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우진에게도, 재일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대신 미뤄뒀던 연구 프로젝트들을 시작했고, 논문 작업에 몰두했다. 사람들과의 소통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휴대폰은 늘 무음이었다. 독서모임을 사정상 그만둔다고 공지했을 때, 현승에게 한 번 연락을 받았다.
“수영아, 이제 우리 독서모임 안 하는 거야?” 그가 물었다.
“어, 현승아. 미안해, 내가 사정이 생겨서…”
“그럼 언제 다시 할 수 있는 거야?”
“글쎄… 잘 모르겠어. 다시 시작하게 되면 그때 말해줄게.”
기약이 없는 대답을 했다.
“수영아… 재일이 힘들어해…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주말이면 나는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해가 잘 들지 않는 구석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늘 그렇듯 두꺼운 책을 골라 읽다 보면 시간이 가곤 했다. 나는 그렇게 혼자가 되고 싶었다. ‘외로움’ 나는 그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외로움이 다른 감정과 만나 변질되어 버리지 않도록. 그것이 연민으로, 집착으로, 파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차라리 이 아픔을 끝까지 느끼다 보면 언젠가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지냈던 시간은 나의 첫 외로움이었다. 아빠는 일 년에 단 하루, 나를 보러 오셨다. 아빠가 오신 날엔,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 한참을 이야기했다. 대화가 끝나면 화가 난 표정으로 방에서 나와 나를 데리고 나가셨다. 외식을 하고, 아빠가 사주는 장난감을 들고 다시 할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단 몇 시간을 함께 보내고, 다시 아빠는 떠났다.
아빠가 다녀간 날에는 할머니에게 아빠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 나는 아빠가 있는데 왜 아빠가 집에 없어? 다른 친구들은 아빠랑 같이 살던데…”
“누가 묻디? 그냥 아빠도 죽었다고 해라! “
그날 이후 나는 할머니에게 엄마에 대해서도, 아빠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다.
차라리 아픈 기억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을 치유할 수 있었을까.
외로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할머니는 혼자 금은방을 운영하셨다. 금은방 구석 낡은 소파에 앉아 매일 들어오는 손님을 구경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갔다.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한 화장을 한 손님들이 드나들 때마다, ‘우리 엄마도 저렇게 생겼을까…?’ 그렇게 내가 그린 엄마는 매번 다른 얼굴을 가졌다.
6살이 되던 해에, 거짓말처럼 아빠가 내 앞에 나타났다. 할머니와 대화를 마친 후, 아빠가 가져온 커다란 캐리어에 내 옷가지와 몇 개의 장난감을 담았다. 그날 아빠를 따라가던 내 뒤에서, 할머니는 펑펑 우셨다. 나는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지 않았다.
아빠와 함께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하는 내내 아빠는 말이 없었다. 아빠와 나의 집은 토론토 다운타운 근처의 작은 아파트였다. 나는 영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고 학교에 입학했다. 모든 것은 낯설었다. 아빠도, 집도, 학교도, 친구들도…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회사에 나가는 아빠의 퇴근시간까지, 학교에서 제공하는 방과 후 돌봄 서비스에 남아야 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 함께 스포츠를 하거나, 놀이터에 나가 놀곤 했다. 그때 나는 항상 강당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다.
“저기 있는 아이… 우리 반 Sue야. 맨날 혼자 있는데, 같이 놀자고 물어볼까?”
“책 읽고 있잖아. 방해하지 말고 그냥 가자.”
책을 읽고 있으면 누구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단절은 그리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인 것이 익숙해졌다. 우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는지 모른다. 그를 알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외로움을 떨쳐내고 싶었다. 우리는 매일 함께였다. 어린 시절 동안 가슴속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둔 이름 모를 감정들이, 그를 만나며 하나씩 깨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주고받지 못할 때, 혼자인 나는 더 처절한 동굴 속을 향해 갔다. 사랑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을까? 열여섯의 소녀가 스물여덟의 나에게 다시 되물었다.
곧 문을 닫는다는 도서관 안내방송을 듣고, 책을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다. 찬 공기가 얼굴에 스쳤다. ‘겨울이구나…’ 다시 차가운 계절이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익숙한 그 길을 걸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우진이 있을 셰익스피어 책방을 바라보았다. 책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커피 향이 나는 그 공간에, 살구색 조명 아래 아마도 그가 서 있겠지. 나를 향해 미소 짓던 그의 얼굴이 흐릿하게 맺혔다. 잠시 멈춰 섰다가, 나는 그냥 지나쳤다. 늘 같은 자리에서 그를 기다렸던 나는 이제 그 자리에 없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사랑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었다는 것을. 끊임없이 그의 사랑을 원했지만, 결국 나를 더 외롭게 하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에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더 아프게 할 수 없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겨울이 싫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앞만 보고 걸었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냉기가 스며든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빠른 템포의 캐럴이 흘러나오고, 거리는 온통 색색깔의 장식들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반짝이는 장식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사랑에 빠지는 마법의 나라가 있다면, 이런 모양일 거라 생각했다.
버스 정류장에 섰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 앞에 장갑을 나눠 낀 연인들이 서 있었다.
“자기야, 크리스마스 때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남자가 물었다.
“글쎄, 우리 뭐 하지? 명동 갈까? 사람이 너무 많으려나? 그러면… 대학로?”
여자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같이 있으면 뭔들.”
피식 웃으며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차가운 뺨을 녹였을까.
겨울 공기 속에 따뜻한 기운이 번져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버스의 문이 열리는 순간, 문득 생각이 스쳐갔다.
나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길었다. 수영과의 마지막 통화 이후 3개월이 지났다. 나는 그녀에게 무작정 기다리겠다고 말했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나의 일상은 다시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갔다. 집, 연구실, 또다시 집. 주말이면 산에 올라 하늘을 보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 했다. 독서모임은 무기한 중단되었고, 현승은 홍콩 파견을 신청했다. 독서모임을 위해 샀던 고전 문학책들 위로 먼지가 쌓여갔다.
나는 학교에서 그녀와 마주치기를 바랐다. 그녀와 함께 갔던 학교 앞 일식집과 생화학 연구실 근처에서 이유도 없이 서성였다. 무심하게도,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가슴속에 뜨거운 독성 가스가 차오르는 것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창백해져 갔다. 그리움,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텅 빈 집에 불을 켜는 게 싫어서, 나는 늘 연구실에서 마지막으로 퇴근했다. 앉아서 논문을 정리하다 보면, 책방에서 나를 바라보던 붉은 와인빛 수영의 얼굴이 다시금 아른거렸다.
“야, 아직 안 들어갔어?”
연구실 동료 제희가 들어왔다.
“어, 집에 간 거 아니었어?”
“아, 두고 간 게 있어서. 너 근데 요새 무슨 일 있어? 좀 아파 보이네… 집중도 잘 못하는 것 같고.”
“그냥, 머리가 아픈 일이 좀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녀는 내 옆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쯥, 하아.”
“뭔데 그래, 말을 해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뭐? 네가? 너 연애하냐?”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연구실에서 나는 동료들에게 늘 놀림을 받았다. 지금까지 연애 한 번 못해본 게 말이 되냐고, 눈이 높아서 그런 거 아니냐고,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하자가 있는 게 아니냐고.
“아니, 연애 안 해…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뭐? 야, 너 스물여덟이야. 가서 말을 해봐.”
“…”
“사정이 있어? 그 사람 남친 있어? 아니면 유부녀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왜 말을 못 하냐, 너. 너 정도면 진짜 괜찮지 뭐.”
“말했어.”
“그런데 왜?”
“지금 그 사람 상황이 좀 그래…”
“야, 그런 게 어디 있어. 여자들은 좋으면 다 좋다고 그러지. 그거 핑계일 수도 있어.”
“야.”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이상한 소리 할 거면 그냥 가라. 나 심란해…”
“알았어. 간다. 갈게.”
‘알지도 못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의 눈동자를 그려보았다.
크리스마스 때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하남행 버스를 탔다. 집으로 가는 길, 어제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하얀 눈송이들이 눈이 부셨다. 아빠 엄마는 늘 나를 지원하는 든든한 서포터였다. 하남에서 작은 쪽갈비집을 20년째 같은 자리에서 운영하시며, 나와 남동생 교육비를 마련하셨다. 부모님은 단 한 번도 나를 질책하거나 나무라신 적이 없었다. 꼴랑 공부 하나 잘하는, 말없고 무뚝뚝한 아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모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때 나는 자취방으로 나왔다. 본가에 왔다 갔다 하기 불편하다는 핑계로. 처음엔 2주에 한 번 반찬을 가져다주러 엄마가 오셨다. 내가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생활한 뒤로는 엄마의 반찬을 먹을 일이 없었다. 나는 엄마의 따뜻한 밥이 그리웠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가게로 곧장 걸었다. 눈이 녹아 얼어붙은 길 위는 아직 미끄러웠다. 오래된 상가의 한쪽 구석에는 부모님의 쪽갈비집이 있었다. 낡은 목재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초등학교 때, 아빠와 나는 나무를 자르고 깎아 저 간판을 만들었다. 한쪽 귀퉁이가 썩은 저 오래된 간판이 반가웠다.
입구로 들어서니 카운터 앞 작은 전기난로 앞에서 엄마는 손을 녹이고 계셨다.
“엄마.”
“재일아!~”
엄마는 뛰어나와 나를 꼭 안았다. 서른이 다 되어가는 아들이 집에 돌아오는 게 항상 이리도 반가우실까. 매번 볼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는 주름이 하나씩 늘어갔다.
“아빠는?”
“아빠 잠깐 뭐 사러 갔어. 금방 오실 거야… 온다고 미리 말하지 그랬어…”
“어, 오늘 알바생은?”
“알바생 며칠 전에 힘들다고 그만뒀어. 으유, 정말 요새 애들은 끈기가 없어.”
“어떡하냐, 엄마. 너무 고생이네.”
“재현이라도 빨리 제대를 해야 이런 날 부려먹지.”
우리는 같이 웃었다.
아빠가 돌아오셨고, 나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게 테이블에 앉았다. 숯불이 타들어간다. 아빠는 정성껏 고기를 굽고 계셨다.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요새 연구실이 바빠?”
엄마가 말했다.
“응, 좀 바빴지 뭐…”
“지도교수님은 잘해주셔?”
“응, 잘해주셔. 가게는? 요새 바빠?”
“글쎄, 불경기라 요새는 전만큼 사람이 없네… 알바 구하기도 힘들고.”
엄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재현이는 전역이 한참 남았어?”
“응… 내년 7월인가 8월인가…”
“선혜는? 요새 안 와? 가끔 일 도와주고 그랬잖아.”
나는 동생의 오래된 여자친구 안부를 물었다.
“선혜 안 온 지 오래됐어. 반년은 넘었을걸…”
아빠가 말했다.
“헤어진 거 아니야? 재현이한테 물어봤어?”
“어떻게 물어보니… 군에 있는 애한테. 혹시 헤어졌으면 어떻게 해…”
엄마는 항상 그랬다. 엄마의 궁금증이나 욕심보다는 아들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는, 그런 고마운 엄마였다.
“넌 연애는? 안 해?”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표정을 감추며 말했다.
“진짜? 누군데?”
엄마 아빠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있어. 근데 그 사람은 아직 나를 안 좋아해.”
우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랬구나… 힘들어?…”
엄마의 한마디가 나를 위로했다.
“아니, 괜찮아. 처음이라…”
“누군지는 몰라도, 그 아가씨는 아마 엄청 멋진 사람이겠다. 기다려봐, 좋은 소식 있을 거야. 엄마는 그렇게 생각해.”
엄마는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러게, 우리 아들 누가 싫어하겠어. 인물 훤하고, 공부 잘하고…”
아빠도 거들었다.
부모님이 연신 구워주시는 고기를 입에 넣었다. 이미 나는 배가 부른 것 같았다. 지금 상태라면 나는 조금 더, 아니 훨씬 오래, 그녀를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