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열리는 문
“괜찮아, 나 혼자 갈게.”
삼겹살집을 나서며 현승과 재일에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실자, 하루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듯 피곤이 몰려왔다. 소주 기운이 남은 무거운 머리를 창가에 기대자 재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금도 그 형한테 마음이 있어?”
대답하지 못한 그 순간처럼, 지금의 우리도, 그때의 우리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틈에 서 있었다.
창밖 수많은 불빛이 밤하늘로 번져 갔다. 눈을 감으니, 빛의 잔상이 서서히 사라지며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그를 마주했던 날이 떠올랐다.
한국에 돌아온 뒤, 강의 준비로 정신이 없던 어느 날. 출퇴근길에 늘 스치던 작은 상가 건물 앞에서 간판 하나가 내 발을 멈추게 했다.
셰익스피어 책방.
익숙한 이름.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은은한 커피 향이 코에 닿았다. 천장까지 닿은 책장의 빼곡한 책들, 잔잔한 재즈 음악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서있었다. 큰 테이블에서 책을 읽는 젊은 손님들이 보였다. 눈에 튀는 빨간 1인용 소파를 지나 카운터에 시선이 닿았을 때, 얼굴 근육이 떨리기 시작했다.
우진이었다.
숨이 막혀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했다. 나가려는 순간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수영아!”
손목이 잡혔다. 힘껏 뿌리칠 수도 있었을까.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날의 만남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를 처음으로 되돌려놓는 순간이라 믿었다.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알고 있었다. 사랑도 이별도 고하지 못한 채, 미처 닫히지 못한 문 앞에 서 있다는 것을. 털어냈다고 믿었던 감정의 잔해가, 다시 심장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가씨, 다 왔습니다.”
택시 기사가 불러 세운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요금을 치르고 내려서 단지 입구로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그곳에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수영아!”
우진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 오빠.”
오늘 하루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마음을 숨기고 싶었던 걸까. 익숙한 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불편했다.
“기다렸어?”
“응. 약속 끝나면 연락 올 줄 알았는데 없길래, 그냥 기다렸지.”
“미안. 집에 가서 전화하려 했는데… 오래 기다렸어? 들어갔다 갈래?”
그는 가끔 내 집에 드나들곤 했다. 연구실에서 중요한 자료를 두고 왔을 때도, 내가 감기로 몸져누웠을 때도. 잠그지 못한 문은 늘 쉽게 열렸다.
현관을 열자 더운 공기가 밀려왔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열어 식탁 위에 놓았다. 작은 촛불에 불이 붙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수영의 생일 축하합니다.”
후. 촛불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선 위로 오래전 기숙사의 달빛이 겹쳐졌다. 그 여름밤, 쓰지 못한 편지들과 삼켜야 했던 질문들이 다시 피어올랐다. 나는 또다시 묻지 못한 채, 침묵만을 삼켰다.
“선물.”
그가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무선 이어폰이 들어 있었다.
“요즘 다 이거 쓰더라. 매일 이어폰 꽂고 다니던 네가 생각나서.”
“… 고마워. 잘 쓸게.”
그는 물었다.
“오늘 별일 없었지?”
“… 그냥 좀 힘든 하루였어.”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끝내 삼켰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할 텐데, 나 갈게.”
“…응.”
현관문이 닫히고, 손에 쥔 이어폰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상자에 넣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책상 앞에 앉아 랩톱을 켰다. 블로그에 접속해 ‘새 글쓰기’를 눌렀다. 타자를 두드리며 내 마음을 눌렀다.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끝끝내 나는 묻지 못했습니다
답을 듣고 싶지 않았던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답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전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대를 향한 말이었을까요
누구를 향한 마음이었을까요
삼겹살집에서 나와 혼자 가겠다는 수영을 택시 태워 보내고 현승과 둘이 남았다.
“한잔 더 할래?”
“그러자.”
작은 주점에 자리를 잡았다. 잔이 채워지자, 현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너는 어때?”
“뭐가?”
“수영이 말이야.”
순간 술잔이 멈췄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눈앞에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 아직은 잘 모르겠어.”
입에서 마음에 없는 말이 나왔다. 정말 몰라서가 아니었다. 굳이 감추려고 했던 건, 쓸데없이 현승을 배려하려는 내 습관 때문이었다.
현승은 나를 빤히 보다가, 잔을 비우며 말했다.
“난 수영이가 점점 궁금해. 그냥 좀 달라. 똑똑한 사람들은 빈틈이 없잖아. 근데 수영은 완벽한데, 또 어딘가 허전해 보여. 그게 이상하게 끌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현승이 입을 뗐다.
“다음엔 나, 수영이랑 단둘이 만나보려고 하는데, 혹시 서운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거야. 괜찮지?”
“…응,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조용한 방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냉장고 문을 열고 시원한 맥주 한 캔을 꺼내 열었다.
삼겹살집에서 수영이 했던 말이 맴돌았다.
“오빠는 나를 동생으로만 생각했어. 그냥 나 혼자 짝사랑이었지.”
그녀의 사랑은 어떤 얼굴이었을까. 아직도 우진을 향해 남아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끝난 걸까. 끝이라면, 이제 그녀 마음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맥주 거품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에 닿았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결국 컴퓨터를 켰다. 논문을 검토를 뒤로하고, 그녀의 블로그 주소를 입력하고 있었다.
‘기억너머, 이수영의 블로그입니다.’
새 글은 없었다.
다시 논문 파일을 열었다. 캔 속 맥주는 미지근해지고 있었다. 수영의 블로그에 들어가 습관처럼 새로고침을 눌렀다.
11시 10분. 3분 전에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는 사랑이었을까. 끝끝내 나는 묻지 못했습니다...
모니터 불빛 속 글자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연민일까, 호기심일까, 아니면 더 깊은 무언가일까.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이 뜨겁게 달궈지며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쪽지 하기’를 누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영… 안 자는 거야?”
쪽지를 보내고 나니 심장이 요동쳤다. 3초도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누구세요?”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눌렀다.
“나 재일이야. 잘 들어갔어?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었네.”
“재일아, 잘 들어갔어? 내 블로그 알고 있었구나?”
“응, 현승이 알려줬어. 나도 오늘 처음 들어왔어.”
작은 거짓말이 나왔다. 그녀의 답장을 오기를 기다렸다.
“… 우리 통화할까?”
덜컥, 온몸의 감각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답장을 할까, 내가 먼저 전화를 걸까. 망설이는 순간, 휴대폰 벨이 울렸다. 수영이었다.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어, 수영아.”
“재일아, 안 자고 뭐 했어?”
“논문 쓰느라. 데이터 정리하다 늦었어.”
“논문? 어떤 건데?”
“양자점 기반 반도체 소재 실험 중이야.”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거, 네이처에 실렸던 작년 논문 봤어? 그 연구 흥미롭던데.”
나는 얼떨떨했다.
“… 그거, 내가 참고문헌으로 쓴 거야.”
“정말? 와, 역시.”
그녀는 아는 게 많았다. 아니, 단순히 많이 아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떤 주제가 나와도 대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통화는 어느새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책 이야기로 흘렀다.
“재일아,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야?”
“셰익스피어.”
“정말? 왜?”
“희극이든 비극이든, 삶의 본질을 웃음 속에 담아내잖아. 인생은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그녀는 잠시 조용했다가 웃었다. 그 웃음이 새벽 공기처럼 맑았다.
“어머, 배터리 다 됐어. 우리 끊어야겠다.”
“그래, 잘 자 수영아.”
뜨거워진 전화기를 휴대폰 충전기에 꽂았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차오르는 마음은 더 이상 감출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