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전화가 남긴 것
“안녕하세요. 504호 주민인데요. 난방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확인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부탁드려요…” 인터폰을 내려놓았다.
“하… 추워…” 입김이 새어 나왔다. 핫팩 몇 개를 흔들어봤지만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몇 주 전부터 있던 감기 기운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대학교는 겨울방학 중이었다. 학교 연구실에 나가지 않아도 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학생들 논문을 검토하고, 내 논문 발표를 준비했다. 새벽엔 미국과 공동 연구 프로젝트 화상회의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며칠째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계속 깨어 있었다. 심해지는 감기에도 불구하고, 바쁜 일정의 압박 때문에 병원에 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콜록콜록. ‘기침은 왜 이렇게 안 나을까.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야 하나’ 잠시 생각했지만, 밖은 한파로 영하 10도였다. 혼자서 밖에 나갔다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약을 좀 사둘걸 그랬어.” 부엌 수납장을 열어 약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어보니 타이레놀뿐이었다. 다시 상자를 닫았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옷장을 열어 패딩점퍼를 꺼내 입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 다시 부엌으로 나가 물을 끓였다. 따뜻한 카모마일 티를 머그컵에 담아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환기를 시켜볼까 해서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갔다. 쌓이고 또 쌓여 꽁꽁 얼어붙은 이 겨울 눈발처럼, 내 블로그도 수개월간 얼어 있었다. 문득, 블로그에서 재일에게 쪽지를 받았던 날이 생각났다. ‘재일은 뭘 하고 있을까?’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기억 너머’ 이수영의 블로그. 차를 한 모금 마시니 몸이 더 뜨거워진다. ‘새 글쓰기’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한 글자씩 타자를 쳤다.
멈춘 시간
도서관 유리창 너머, 늦은 오후의 해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
텅 빈 와인잔도, 이미 자취를 감춘 햇살도, 순간이 주는 고요 속에서 위로받는다.
세상은 잠시 멈춰 있었다.
잠시 멈춰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왔다.
‘으, 너무 추워.’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컴퓨터를 끄고, 패딩 점퍼를 입은 채로 침대 속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을 보며 침대에 누워, 덮은 이불에 의지해 추위를 달래려 했다. 적막만이 흐르는 작은 이불 안에서, 나는 내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몸이 뜨거워질수록, 몸을 펼 수도 없을 정도의 극한 추위를 느꼈다. 이불 가장자리를 쥐고 몸을 웅크렸다.
점점 머리가 둔해졌다. 눈앞에 두꺼운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해졌다. 침대 옆 탁자에 휴대폰이 보였다. 그것을 잡으려 했는데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아.’ 있는 힘껏 몸을 돌려 팔을 뻗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아.’ 최근 통화 목록에서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눌렀다. 눈앞이 흐려 번호도 보이지 않았다. 통화 신호가 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갔다.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목록에서 다음 이름을 눌렀다. 점점 아득해지는 신호를 들으며 눈이 감기고 있었다. “여보세요. 수영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재일아…” 귀가 먹먹해져 왔다.
“수영아!”
“재일아… 지금… 와줄 수 있어…?”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만날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시간.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같은 글들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씩 되풀이해 읽었다.
수영의 블로그에 씌여진 단편적인 문장들은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는 파편이었다. 나는 그 파편들을 붙잡으며, 조금은 그녀와 가까워졌다고 착각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겠지만.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멈춘 시간
도서관 유리창 너머, 늦은 오후의 해가 지고 어둠이 시작되는 시간.
텅 빈 와인잔도, 이미 자취를 감춘 햇살도, 순간이 주는 고요 속에서 위로받는다.
세상은 잠시 멈춰 있었다.
‘수영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떠오르는 건 언제나 그녀의 집 앞 풍경이었지만, 나는 끝내 그 문 앞까지 가지 못했다.
컴퓨터를 껐다.
“휴.” 속이 타서 냉장고를 열었다. 텅 빈 냉장고엔 오늘따라 맥주가 없었다.
‘나가서 사 와야겠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현관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띠리리링.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자는 수영이었다.
나는 다급히 집 안으로 들어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영아.”
“재일아…”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직감했다.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수영아!”
“재일아… 지금… 와줄 수 있어…”
나는 신발을 구겨 신었다. 현관문을 닫기도 전에 뛰어내렸다. 큰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신림동이요!”
퇴근길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시간이 늘어지는 사이 다리는 떨렸고,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저씨, 제발 빨리 가주세요…”
“길이 미끄러워서 더는 못 밟습니다.”
답답함에 손가락으로 창문만 두드리다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단지 앞에서 내려주세요.”
택시 문이 닫히기도 전에 몸을 내던졌다. 빙판 위를 전속력으로 달려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가 느리게 올라가는 동안,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그녀의 집 앞.
“비밀번호… 0719.”
술에 취해 내게 속삭이던 그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떨리는 손끝으로 숫자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안에 수영이 쓰러져 있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의식이 없었다. 이마에 손을 얹는 순간, 불덩이처럼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수영아, 수영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그녀를 업었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수영의 가늘고 긴 숨이 내 어깨에 닿을 때마다 불길에 휩싸인 듯 뜨거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다 경비와 마주쳤다.
“아저씨, 택시 좀 불러주세요! 사람이 쓰러졌어요!”
곧 택시 문이 열렸고, 우리는 응급실로 달려갔다.
“헉, 헉…”
문이 열리자마자 의료진이 뛰어나와 그녀를 이동식 침대에 옮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등줄기를 따라 흘러내린 땀이 바닥을 적셨다.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 있었다.
“이수영 씨 보호자님.”
간호사가 불렀다. 나는 그녀를 따라 중환자실 복도 끝에 섰다. 유리창 너머, 수영이 누워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시렸다.
곧 의사가 다가왔다.
“폐렴으로 인한 감염이 전신으로 퍼져 패혈성 쇼크가 왔습니다. 항생제와 약물 치료로 혈압을 잡고 있어요. 염증이 가라앉으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차오르는 눈물을 억누르려 애썼다.
간호사가 서류를 내밀었다.
“보호자님, 입원 동의서에 서명 부탁드립니다. 성함도 기재해 주세요.”
나는 펜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을 서류의 가장 위, ‘보호자 성명’ 란으로 가져갔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컥 차오르는 무언가와 함께, 나는 천천히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신재일.
중환자실은 면회가 되지 않았다. 목이 말라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그때 멀리서 누군가가 뛰어오는 게 보였다. 우진이었다.
“재일아! 수영이는…?”
“중환자실에 있어요. 상태가 안정되면 일반 병실로 옮길 거예요. 그런데 형,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수영이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연습 중이라 못 받았어. 부재중을 보고 다시 걸었는데도 안 받더라고. 뭔가 불길한 기분에 집에 찾아갔더니, 경비아저씨가 알려주셨어.”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순간 가슴 한쪽이 얼얼해졌다. 수영이, 나보다 먼저 형에게 전화를 했구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폐렴이었어요. 감염이 퍼져서… 당분간은 입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우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 그렇구나.”
그리고 곧 프런트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류는 다 됐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제가 다 사인했어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