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자리에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날 마신 와인의 탓인지, 삼십 분째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놓인 생수병을 집었다.
‘이거…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비로소 정신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동시에 어젯밤의 기억이 더듬듯 되살아났다.
안나 카레니나. 독서모임을 시작하기 전,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길 건너 책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우진은 밴드 연습에 가 있어야 했다.
문을 열자 볶은 원두 향이 코에 와닿았다. 커피 그라인더의 소음이 멈추고, 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수영이 왔어?”
“오빠, 왜 여기 있어? 밴드 연습은?”
“안 가려고. 나도 독서모임 하고 싶어서.”
“갑자기?”
“응, 예전에 우리 같이 책 읽던 것도 생각나고…”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갈린 원두를 머신에 넣고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우진을 넋 놓고 바라보다 말을 건넸다.
“책은 안 읽었을 거 아냐.”
“읽었어. 네가 지난주 들고 가는 거 봤어, 이 책.” 그는 커피가 든 잔을 내려놓고, 책을 들어 보였다.
모임이 시작되자 우진은 내 옆에 앉았다. 괜히 책장을 넘기며 시선을 피했지만, 발끝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신고 온 구두의 뒷굽을 들썩이며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작은 소음이 책방 안에 퍼져갔다.
요즘 들어 그와 얽힌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곱씹을수록 물음표만 늘어났다. 우진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 아니, 정작 흔들리는 건 내 마음일까. 곧 재일과 현승까지 도착할 텐데, 이 상황은 도무지 편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기억은 그 순간, 의도치 않게 잘려 나갔다. 잘라낸 테이프처럼 이후 장면은 통째로 사라졌다. 애써 떠올려보지만 독서모임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기억은 자꾸 희미해졌다. 나는 물을 벌컥 들이마시며 실처럼 가느다란 기억의 조각들을 붙잡으려 애썼다.
희미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결국 그 사랑은 파괴적이 되었지, 안나의 결핍처럼.”
우진의 목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그 한마디가 내 가슴을 찢어 놓았다. 오랜 시간, 깊게 그를 향해 쌓아 온 마음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을까.
와인이 따라지고 있었다. 네 사람의 잔이 번갈아 부딪혔지만, 나는 혼자서 잔을 연달아 비웠다. 붉은 와인이 눈앞에서 일렁일수록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잔 너머로 보이는 흐릿하게 번진 재일의 시선이 나를 겨우겨우 붙잡고 있었다.
“나도… 진짜 타이밍 안 맞네, 하면서 읽었어.”
우진의 또 다른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왜 그는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우리는 늘 그랬다. 그가 다가오면, 우리는 손만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리고 이내 그는 물러났다. 다시, 또다시. 남겨진 건 휘몰아치는 감정 속에서 혼자가 된 나뿐이었다.
“어쩜… 그냥 안나 카레니나 얘기일 뿐일지도.”
물 한 모금을 가까스로 넘기며 스스로를 달래려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내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이 나를 얼어붙게 했다.
“오빠, 차라리 우리… 남자, 여자로 일주일만 만나보자. 그러다 별로면 그만두고, 좋으면 사귀자. 지금처럼 지내는 건… 나도 이제 지긋지긋해.”
순간,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하…”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숨고 싶었다. 술기운 때문이야. 그래, 술 때문이었어.
‘내가…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 내 눈에 차갑게 굳은 표정의 우진이 들어왔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선이 겹쳤다. 재일이었다.
“그렇게 하세요. 형.”
단호한 재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수영아. 나도 기회 줘.”
갈색 눈동자가 나를 정면으로 붙잡았다.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형이랑 아니라고 생각되면… 그땐 나랑도 그렇게 해. 남자, 여자로… 일주일만 만나보자.”
그저 울고 싶었다.
거실로 나가 가방을 찾았다. 현관 신발장 옆에서 주워 든 휴대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세 통, 메시지 두 개가 떠 있었다. 모두 재일이었다.
수영아.
어제 술에 취한 것 같아서 나랑 현승이가 집에 데려다줬어. 일어나면 꼭 연락 줘.
숨이 막혔다. 차라리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른다. 창피하고 미안한 마음에 차마 전화를 걸 수가 없었다. 술김에 한 해프닝이었다고 해야 할까. 기억이 안 난다고 우길까.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곧 숨이 막혀 다시 기어 나왔다.
재일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그 말은 진심이었을까.
우진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아마도 놀랐겠지. 아니, 늘 그랬듯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 연락이 오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다.
내가 바라는 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정리되지 않는 기억과 감정의 파편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도망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띠리리,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
발신자: 김우진.
"해보자, 수영아. 일주일… 데이트 하자."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텅 빈 집에 불을 켜고 들어왔다. 우진에게 이야기하던 수영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무슨 용기로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샤워를 하는 내내 생각이 가시지 않아 찬물을 세게 틀었다.
“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컴퓨터를 켰다. 혹시나 해서 그녀의 블로그를 열었지만, 새 글은 없었다. 다시 창을 닫았다. 아마도 지금쯤 깊이 잠들어 있겠지.
눈을 감은 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대에 그녀를 눕혔을 때, 고요히 잠든 표정이 아직도 선명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서서 발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가자 이제.”
현승의 목소리에 비로소 몸을 돌렸다. 주방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그녀의 침대 옆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올려두었다. 달빛이 스며든 수영의 얼굴이 잔잔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복잡한 마음 위를 덮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인사했다.
‘잘 자, 수영아.’
아침에 일어나면 없었던 일이 될까. 그러나 눈을 떴을 때, 어젯밤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수영에게 연락이 왔을까 휴대폰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내려 산으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 위의 얼굴들이 흐릿하게 스쳐가다 이내 사라졌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산 입구에 와 있었다.
“헉… 헉…” 숨을 고르지 못한 채 걸음을 이어갔다. 생각을 멈추고 싶어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정상에 오르자 여름 햇살이 머리 위로 따갑게 쏟아졌다. 땀은 빗물처럼 흘러 어깨를 적셨다.
쏟아내고 나니 정신이 맑아졌다. 기억의 안개가 걷히자, 오히려 고백의 순간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수영은 지금 어떤 마음일까. 우진은 그녀의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얽혀버린 실타래 같은 우리. 그 앞날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생각을 지우려 다시 달렸다.
산을 거의 내려왔을 무렵, 메시지가 왔다. 기다리던 수영 대신, 메시지는 현승에게서 온 것이었다.
재일아, 저녁에 좀 보자.
우리는 자주 가던 맥주집에서 만났다.
"어, 여기."
현승이 먼저 와 있었다.
"좀 쉬었어?"
"나 테니스 치러 갔었어. 너는?"
"난 산에... 답답해서."
"수영이 연락 왔어?"
"아니. 넌 연락받았어?"
"나한테 할 일이 있겠냐..." 현승은 나직이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진짜 묘한 곳이야, 거기. 셰익스피어 책방. 그 안에 들어가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말도 다 하게 되고, 뭐든 다 이루어질 것 같잖아."
"맞아, 좀 그렇지..."
"처음에 너한테 독서모임 같이 가자고 했을 때, 사실 네가 나 좀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거든."
현승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응?"
"나랑 수영이... 우리 직장 후배가 수영이 SNS를 보여줬을 때 나 이미 얼굴도 알고 있었거든... 궁금해서... 꼭 만나고 싶더라고."
"그랬구나..."
아닌 척했지만 내심 놀랐다. 내가 아는 현승은 먼저 대시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무슨, 드라마 같지 않냐?"
"막장드라마?"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치며 마주 보고 웃었다.
"넌 어떻게 할 거야?"
현승이 물었다.
"나? 뭐, 말했잖아. 기다려봐야지."
"수영이를?"
"응. 둘이 어떻게 되든 나는 기다려보려고."
"대단하다, 너도."
현승은 맥주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답답하지 않아?"
"답답하지... 그런데 수영이가 더 힘들 것 같아. 나보다 더."
"맞아. 그럴 것 같아. 수영이도 쌓인 게 많아 보이더라... 우진 형은 진짜 별로야. 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 둘 사이에."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승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웃어줬다.
"미안해."
현승에게 처음으로 사과를 했다.
"뭐가?"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나도 그때는 잘 몰랐어… 너도 알잖아. 나 이런 거 잘 모르는 거…"
"괜찮아. 살다 보니 너랑 한 여자를 같이 좋아할 일도 있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근데 재일아, 나 신경 쓰지 마. 나는 너처럼 못 기다려, 어차피."
"..."
"그러니까 잘해보라고, 너."
"잘 안 될 수도 있어."
"그럼 뭐, 모태솔로 더 해. 일 년 더 하나 안 하나 똑같지 않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현승은 그런 친구였다. 밖으로 나가니 여름밤의 공기가 시원했다. 막다른 교차로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