답했다.

“20분만… 아니, 30분만. 이것만 읽고 나가자.”


우진은 피식 웃었다.

“… 넌 진짜 대단하다. 알았어, 나 밖에서 기다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우진과 함께 길 건너 작은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공기와 커피 향이 밀려왔다.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려 장갑을 벗고 손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순간, 우진은 목에 걸었던 머플러를 풀어 내 손을 감쌌다.

“따뜻하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베이글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했다. 유리창 너머로 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흩날렸다. 눈을 떼지 못한 채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쥐며 말했다.

“하… 따뜻하다. 오빠, 커피 향 너무 좋지 않아? 난 어디 들어갔는데 커피 향 나면 꿈속에 온 것 같고, 괜히 행복해져.”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이내 눈빛을 고정시키며 물었다.

“수영아, 너는… 공부가 진짜 재밌어? 하루 종일 논문만 읽고, 내가 왔는지 갔는지도 모르고… 대학 가면 실컷 할 텐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있지?”


나는 잠시 웃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응, 사실은… 재밌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오빠, 내가 왜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렸는지 알아?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거든. 되든 안 되든 날 안아줄 공간이 없으니까… 항상 어딘가에 닿아야만 했어. 그래야 버틸 수 있었거든.”


우진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맑은 눈 속엔 위로가 고여 있었다.

“수영아,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건 축복이야. 돌아갈 곳이 있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넌 진짜 멋져.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야.”


갑작스러운 칭찬에 웃음이 나왔다. 떨리는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한텐 오빠도 그래.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로.”


우리는 잠시 말없이 웃었다. 따뜻한 위로와 커피 향이 퍼져갔다.


“오빠, 내년이면 12학년이지? 대학은 생각해 둔 데 있어?”

“음… 아직은. 토론토가 우선이지 뭐. 열심히 해봐야지.”

“오빠는 잘할 거야. 학점도 다 좋잖아.”

“넌?”

“나? 난 내년에 SAT 볼 거야.”


그 순간,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 그래? 미국 갈 거야?”

“응. 가고 싶어. 연구 환경이 다르니까. 근데 꼭 갈 수 있을진 모르겠어.”

그는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설마, 어디서 널 놓치겠어? 과학 천재 소녀 이수영인데.”


말끝을 흐리는 우진의 눈동자와 함께, 따뜻하던 카페의 공기마저 금세 흐트러졌다.


카페 문을 나서자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다시 밀려왔다. 젖은 장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손가락에 끼웠다. 둘이 나란히 걷는 길,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끝내 삼켜야만 했다


모든 걸 잃을까 두려웠다.

혹시 지금의 떨림이 내 착각일까 두려웠다.

머뭇거리는 사이, 손에 쥔 커피는 식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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