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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서로를 겨누는 네 개의 화살

안나 카레니나, 그리고 시작된 불꽃

by 아타마리에

2022년 7월 (by 수영)



늦잠을 잤다. 눈을 뜨니 벌써 아홉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젯밤 재일과의 통화가 새벽까지 이어진 탓이었다. 전화를 끊고도 밤의 여운에 붙잡혀 괜스레 책을 들추다 결국 날이 밝아 버렸다.

두통이 조금 올라왔지만, 눈가에는 웃음이 남아 있었다.


재일이랑 이렇게 오래 통화할 줄이야.


우진을 알던 열여섯 이후, 누군가와 몇 시간씩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가. 배터리가 꺼질 때까지 달아오른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내 모습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재일과의 대화는 놀라울 만큼 편안했고 거침이 없었다. 학계 이야기, 책 이야기, 사소한 농담까지. 취향에서 깊이로 이어지는 결이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문득, 어젯밤 집 앞에 서 있던 우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엔… 기억하고 있었네.'

그가 건넨 케이크 상자, 촛불, 그리고 선물.


나는 서랍 속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아 보았다. 낯선 감각이 불편하게 느껴져 금세 빼내어 다시 상자에 넣었다. 서랍을 닫는 순간, 오래전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2009년 봄, 불 꺼진 우진의 연습실에서였다.

“내 생일은 0719야. 내 휴대폰 비밀번호거든… 그런데 나한텐 생일이 행복한 날이었던 적이 없어.”

그날, 나는 처음으로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7월이 왔을 때, 우진은 밴드 공연 준비로 바빴다. 그리고… 내 생일은 그렇게 잊혔다.


연습이 끝난 늦은 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수영아, 나 지금 끝났어. 자고 있었어?”

“… 아니.”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 아니야. 몰라도 돼.”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은 참을 수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인데?”

“… 내가 말했잖아. 0719, 내 생일이라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 맞다… 수영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수없이 되뇌던 사과가 밤을 메웠던 그날, 나는 스스로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일을 보내고 있었다.




이불속에서 몸을 뒤척이며 중얼거렸다.

“그때나 기억하지 그랬어.”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휴대폰에 현승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영, 잘 잤어? 어제 즐거웠어.”

“응, 나도. 갑자기 불렀는데 다 나와줘서 고마워.”

“그러게. 항상 너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짧은 대화가 오간 후, 그가 물었다.

“수영아, 다음 주에 저녁 먹을래? 이번엔 우리 둘이 보자.”

나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멈췄다.

“연구실 일정 다시 보고 알려줄게.”

“난 평일도 괜찮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핸드폰을 내려놓고 잠시 고민했다. 부담스러운 감정이 드는 건 혹시 현승이 나를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단순한 친구로서의 만남일 수도 있지. 재일은… 어떻게 생각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저녁 말고 점심은 어때? 학교 근처에서.”


며칠 뒤, 학교 앞 초밥집에 앉아 현승을 기다렸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드는 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그가 보였다. 키가 크고, 말끔한 슈트 차림의 단정하지만 세련된 모습의 그가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수영아, 잘 지냈어? 괜히 바쁜데 만나자고 했나 봐.”

“아니야. 나도 학생들 시험 기간이라 채점이랑 뭐 이것저것 있네.”

웃으며 대답했지만, 대화 내내 창밖에 눈길이 갔다. 혹시 재일이 지나가진 않을까.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며 계속 거리의 얼굴들을 확인했다.


“우리 학교 앞인데, 재일이도 부르면 좋았을 텐데.”

무심코 내뱉은 말에 현승은 웃지 않았다.

“나는… 너랑 단둘이 얘기하고 싶었어.”

식당 안의 공기는 가벼운 듯 묵직했다.

“너랑 재일, 어릴 때부터 친구라 했지?”

“응. 같은 단지에서 살았어. 초등학교, 중학교, 학원까지.”

“그렇게 오래 알고 지내면 좀 달라?”

“… 달라. 뭐든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지.”

“간도 떼어줄 수 있는?”

현승이 웃으며 농담했지만, 나는 가볍게 웃지 못했다.

그는 계속 내 눈을 보며 물었다.

“수영아, 넌… 연애하고 싶다는 생각 없어?”

“연애? 음… 요즘엔 잘…”

“혹시 만나는 사람은?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잠시 숨이 막힌 듯했다.

“… 없어.”

생일케이크 앞 우진이 뇌리를 스친다. 그리고 어젯밤, 재일의 목소리도.


식사가 끝나자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현승은 환하게 손을 흔들었지만, 마음 한편은 더 무거워졌다.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재일 이야기를 많이 한 거지. 현승 앞에서까지…’

어제 새벽엔 재일과 몇 시간을 떠들어도 모자랐는데, 오늘은 아무 말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그 온도차이가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2022년 8월 (by 재일)


수영과 새벽까지 통화했던 날 이후, 나는 며칠 내내 그 대화를 떠올렸다. 전화를 다시 걸고 싶었지만, 명분이 없었다. 괜히 불편하게 만들까 망설였다. 결국 매일 그녀의 블로그만 들여다봤다. 그러나 새 글은 올라오지 않았고 기다릴 수 있는 건 독서모임뿐이었다.


그날, 책방 문을 열자 카운터에 서 있던 수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그 옆에는 우진이 있었다.

"재일아, 왔어?"

수영이 웃으며 반겼다.

"안녕하세요."

우진도 나를 보며 인사했다.

"네 형, 오랜만이에요."

"우진오빠도 우리 독서모임에 참여하고 싶대. 원래 책 좋아하거든."

"어, 사실은 내가 원년 멤버거든."


그의 웃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거슬렸다.


모임이 시작됐다. 수영이 책을 펼쳐 첫 구절을 읽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책방 안에 울려 퍼졌다. 흩날리던 공기는 차츰 가라앉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결국 안나가 선택한 건 사랑이잖아요.”

현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책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근데… 그게 정말 사랑일까? 그냥 사랑이라 믿고 싶었던 건 아닐까?”


우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야. 사랑이 맞을 거야. 어떤 사랑은 그냥 비극으로 끝나는 거니까.”


수영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는 생각 안 해. 사랑이라면… 적어도 버티게 해주는 힘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안나는… 그냥 현실이 싫었던 거야. 외로웠고, 무너지고 싶지 않으니까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지.”


나는 그녀를 바라 보았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단단히 반짝이고 있었다.

“사람마다 다르잖아. 누군가는 집착을 사랑이라 믿고, 누군가는 연민을 사랑이라고 하니까. 근데 나는… 적어도 안나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그냥 자기 상처를 붙잡은 거지.”


현승이 수영 쪽으로 시선을 옮겨 말했다.

“그래도 레빈과 키티는 달랐지. 서로 맞춰가면서도 끝까지 갔잖아.”

“맞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사랑도… 자기 안이 어떤 상태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채워져 있는 사람이 하는 사랑이랑, 텅 비어 있는 사람이 매달리는 사랑은 본질적으로 다르니까.”


모임이 끝난 후, 우진이 카운터에서 와인잔을 꺼냈다.

“그냥 가기 아쉽잖아. 우리 다 같이 한 잔 하자.”

선홍빛이 연하게 물든 네 개의 잔에 와인이 따라졌다. 붉은 파도가 잔마다 일렁였다. 수영은 잔을 들며 웃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뺨이 조금씩 붉어졌다.


“이번에 읽으면서… 진짜 타이밍 안 맞네, 싶더라.”

우진이 와인잔을 돌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수영이 조용히 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타이밍이라는 게… 사실은 핑계 아닐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 말은 누구를 향한 걸까. 우진? 현승? 아니면… 나?


우리 네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감상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감정의 화살이 서로를 겨누고 있었고, 이유도 모른 채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와인이 두 병쯤 비워질 즈음, 수영은 점점 말이 줄었다. 대화에도 끼지 않고, 하염없이 와인잔만 바라봤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빛에서 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와인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수영아, 괜찮아?” 현승이 물었다.

“…응. 나 그냥…”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술기운에 젖어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은 점점 고개와 함께 아래로 떨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우진을 똑바로 보았다.

“… 오빠, 차라리 우리… 남자 여자 사이로 일주일만 만나보자. 별로면 그만두고, 좋으면 그냥 사귀는 거야. 지금처럼 지내는 건, 나 이제 지긋지긋해.”


순간, 책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영의 얼굴에 번진 절망감이 나를 무너뜨렸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세요, 형.”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멈춰 섰다.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았다. 나는 가슴이 죄어오는 긴장 속에서 숨을 크게 삼켰다.


“그리고… 수영아.”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끝까지 말해야 했다.

“네가 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땐 나랑도 그렇게 하자. “


“둘 다 취했어?”

현승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목소리에는 억눌린 화가 섞여 있었다.

수영은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긴 머리가 와인빛처럼 어깨를 덮었다. 방 안 공기는 더는 숨 쉬기 어려울 만큼 무거워졌다.


"일어나. 데려다줄게."

우진이 비틀거리는 수영의 팔을 잡았다.


"아니, 우리 셋이 갈게요. 형도 취하셨어요."

현승이 우진 앞을 막아섰다.


우리 셋은 함께 택시를 탔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조용한 창밖 풍경만이 흐르고 있었다. 내내 눈을 감고 있는 수영이 우는 건지, 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손에 쥔 핸드폰만 내려다봤다.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했을 때, 택시에서 내려 그녀를 일으켰다.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렇게나 취했구나. 수영을 등에 업으니 그녀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현승은 내 옆을 걸어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수영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지 난감해졌다.

"수영아... 수영아! 집에 다 왔어. 일어나 봐."

나는 그녀를 깨우려고 했다.

"수영아, 들어가야지... 일어나자."

"으... 내 생일 0719"

비밀번호를 누르니 현관문이 열렸다. 어두운 집의 불을 켜고 수영의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뉘이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 내일이 되면 수영이 자존심 상할 것 같아서."

"그 형 앞이라서? 자존심? 수영이 창피할까 봐 그래?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건데? 그럼 너는, 너 마음은 어떤데?"

"나?"

나는 멈췄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진심이야. 나 수영이 좋아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현승은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내렸다.

"그래. 너 진심인 거 알아. 그럼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내가 수영이 만나고 싶다고 할 때."


현승의 뒷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불 꺼진 수영의 집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고백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그 말을 기억할까. 아니면 내일이 되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지워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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