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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그건, 사랑이었을까

한겨울날의 커피

by 아타마리에

2022년 9월 (by 수영)



재일과의 통화 내내 고통스러웠다. 가슴속에 불길이 서서히 번져와 눈물을 참아내지 못했다. 괜히 그 말을 꺼내 그를 혼란스럽게 한 건 아닐까, 그의 마음을 외면해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상처를 남긴 건 나였으니, 찔려오는 아픔도 결국 나여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을 온전히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결국 우진을 만나야 했다. 오래도록 체한 듯 막혀 있던 마음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오래된 상처로 물든 시간 속에, 과연 사랑은 있었던 걸까. 있었다면, 아직도 남아 있는 걸까. 나는 그것을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우진과의 두 번째 데이트를 하루 앞두고, 속초에서 내 손을 잡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손길이었음에도, 그 온기는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마치 식어버린 한겨울날의 커피처럼.


강의를 마치고 나왔을 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영아, 끝나면 책방으로 와.”


셰익스피어 책방. 문을 열자 익숙한 커피 향과 은은한 살구빛 조명 아래 우진이 서 있었다.

“왔어? 7시 연극 예매했는데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여기서 저녁 먹고 바로 가자. 새로 생긴 베이글 가게에서 사 왔어.”

그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양손을 들어 포장된 베이글을 들어 올렸다. 베이글 봉투가 흔들리며,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듯했다.




고등학교 시절.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다 보면, 밴드 연습을 마친 우진이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수영아, 저녁 안 먹었지?”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학교 앞에서 이거 사 왔어. 베이글. 넌 맨날 밥도 안 먹고… 이러다 큰일 난다.”


도서관 휴게실에서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던 시간. 그 순간이 기다려져, 기숙사 식당에도 가지 않은 날이 많았다. 허기를 견디며 앉아 있던 건, 혹시 그가 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시는 샌드위치를 사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기다림은 당연했다. 그의 발걸음 하나, 말 한마디가 내 하루를 채우던 시절이었기에. 그때는 그랬다.



“수영아! 무슨 생각해? 빨리 먹자.”

우진은 커피를 건네며 웃었다.

“오빠, 무슨 연극이야?”

“맞춰봐. 힌트는 우리가 같이 읽은 책.”

“위대한 개츠비?”

“아니, 오만과 편견.”

“와… 진짜?”

“응. 네가 꼭 읽어보라고 했잖아.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


공연이 시작되자 숨이 막힐 듯 벅차올랐다.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된 기억 때문이었을까. 배우들이 대사를 읊을 때마다 파도처럼 쓸려 내려갔다.


다아시의 대사가 울려 퍼졌다.

“당신을 얼마나 간절히 흠모하고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기숙사 책상에 앉아, 나는 그 구절을 하늘색 쪽지에 수없이 적었다가 지웠다. 손바닥의 땀이 종이를 구기고, 번진 잉크가 글자를 지워냈다. 결국 쓰레기통에 던져진 쪽지들. 건네지 못한 말이 되어, 방구석에서 구겨진 채 쌓여갔다. 그날 책상에 엎드려 흐느끼던 열여섯 살의 소녀가 눈앞에 겹쳐졌다. 나는 무대 위의 대사가 아니라, 그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깨에 손을 얹어 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운 열여섯 살의 나를.


공연이 끝났다. 커튼콜이 이어지는데도 나는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온몸이 먹먹해진 나머지, 박수를 칠 힘조차 없었다.

“공연 어땠어?”


“좋았어…”

숨을 삼키며 짧은 대답을 작게 내뱉었다.


우진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게 다야? 너 맨날 다아시가 어떻고, 엘리자베스가 어떻고, 쫑알쫑알 떠들었잖아. 난 솔직히 그거 듣는 재미로 살았는데.”


나는 그를 따라 웃지 못했다. 공연장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고, 대학로의 밤거리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나부꼈다. 바람결이 공연의 여운을 몰아내듯, 가슴속 빈틈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그러자 우진은 말없이 재킷을 벗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우리는 긴 시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찬 공기 사이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마침내 둘의 발자국 소리만이 공기 속에 남았을 때,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오빠, 있잖아.”

“응, 수영아.”


짐작이라도 한 듯,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한동안 말을 고르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단단한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 마. 후회할 거야.’ 하지만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텅 빈 마음으로 일주일을 채우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어?’ 어느새 숨이 가빠지고,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

“… 뭐?”

“내가 오빠를 혼자 좋아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우리 사이가… 그 연장선에 있다고 착각했던 것 같아.”


우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억눌린 말을 끝내 토해냈다.


“우리가 너무 편하고, 가족 같고, 익숙해서…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아. 근데… 난 이제 더 이상, 그때처럼 심장이 뛰질 않아.”


그의 눈가가 젖어들었다.

“수영아… 왜 그래.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왜…?”


나는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궜다.

“… 우리, 더는 데이트 못할 것 같아.”


정적이 흘렀다. 바람소리만 스쳐갔다.

“그럼… 그냥 예전처럼 지낼 수는 있는 거야?”


흔들리는 우진의 목소리와 어린아이처럼 불안한 눈빛을 나는 외면해야만 했다. 열여섯의 흐느끼는 소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아니잖아.”


나는 천천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눈이 펑펑 오던, 첫 이별의 그날처럼, 무거운 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 외롭기만 했던, 차가운 눈밭 위에서 버티던 그 시절의 나. 처절하게 매달려 있던 내 사랑의 기억 끝에는 그가 아닌, 그를 사랑했던 내가 서 있었다. 그토록 질기게 매달렸던 사랑은 정말 그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 그건 사랑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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