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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실체 없는 그리움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by 아타마리에

2023년 1월 by 수영



“혈압 28에 측정불가!”


다급한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온다. 귀가 막힌 듯 먹먹했다. 감긴 눈 사이로 번쩍이는 불빛이 스쳤다.


그리고 아주 멀리서,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수영아, 수영아!”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멈춰버린 시간, 팔과 다리의 감각이 하나씩 꺼져 갔다. 손끝과 발끝이 점점 돌처럼 굳었다.


어둠이 천천히 눈꺼풀을 덮어왔다.


바람이 차다. 아무 외투나 손에 잡히는 걸로 입고 나온 탓이었을까, 눈보라가 거세지고 외투는 조금씩 젖기 시작한다. 얼어붙어오는 살갗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면 얼굴까지 차가워질 것이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는다. 삼켜버린 눈물이 목 안에서 얼음처럼 차갑다.


아빠가 재혼을 생각한다며 나의 생각을 물었을 때, 왜 나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을까. 안절부절못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원망스럽다.


새엄마가 집에 들어오고부터 나는 집이 낯설어졌다. 아빠가 집에 계시는 시간에 맞춰 들어오려고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제일 두꺼운 책을 골라 읽었다. 그 두꺼운 책이 끝날 때쯤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불이 꺼지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현관문은 늘 무거웠다.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새엄마는 그런 내가 못마땅한지 늘 아버지를 다그쳤다. 두 사람 사이, 몇 번의 큰 싸움 뒤에 나는 결국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옮겨야 했다.


“명문학교야 여기 수영아. 너 하는 만큼만 하면 대학도 하버드나 MIT 충분히 갈 수 있어."


이어폰을 꽂았다.


“어차피 보내려던 것 알아. 아빠 인생에서 나는 그냥 짐 덩어리 같은 존재일 테니까."


아버지는 화가 나 내 방문을 닫고 나갔다. 여느 때처럼 새엄마와 싸우는 소리에 나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둑한 밤거리로 뛰쳐나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얼어붙는 뺨을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 속에서 문득 생각이 든다. 내가 세상을 향해 눈을 뜨던 날, 엄마는 눈을 감았다. 심각한 임신중독증이었던 엄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일찍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나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사랑해’라는 엄마의 입모양을 처음으로 볼 때쯤 내가 들었던 말은 “제 에미 잡아먹고 태어난 년” “이기적인 년”이었다.


세상에 엄마가 없는데도 나는 엄마를 앗아갔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았다. 실체 없는 그리움이 내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계속 걷는다. 발걸음이 눈 위에 묻히고, 다시 눈보라가 그 자국을 지워간다. 마치 나의 존재 자체가 그러하듯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그런 존재처럼.


“Three, two, one… 퍽!”

무언가에 가슴이 짓눌렸다. 숨이 멎었다.

누군가 내 몸을 두드리며, 심장을 억지로 깨우려 했다.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Three, two, one… 퍽!”

몸이 흔들리고 빛이 번쩍 스쳐갔다.

그림자 같은 얼굴들이 겹쳐 희미하게 보였다.

“환자분, 들리세요? … 환자분.”

“전기충격, 갑니다. Clear!”

삐, 소리와 함께 심장이 타올랐다.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턱’ 하고 떨어지는 순간,

멈춰 있던 숨을 내뱉었다.

“혈압 올라옵니다! 42 over 68!”


희미하게 눈꺼풀이 들렸다가, 너무 무거운 나머지, 금세 다시 닫히며 깊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하아’ 숨을 몰아쉬며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낯선 흰 천장이 보였다. 병실 안이었다.

“환자분, 정신 좀 드세요?”

간호사가 내 팔에 꽂힌 IV 라인에서 채혈을 하고 있었다.

“네… 물, 물 좀 주세요.”

빨대가 꽂힌 유리컵이 내 입술에 닿았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돌아왔다.

“혈압이 아직 낮으니까 천천히 움직이셔야 해요.”

간호사는 등받이를 조절해 주며 담요를 덮어주었다.

“남자친구분이 어제부터 계속 대기실에서 기다리시던데요. 제가 잠시 집에 가서 쉬라고 했어요. 아마 곧 다시 오실 거예요.”

“… 남자친구요?”

“네. 키 크고 잘생기신 분.”

간호사의 미소와 함께, 재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무심결에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깨어나셨으니 곧 의사 선생님이 오실 겁니다. 패혈증이 온몸에 퍼져서… 일주일 이상은 치료가 필요해요.”


마지막으로 들었던 재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정말 그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걸까?


“저… 제가 병원에는 어떻게 온 거예요? 기억이 잘 안 나서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남자친구분이 업고 오신 걸로 들었어요.”

간호사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환자용 유동식을 내밀었다. 스푼을 손에 쥐었을 때, 재일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간호사가 나가고, 정적이 흐르는 병실에서 나는 아무것도 없는 벽과 창밖만 바라보았다. 재일은 언제 올까. 시선을 시계 위에 고정한 채로 한참을 있었다.


“수영아!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문틈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재일아…”


그를 보는 순간 눈물이 먼저 터졌다. 안심해서였을까, 고마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리워했던 마음을 이제야 인정한 탓이었을까.


“진짜 다행이다. 혈압만 안정되면,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대. 오늘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어.”

그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너는…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해서 어떡해.”

“네가 내 걱정할 때야? 난 괜찮아.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들어가서 쉬지, 왜 왔어…” 마음에도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밥은 먹었어? 무리하지 말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내일 내가 다 가져올게.”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집에 가서 책상 위 랩톱 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읽을 책들도… 부탁할게.”


몸을 일으키려다 곧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그는 다가와 등 뒤에 베개를 받쳐주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앉아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면회시간이 끝났을 때,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갈게, 수영아. 오늘은 그냥 눈 감고 잠만 자. 내일 다시 올게.”


나는 그의 뒷모습을 붙잡듯 낮게 불렀다.

“재일아… 고마워.”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고개를 돌린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내고 몇 가지 검사를 마친 뒤, 나는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간호사들이 침대를 밀어주었고, 문 밖에는 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수영아, 잘 잤어?”


그는 내 소지품을 챙겨 병실까지 함께 들어왔다. 1인실 병실 중앙엔 침대가, 창가엔 작은 의자가 그리고 오른편에는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병실 왼쪽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창밖으로는 출퇴근길 사람들이 무심히 앞을 보며 걷고 있었다.


‘이렇게 내 시간은 멈췄구나.’


간호사가 나가자 재일은 큰 가방을 열어 내 물건들을 꺼내놓았다.

“핸드폰. 책이랑 랩톱도 가지고 왔는데, 지금 당장은 쉬어야 해. 내가 가지고 있다가 줄게.”

엄포를 놓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데… 그 큰 가방은 뭐야?”

“아, 내 짐. 너 줄 책이랑, 내가 쓸 것도 좀.”

“너 짐?”

“응. 며칠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도 랩톱이랑 이것저것 챙겨 왔어.”


순간 발가락 끝이 미동을 하며 떨려왔다.

“바쁠 텐데, 굳이 여기까지… 집도 가까운데.”

나도 모르게 무심한 말이 튀어나왔다.


재일은 잠시 멈칫하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가 있는 게 낫지 않아? … 그냥 집에 가는 게 좋을까?”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재일의 얼굴에 닿았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 파동이 그대로 내 가슴속에 전해졌다. 나는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 아니, 가지 마.”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더는 숨길 수 없었다. 이제는 그를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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