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말로 할 수 없는
우진과 데이트를 하기로 한 일주일의 첫날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문자에 하루 종일 뒤숭숭했지만, 우리 관계가 끝으로 향할지 시작이 될지는 결국 일주일 뒤로 미뤄졌다.
아침부터 분주했다. 달궈진 고데기를 손에 쥐고 거울 앞에 서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무슨 옷을 입어야 할까’라는 생각뿐이었다. 문득 떠오른 건, 첫 고백을 했던 그날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크리스마스, 그와 만날 설렘에 옷장을 뒤적이던 그 전날 밤의 나. 지금의 나는 그때와 같은 마음일까.
옷장 속엔 특별한 옷이라곤 없었다. 학회나 세미나에서 입던 무채색 옷들뿐, 원피스를 꺼내려다 이내 다시 옷장을 열어 평소 즐겨 입던 청바지와 반팔티, 하늘색 세로줄 셔츠를 꺼냈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결국 다시 묶었다. ‘이게 최선인가.’
낯선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섰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린 날, 정작 준비하지 못한 사람처럼.
주차장에 도착하니 우진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아, 나왔어?”
“응, 오빠. 많이 기다렸어?”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그는 뒷좌석에 있던 종이봉투를 들어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침은 먹었어? 빵 좀 사 왔어. 가는 길에 배고프면 먹어. 커피도.”
그가 내민 테이크아웃 컵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 김이 입술에 닿았다. 익숙한 다정함에도 나는 늘 처음처럼 설레었다.
"오빠,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비밀이야."
그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2시간 남짓을 달린 우리의 목적지는 속초였다.
”너랑 바다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하려고. 나 일주일 데이트 계획 짜느라 밤샌 거 알아? 대한민국에 갈 데 참 많더라. 진작에 좀 갈걸. “ 괜히 들뜬 듯 설레는 그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녹아내렸다.
속초에 도착했다. 바닷가 앞 도로변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가을이 시작되려는지 하늘이 제법 높았다. 푸른 하늘 아래 더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파도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해변에 다다르자 나는 신발을 벗고 청바지 자락을 걷어 올렸다. ‘바다에 올 줄 알았으면 다른 옷을 입고 오는 건데.’
“들어갈 거야? 그럼 나도 벗어야지.”
우진이 다가와 신발과 양말을 벗었다.
파도는 바람을 타고 높게 일렁였다. 나는 다가갔다가, 물결이 밀려오면 놀라서 한 발 물러섰다. 잠시 물결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채 파도에 휩쓸려 옷이 흠뻑 젖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우진의 웃음소리가 파도보다 크게 터져 나왔다.
우리는 바닷가를 걸었다.
"오빠, 요새는 어때? 밴드는?"
"좋아. 에이전시들한테 연락이 많이 오는데, 아마 이제 결정을 할 때가 됐나 봐... 계속 미루기도 눈치 보이더라고... 애들도 힘들어하고."
"소속사가 있으면 좀 낫지 않아?"
"자유롭지 않잖아. 바빠지기도 할 거고... 나는 연습 끝나고 너랑 책방에서 노는 게 재밌었는데..."
우진이 말끝을 흐렸다.
"근데 솔직히 요샌 나보다 수영이 네가 더 바빴어."
"그랬나?"
"응, 책방에서 너랑 둘이 책을 본 게 언제였더라…"
"좀 바빴나 봐…"
나는 모르는 척 말했다.
"근데 수영아, 재일이랑은 이야기했어?"
우진오빠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난 불편한 마음을 내비쳤다. 순간 아직도 재일에게 답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진은 뭔가를 더 말하려던 눈치였지만, 이내 말을 멈췄다.
우리는 말없이 해안 길을 따라 걸었다. 길 끝에 다다르자 작은 상가의 횟집이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사람들이 북적였다. 간신히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물회 하나랑 오징어순대 주세요.”
우진이 주문을 하고는 물컵에 물을 따르며 젓가락을 내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여기 유명한 집 이래. 검색해 보니까 평도 좋더라.”
들뜬 우진의 목소리가 어쩐지 익숙했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이 끝난 주말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토론토 시내로 향했다. 특별할 것 없는 식사와, 즉흥적으로 찾은 작은 길거리 공연이 전부였는데도, 그때마다 그는 늘 이렇게 들떠 있었다.
기억 속 소년이, 지금 내 앞에서 웃고 있었다.
음식이 나왔다.
"먼저 먹어봐, 수영아."
나는 물회를 한 젓가락 입에 넣었다.
"맛있어, 오빠."
내 반응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눈웃음 아래 작은 점이 빛났다. 그 웃음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 목소리 하나로 하루가 채워지던, 그때의 나를 떠올렸다.
식사를 끝내고 나와 우리는 동네를 걸었다. 내 걷는 속도에 맞춰 걷던 그의 손끝이 내 손끝에 닿았다. 다시금 옛 생각이 났다. 눈이 펑펑 오던 추운 겨울날, 우리는 장갑을 한 손씩 나누어 꼈다. 나는 오른손에, 우진은 왼손에. 장갑을 끼지 않은 나의 왼손과 그의 오른손이 스쳐 닿을 때마다 '그가 내 손을 잡을까', '내가 그냥 잡아버릴까' 한참을 고민했던, 떨리던 내 손끝의 감각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오늘 스치는 우리의 손끝. 나는 손을 들어 내 주머니에 넣을까 생각했다. 그때, 우진이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시선은 앞을 향한 채로, 내 손을 꽉 잡았을 때, 심장이 두 배쯤 빠르게 뛰었다. 설렘이라기보다 불안에 가까운 심장박동이었다. 일주일 뒤에도 이 손을 잡고 있을까. 생각이 문득 지나가자 발끝이 잠시 흔들렸다.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의 손에 이끌려, 나는 그렇게 앞을 보며 막다른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 걸었다.
늘 그랬듯이 연구실에서 돌아와 빈 집의 불을 켰다. 오늘따라 텅 빈 집이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술에 취한 수영을 데려다준 그날 밤 이후로, 그녀에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몇 번의 메시지를 더 보냈지만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후회 아닌 후회를 수만 번 되뇌었다. 나도 알지 못했던 내 진심을, 이런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전했다는 게… ‘하아… 바보 같은 놈.’
수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자책했지만, 한편으론 서툴렀던 내 표현에 대한 그녀의 반응이 더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와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블로그에도 며칠째 새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수영’ 한 번, 두 번, 세 번의 전화벨이 울린 뒤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영아, 나야 재일이.”
“어, 재일아…”
그녀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 연락이 없길래…” 막상 전화를 걸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응, 연락 못해서 미안해.”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른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무슨 말이었을까.
“재일아, 나 오늘 우진오빠 만났어.”
“그랬구나. 형이랑 이야기는 잘했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물어야 했다.
“어… 나… 일주일 만나보려고.”
이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날 밤 일을 잊기를 바랐었을까. 나는 순간 기운이 빠졌다. 일주일이 지나면 그녀는 결정을 내리기는 할까? 나에게도 기회가 돌아올까?
“그… 수영아. 그날, 진심이었어?”
“사실 재일아, 나 잘은 기억이 안 나. 왜 그랬었는지…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해야만 했었나 봐.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어.”
“…”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재일아…”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이어갔다.
“그… 그때 네가 한 말, 그냥 없던 말로 해주면 안 될까? 나… 너무 혼란스러워, 사실.”
“…”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 내가 너 마음까지 생각할 여유가 안 될 것 같아, 지금은…”
“그래…”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아직 너를 친구로 잃고 싶지 않아… 이렇게 너랑 어색해지고 싶지 않아.” 그녀가 조금씩 울먹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말 취소해 줘. 부탁이야… 알아, 나도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지는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문득 서운한 마음보다, 혼자 눈물 흘릴 그녀가 안쓰러워 가슴이 조금씩 시렸다.
“아니야, 수영아. 내가 그렇게 말해서 너도 힘들었구나.”
“미안해, 재일아. 내가 너를 헷갈리게 했나 봐. 나 사실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래도 너랑 이렇게 멀어지는 건 싫은데…”
수영의 호흡이 조금씩 짧아지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내 마음에 비처럼 내렸다.
“수영아.”
“응.”
나는 감정을 가다듬고 말하려고 했다. “정말 미안한데, 나는 없던 이야기로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그냥 마음속에 묻어버려, 내가 한 말은. 네가 마음이 편해지는 날, 다시 이야기할 수 있게… 나는 기다릴게.”
“재일아…”
“그리고 그게 언제가 되었든, 어쩌면 그때가 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지금처럼 네 옆에 가까운 친구로 남아있을게.”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그 정도는 괜찮다고 해줘. 그리고 지금은 나 신경 쓰지 말고 우진이 형 만나봐.”
“…”
“너도 너 마음을 알아야 하잖아.”
나는 끝까지, 하려던 말을 전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흐느끼던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나도 조금씩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의 울음소리가 완전히 그칠 때까지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마워…”
“괜찮아?”
“응.”
“다행이다.”
“뭐가?”
“아니야. 내일은 뭐 해?”
나는 주제를 바꾸려고 했다.
“강의 있어서 학교 가. 내 학생들 연구도 봐줘야 하고…”
“그래.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불러. 나 심심해서 그래.”
“알겠어. 재일아.”
“그래, 건강하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알았다. 다시는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가장 짧고도 격렬했던 시간, 연애조차 몰랐던 스물여덟 해의 공백을 채워 버린 몇 달이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기약 없는 기다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