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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달빛 아래 다시 만나다

꿈처럼 흘러가는 밤들

by 아타마리에


(2023년 1월 by재일)



우진은 돌아갔다.

“수영이 깨어나면, 나한테 연락 좀 줄 수 있어? 부탁할게. 그리고 수영이한테는 며칠 있다 들르겠다 해줘.”

그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지난 몇 달간, 나는 수영이 혹시 우진과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에 휘둘렸다. 그러나 오늘 병실 앞에서, 그는 발길을 돌려버렸다. 정말 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걸까.

그럼에도 수영이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내가 아닌 우진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아닐 거야.’ 스스로 다독이려 해도, 생각은 곧 미로처럼 얽히며 다시 답답함으로 되돌아왔다.


수영은 호흡을 되찾았지만 아직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중환자실 끝 대기실에서 그녀의 소식을 기다렸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 열었다 닫았다. 시간은 멈춘 듯 흘러갔다.


긴 기다림 끝에 지나가던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저, 이수영 환자 보호자인데요. 깨어나면 바로 면회가 가능한가요?”

“중환자실은 정해진 면회 시간에만 가능합니다. 보호자님은 집에 다녀오셔서 쉬시다가 시간 맞춰 오세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기실 벽에 걸린 거울 속 내 모습은 엉망이었다. 급히 뛰쳐나와 수영을 업고 달려온 탓에 땀으로 젖은 트레이닝복과 낡은 점퍼가 눈에 거슬렸다. 몇 개월 만에 마주할 그녀 앞에 이 꼴로 서 있어도 괜찮을까.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면회 시간이 되어 중환자실 문을 열었다.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던 수영이 나를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한층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덮었다.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지난 몇 달의 시간이, 나를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절벽 끝으로 몰아넣는 듯했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모든 아픔을 대신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곧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는 힘없이 누워 있었지만, 내 눈에는 더없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화장기 하나 없는 희고 맑은 피부, 핏기를 잃은 입술, 어지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까지.


수영은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중환자실에서 이틀을 보낸 뒤, 일반 병실로 옮기는 날이 다가왔다.

그날 아침, 그녀가 부탁한 물건을 가지러 가기 전, 집으로 들렀다. 간호사의 말이 떠올랐다.

“일반 병실에는 보호자가 상주할 수 있어요.”


그 말을 곱씹으며 큰 가방을 꺼내 들었다. 편안한 옷가지와 면도기, 칫솔, 책 몇 권, 그리고 랩톱까지 차곡차곡 담았다. 하나씩 챙길 때마다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혹시 수영이 부담스럽다며 돌려보내면 어떡하지.’ 그럼에도 손은 멈추지 않았다. 설령 그렇다 해도, 나는 준비해야 했다. 언제라도 그녀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수영의 집으로 가는 길, 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부탁이라는 그의 말을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형, 수영이 깨어나서 일반 병실로 옮겼어요.”

잠시 뒤, 짧은 답장이 도착했다.

“어. 고맙다.”


현관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자 찬 공기가 집 안을 감쌌다. 책상 위엔 마시다 남긴 차가 담긴 머그컵이 있었다. 나는 그 컵을 씻어 건조대에 올려두었다. 방으로 들어가 수영의 책상 위, 랩톱과 충전기, 책 몇 권을 챙겼다. 화장실에서 칫솔도 찾아 가방에 넣었다. 큰 가방 안에 뒤섞인 나와 수영의 물건들을 보니, 마치 어딘가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서던 발걸음이 불현듯 멈췄다. ‘혹시… 우진의 흔적이 있지는 않을까.’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여 거실장과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서랍 안에는 작은 선물 상자가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무선 이어폰이 들어 있었다.


입술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우진이 준 걸까. 상자를 든 손끝이 떨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황급히 상자를 덮어 서랍 속에 넣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뭔데… 질투는 또 왜 하는 거야.’



수영은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간호사가 나가고, 병실 안에는 우리 둘만 남았다. 침묵 속에서 낯선 공기가 수영과 나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감정을 애써 누르며 긴 숨을 삼켰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그녀의 휴대폰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 큰 가방은 뭐야?”

수영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여기… 지내는 동안 필요할 것 같아서.”

그녀의 말에 가슴이 조여왔다. 혹시, 돌아가라고 말하면 어쩌지.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수영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 아래 까만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 가지 마.”

그 한마디에,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간호사는 항생제를 교체하고, 주기적으로 혈압을 재며 수영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 외의 시간에는 병실에 우리 둘만 남았다.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수영아, 우진이 형… 왔었어.”

“어? 우진 오빠가 언제?”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네가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때, 중환자실로 들어가고 난 뒤… 병원 로비에서 잠깐.”

“어떻게 알았대?”

“너, 나한테 전화하기 전에 형한테 먼저 연락했더라고.”

“아… 그게…”

수영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차마 묻지 못했다. 그저 뒤로 물러선 채, 말 없는 공기 속에 서 있었다. 설명을 듣고 나면,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게 될까 두려웠다.


수영은 아직 기력이 없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자주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잠든 시간은, 오히려 유일하게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었다. 고요한 그녀의 숨소리를 듣다 보면, 오래 눌러 두었던 그리움이 차오르며 가슴 안쪽이 뜨겁게 저려왔다.


창밖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저녁이 되어 병원에서 나온 식사를 받았지만, 수영은 반도 먹지 못했다. 병원 앞 식당에서 죽을 사러 나왔다 돌아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막 눈을 뜨고 있었다.

“수영아, 이거 좀 먹자.”

그녀가 누운 침대의 등받이를 올려주고 포장을 열었다. 따뜻한 김이 얼굴을 감쌌다.

“괜찮은데, 나.”

죽을 스푼에 담아 건넸다. 수영은 천천히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그녀의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곧바로 손을 내렸다. 수영의 입가에 미세한 진동이 흘렀다. 끓어오르는 뜨거운 공기가 목까지 차올라 숨을 막을 것만 같았다. 들키고 싶지 않아,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리창 너머로 별빛이 하나둘 반짝였다.


밤은 수영의 병실에도 찾아왔다. 간이침대를 펴고 그녀의 옆에 누웠다. 좁은 공간 속 뜨겁게 달궈진 공기에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로 천장만 보고 있었다.

“재일아.”

어둠 속에서 수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 수영아.”

“잠이 안 와. 낮에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봐.”

“그래? 평소에는 잠 안 올 때 뭐 해?”

“음… 보통 책 읽거나, 논문 쓰지.”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랑 똑같네. 나도 그래.”


순간, 그녀가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 웃음이 너무 가까워서, 얼굴이 붉어진 걸 들킬까 몸을 반대로 돌렸다가, 다시 조심스레 그녀 쪽을 바라봤다.

“책 읽어줄까?”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방에서 작은 독서등을 꺼내 간이침대 옆 스탠드에 고정했다. 불빛이 켜지자 창밖에서 스며든 달빛과 겹쳐 그녀의 얼굴이 은은히 드러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야.”

책장을 펼치는 손끝이 떨려 종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숨을 고르며, 천천히 첫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친구여,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했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작은 마을의 무도회에서였는데, 그 순간 내 마음의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에 숨을 고르며 다시 이어갔다.

“그녀의 손이 내 손에 닿는 순간,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별빛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영원을 보았다.”


나는 잠시 책장을 덮었다. 눈앞의 글자보다, 내내 나를 바라보는 수영의 눈빛이 더 크게 다가왔다. 다시 한 장을 넘기려 했지만, 손끝이 떨려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숨을 삼켰다.

“수영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인 동그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손을 들어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뜨겁게 젖은 눈물이 손끝에 닿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울지 마, 수영아.” 떨리는 목소리와 떨리던 내 손길을,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 밤, 다시 책을 펼쳤다. 아무 말 없이, 울컥하는 마음을 눌러 담으며. 달빛 아래, 우리가 다시 만났다.




(2023년 1월 by수영)



내가 병원에 입원한 날부터, 재일은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아침이면 먼저 일어나 창문을 열어주고, 밤이면 커튼을 닫아주었다. 하루가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으면, 그는 보호자용 간이침대에 앉아 독서등을 켜고 책을 읽어주었다.


그 밤들은 꿈처럼 흘러갔다. 겨우 50센티미터 남짓한 거리, 그보다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숨결과 목소리. 책 한 구절이 내 몸을 간질이고, 내 가슴을 부풀게 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그것을 닦아주었다.


나는 이런 감정을 정말 오랜만에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진을 만날 때의 아슬아슬했던 그 설렘. 그것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이 아니었다. 재일의 아련한 눈빛은 내 심장을 조였지만, 그 순간은 결코 불안하지 않았다.


점심을 마치고, 그와 차를 마시며 한참을 웃고 있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우진이 들어왔다.

“수영아.”

“오빠…”

“형, 오셨어요?”

“어. 재일이도 있었네.”

어두운 기색이 스친 우진의 얼굴에 재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수영아, 나 나가 있을게.”


남겨진 정적 속에서 우진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날.”

“그러게… 그냥 감기인 줄 알았는데…”

“미안해. 전화를 못 받아서… 나도 참, 바보 같은 놈인가 봐.”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얼버무리듯 말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나를 바라보다,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

또다시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내 마음이 흔들렸다.

“응. 학교 일이 좀 많았어. 바쁘게 지냈지.”

“그랬구나…”

“오빠는?”


나는 가끔 책방 앞을 지나가곤 했다. 불빛 너머 그의 실루엣을 보며 옛 기억에 잠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우진에서 그 시절의 우진을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다시, 나를 보는 저 슬픈 눈빛 앞에서 모든 시간이 없던 일이 될까 두려웠다.


“난… 너 생각 많이 했어.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였는데, 하필 그때 받지를 못했네.”

“….”

“나, 에이전시랑 계약했어. 너도 없고, 나도 닿을 곳이 필요했나 봐.”

우진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정말? 축하해. 잘 될 거야, 오빠.”

“재일이는 여기서 지내?”


그가 병실 한편에 놓인 재일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응. 재일이가 나 병원에 데려왔거든…”

목소리가 떨렸다. 재일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죄책감이 들었다.


“오빠, 그날 내가 오빠한테 전화한 거… 사실 잘 기억이 안 나. 의식이 없어서, 아무 번호나 누른 것 같아.”

어떤 진실은 끝내 말하기 힘든 법이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나도 대답하지 않았다. 흩어지려는 기억의 파편을 애써 눌러 담았다.


“뭐 필요한 건 없어?”

“아니. 없어.”

“그래, 그럼…”

우진은 멋쩍은 미소를 남기고 돌아섰다.

“수영아, 잘 지내. 아프지 마.”


우진이 돌아가고 난 뒤, 병실은 조용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돌아온 재일은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밤이 되자, 우리는 달빛 아래 나란히 누워 있었다.

“재일아… 자?”

“아니.”

“왜… 아무 말도 안 물어봐?”

“뭐를?”

“우진 오빠 말이야.”

“모르겠어…”


숨을 고른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재일아, 나 있잖아…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 내가 태어난 날에.”

“하…”

“그래서 여섯 살까지 외할머니랑 살았어. 가끔 아빠가 찾아오기도 했는데 너무 짧아서… 아빠도 없는 줄 알았지. 그러다 여섯 살에 갑자기 아빠가 나타나서, 나를 캐나다로 데려갔어.”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다 싫었어. 죄책감만 주고 간 엄마도, 늘 무심했던 아빠도… 하지만 제일 싫었던 건, 나였어. 내가 모든 걸 이렇게 만든 것 같았으니까.”


재일은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외로웠던 거야, 아마. 남들처럼 사랑받지 못해서. 그러다 우진 오빠를 만나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했지. 혼자 상처받고, 혼자 버티고… 그 기억에 매달리다 보니, 오히려 더 외로워졌어.”


목 끝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속삭였다.

“솔직히 이제 잘 모르겠어. 불안이었는지, 외로움이었는지… 그 기억들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은데.”


눈물이 결국 쏟아졌다. 그때 재일이 몸을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가에도 맺힌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나는 흐느끼며 고백했다.

“그 기억을 놓아주기가 너무 힘들어. 내가 불쌍해서, 미안해서… 그때 나를 그냥 두고 싶지가 않아.”


한참을 울고 난 뒤, 다시 재일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 정리하려고 해. 남은 기억 전부 다. 그때까지, 나 좀 기다려줄 수 있어?”


그는 다시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조용히 대답했다.

“멀어지지만 말아. 기다릴게. 천천히 와.”

그날 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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