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겨울
크리스마스를 한 주 앞둔 어느 날,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물기를 말리며 나는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오늘은 집에 들어왔을 때 나쁘지 않았어. 새엄마도 마주쳤는데, 공부 열심히 하나 보다고 말도 걸더라."
"다행이다. 엄청 나쁜 분은 아닐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을까? 나는 아빠 재혼 후에 정말 불편하고 힘들었거든. 하긴… 그전에도 아빠랑 딱히 가까운 건 아니었어."
"아빠도 너한테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었을 거야."
"음, 모르겠어… 나는 그냥 외로움이 익숙해서, 그게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 그런데 오빠는 가족들 안 보고 싶어? 지난여름방학 때도 못 갔잖아."
"나? 생각날 때도 있고… 연락은 가끔만 하니까.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오빠, 크리스마스날은 꼭 나랑 놀자. 우리 시내에 트리 보러 갈까? 엄청 예쁜 라이트 쇼도 한다는데, 낮에는 영화 보러 갈까?"
"그래. 뭐든 좋아,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매일 나를 위로했다.
크리스마스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침대 위에 빨간 체크 치마, 흰색 니트, 브라운 색 코트를 늘어놓으며 내일을 상상했다. 부푼 기대가 밤을 밀어내는지 잠이 오지 않았다.
눈부신 햇살이 창문 사이로 밀려 들어와 눈을 떴다. 커튼을 열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늘에서는 하얀 솜사탕 같은 눈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똑똑똑.
"수영아."
아빠가 내 방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폭설이 왔어… 집 앞 도로에도, 지하실 문쪽으로 다 눈이 쌓여 있어. 지금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있니? 계속 눈이 와서 당장 치우지 않으면 위험할 거야."
아빠의 난처한 표정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와 나, 새 어머니는 집 주변 제설 작업을 위해 밖으로 나갔다. 펜스의 삼분의 일이 눈 아래 묻혀 있었고, 현관문 앞까지도 눈이 쌓여있었다.
"빨리 치우지 않으면 금세 얼겠는데?"
우리가 함께 눈을 치우기 시작할 무렵, 아빠가 중얼거렸다.
"오늘은 차들도 못 다니겠다. 이렇게 눈이 와서 원."
그 순간 내 마음이 철렁했다. 오늘 우진을 만나러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웃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각자의 집 주변 눈을 치우기 시작하고, 큰길에는 제설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속 눈이 오는 것 보니 오늘은 차 타고 나가기 위험하겠다. 다 치운다 해도 도로가 전부 빙판일 거야. 이 정도면 제설 작업 하느라 도로들도 다 폐쇄되겠어."
아빠는 약속이 있다는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화가 난 나머지 집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오늘 우진에게 트리 앞에서 말하려던 계획이 있었다.
지난주부터, 아니 지난 일 년 동안 말할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말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참아지지 않았다. 우진과의 모든 순간을 수차례 돌이켜보고, 모든 경우의 수를 수도 없이 예측해 보아도, 그가 나에게 거절의 말을 할 리는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인 오늘이야말로 완벽한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폭설이라니. 모든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띠리리. 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응, 오빠."
"수영아, 여기 눈 엄청 왔어. 너희 집도 그래?"
"응, 여기도 그래. 나 다시 눈 치우러 나가야 해."
"어떡하냐… 우리 만나기로 했잖아."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니까, 이게 뭐야."
창밖의 하얀 눈송이가 원망스러웠다.
눈을 치우는 동안 새 어머니가 내게 말을 걸었다. 대학 진로나 친구 관계 같은 것들에 대해. 나는 삽으로 바닥을 긁으며 의무감으로 답했다. 저녁이 되자 아빠는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장작이 갈라지며 불꽃이 튀는 소리가 가슴을 조여왔다.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벽난로 속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침대에 털썩 누워 책을 펼쳐 들었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에 창문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침대로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우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영아!"
"응, 오빠…"
"나올 수 있어? 나 너희 집 앞이야."
2층 방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정말로 그가 서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숨을 참고 지하실로 내려가 방한 부츠를 신었다. 숨을 참고 지하실 뒷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골목 위를 빠른 걸음으로 밟으며 코너를 돌았을 때, 그곳에 우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어, 어떻게 나왔어?"
"아빠는 서재에 있는 것 같아. 새엄마는 모르겠고… 아마 내가 공부하는 줄 알고 계실 거야."
나는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어, 우리 만나기로 했었잖아."
그가 해맑게 웃었다.
"이쪽 뒤로 걷자. 걷다 보면 공원이 나올 거야. 여긴 사람들 잘 안 다녀."
이웃들의 눈을 피해 막다른 골목을 향해 걸었다. 쌓인 눈 위를 밟을 때마다 연신 발이 푹 빠졌다. 어느새 방한 부츠의 맨 위쪽까지 눈에 잠겼고, 부츠도, 양말도 젖어가고 있었다. 발을 떼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차가운 눈이 맨살에 닿아 녹아내려 얼어붙어 가고 있었다. 참기 힘들 정도가 되었을 때, 그제야 입을 열었다.
"오빠, 나 할 말 있어."
"응?"
"나 원래 오늘 오빠랑 데이트하고,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말하고 싶었는데…"
우진의 당황한듯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나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오빠, 나... 오빠 좋아해도 돼? 나 진짜 좋아하는데..."
"어? 수영아."
그는 당황한 듯 발걸음을 멈췄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니 발가락마저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오빠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정적이 흘렀다.
"그게…"
웃고 있던 내 얼굴 근육이 떨렸다. 어쩌면 나는 그의 뒷말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거 아니었어?... 우리?"
"오빠는 아직 아니야… 수영아…"
끝내 우진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아니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까, 우리?"
"아니, 나는 아직 아닌 것 같아."
그의 차가운 말과 함께,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온몸으로 스며들어 퍼져나갔다.
"내가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그런 거야? 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미국 가면 되잖아… 아니면 나한테 토론토에 남으라고 오빠가 말할 수도 있잖아…"
"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뭐야? 지금까지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잘해준 거야?"
"아니야."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져 차가운 눈 속으로 스며들어 흔적을 남겼다.
우진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난 아직 너랑 오빠 동생으로 지내고 싶어."
나는 그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싫어. 오빠 동생, 나는 싫다고…"
"그러지 마."
"난 오빠를 이해할 수가 없어…"
눈 속으로 두 번째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무거운 발을 하나씩 옮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점점 멀어져만 갔다.
내 눈물은 하얀 눈에 스며들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두껍게 쌓인 눈도, 그 위에 남은 흔적도 모두 지워져 갔다.
밤새 내린 눈은 얼어붙어 단단한 얼음장이 되었다. 그 안에 갇힌 것은 차갑게 굳은 눈물과, 끝내 사라져 버린 고백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다. 더 이상 아침에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도,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도 아니었던 우리에게 새 학기가 찾아왔고, 나는 우진이 없는 매일에 적응해야 했다.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던 내 마음은 생각보다 빠르게 식지 않았고, 나는 서서히 변해가는 그 온도에 맞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온기가 머무르다 간 자리는 그전보다 더 추웠다.
견디기 위해 나는 다시 어딘가로 달려야 했다.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시작했고, 곧 열릴 국제 청소년 과학자 심포지엄에 나가기 위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식사 시간도 잊은 채 실험과 자료 정리에만 매달렸다. 평일에는 도서관에서, 주말에는 토론토 집으로 돌아가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간혹 복도 끝에서, 기숙사 식당 먼발치에서 그가 보이기도 했지만, 눈이 마주치면 우리는 고개를 돌려 서로를 외면했다.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조각처럼 떨어져 나갔다.
나는 우진을 잊었을까? 아니, 그렇지 못했다. 한 귀를 닫고 한 귀를 열어둔 채, 어쩌면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 더운 여름과 외로운 계절이 지났고, 나는 심포지엄에서 좋은 성과를 내어 예상보다 한 해 빨리 졸업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친구들을 통해 오빠가 토론토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이미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가슴 시리게 추웠던 토론토를 떠나 나는 미국으로 왔다.
아빠는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영아, 잘 지내고 있지? 미국 생활은 할 만하니?"
"좋아. 연구 시설도 좋고, 공부하기 좋아."
"너 생일이라 돈을 통장으로 조금 보냈어. 친구들이랑 식사도 하고…"
"아빠… 이제 돈 안 보내도 괜찮아. 나 장학금으로 다니고 있고, 생활비도 괜찮아. 이제 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래도… 뒀다 필요한 데 써."
대학 생활은 즐거웠지만 문득문득 나는 우진을 떠올렸다.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그날이 계속 맴돌았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을까, 밴드도 계속하겠지, 오빠는 음악 없인 못 사니까, 혹시 여자친구도 생겼으려나 하는 생각들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시간은 가장 슬픈 기억부터 차례로 덮어버렸다. 눈물에 얼어붙었던 그날은 서서히 희미해지고,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들만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느 늦은 저녁, 실험실에서 돌아와 불 꺼진 방에 앉은 나는 무작정 랩톱을 열었다.
우진오빠. 놀랐지? 토론토 대학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어. 축하도, 인사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이제나마 이렇게 메일을 써. 나는 미국에 와서 잘 지내고 있어. 도서관도, 실험실도 다 너무 달라. 오빠의 대학 생활은 어떤가 궁금했어. 추운 토론토에서 오빠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수영이가
전송 버튼을 누르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다음 날 아침, 답장이 와 있었다.
수영아, 이렇게 연락해 줘서 고마워. 나도 네 소식이 궁금했어. 매일 밴드 연습하고 수업 듣느라 정신없지만 잘 지내고 있어. 네가 미국에서 잘 지낸다니 다행이야.
그 후 몇 통의 메일이 오가자, 잃어버린 온기가 서서히 되돌아오는 듯했다. 눈에 덮여 얼어붙은 땅 위에도 작은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마음을 더는 참지 못한 어느 날, 나는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나야."
"어, 수영아."
"그냥 나 집에 들어가는 길에, 전화해 봤어."
"지금은 기숙사에 안 살아?"
"응, 룸메이트랑 그냥 하우스 렌트. 오빠는?"
"나도, 밴드 하는 친구들이랑 같이 지내. 매일 게임도 하고 술도 마시고."
"아, 진짜? 재밌겠다!"
우리는 다시 매일 통화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아침마다 서로에게 문자를 보내는 그런 사이로 돌아왔다.
어느 날 우진과 통화를 하던 중 수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누가 집에 있어?"
"응, 친구 여자친구랑 그 친구들."
"아, 그랬구나…"
나는 신경 쓰이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웅성거리는 수화기 너머 그를 부르는 목소리들이 원망스러웠다.
"수영아, 나 친구들이 불러서 그만 끊어야겠다."
우리는 여전히, 그때도 지금도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친구도, 사랑도, 그렇다고 예전 연인도 아닌, 시작한 적도 끝난 적도 없는 사이.
그런데 내가 느끼는 이 불안과 초조는 무엇일까 우진은 지금 그 여자 친구들과 무얼 하고 있을까. 그중 한 명이 그의 연애 상대는 아닐까. 아니면 오늘 처음 만나 서로에게 호감이 생긴 것은 아닐까.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밤새도록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나는 그에게 묻지 못했다. 어떤 해명도,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가슴속 뜨거운 불이 번져갔다. 애틋했던 마음은 불안으로, 불안은 분노로 변해갔다. 우진에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 그의 문자가 도착하면, 그 모든 불안이 다시 잠식되는 듯했으니까.
널뛰는 감정이 하루를 지배했다. 결국 어느 날, 당장이라도 그를 만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나는 토론토행 비행기표를 검색했다.
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겨울방학에 뭐 해?"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대답했다.
"나? 아르바이트할 것 같은데… 왜?"
"나 토론토 갈까? 오빠 보러 가고 싶은데."
"토론토? 갑자기?"
오빠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음성에 또다시 지난 기억이 떠올랐고, 따뜻했던 우리의 온도가 다시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너무 바쁠 것 같으면 말고."
"어, 나 이번 방학 땐 너무 바쁠 것 같아, 수영아."
"나는 오빠 보고 싶은데…"
"나도 보고 싶지, 너…"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오던 그의 문자는 하루, 이틀씩 건너뛰기 시작했다. 몇 번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쌓여가던 그리움은 차가운 벽이 되었고, 그 앞에서 나는 끝내 스스로를 원망했다.
나는 다시 목적지를 잃었고, 우리는 또 한 번 인사 없는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