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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사랑과 외로움이 뒤섞인 환상

봄을 기다리며

by 아타마리에

2023년 2월 (by 재일)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누워 있었지만, 나는 끝내 잠들지 못했다. 수영이 꺼내놓은 상처들이 내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연민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며, 무게를 함께 짊어진 채 밤을 지새웠다.


그녀의 인생을 안아주고 싶었다. 외로움과 공허를 채워주고 싶었다. 하지만 수영은 끝내 스스로의 상처를 감싸 안으려는 사람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그 곁에서 묵묵히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 걸릴 기다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현승과의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다.

“사랑 같은 건 평생 모르고 살았는데…, 뭐. 1년쯤 더 모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수영이 퇴원한 지 몇 주가 흘렀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녹아,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찾아왔다.

하나둘씩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계절.

그 주 내내,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8일 내내, 하루 스물네 시간을 그녀와 함께한 뒤 돌아온 곳은 다시 텅 빈 집이었다. 한여름밤의 꿈같던 시간은 끝났다는 듯, 밀려 있던 실험 스케줄과 연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은 퇴원한 뒤로 종종 연락을 해왔다. 하루에도 두세 통씩 짧은 메시지가 오고, 가끔 시간이 맞으면 학교 근처에서 점심을 함께했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달빛 비추는 창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전화를 걸까. 아니면 집 앞에 찾아갈까.’

차오르는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의 이름이 뜬 메시지를 몇 번이고 펼쳐보는 일뿐이었다.


그날도 연구실은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야, 점심 먹으러 안 갈래?”

동료들이 물었다.

“난 괜찮아. 대충 사 온 걸로 먹을게. 오늘 논문 검토 끝내야 해서.”

책상 위에 흩어진 논문 속 활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메시지가 왔다. 수영이었다.

“재일아, 뭐 하고 있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답장을 보냈다.

“응, 아무것도 안 해. 너는?”

“안 바쁘면 점심 먹을까?”

“그러자. 뭐 먹을까?”


메시지를 주고받는 짧은 순간이 내 하루의 전부였다. 나는 하루 종일 그녀의 이름이 화면에 뜨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면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내 눈과 귀는 그녀만을 향해 있었다.


우리는 학교 앞 작은 한식집에서 마주 앉았다. 수영은 남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 단정히 올려 묶은 모습이었다. 밝은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이 빛났다.

“재일아!”

“어, 수영아.”

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왜, 웃어? 나 뭐 이상해?” 그녀가 눈을 흘겼다.

“아니, 그냥…”

‘예뻐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끝내 그 말을 삼켰다.


밥상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는 이어졌다. 연구실과 논문, 발표 일정 같은 평범한 이야기들이 채워져 갔다.

“논문은 다 썼어?”

“어, 일단 초안은.”

“내가 한번 봐줄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정말? 너 시간 돼?”

“응.”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럼 이따 끝나고 내 오피스로 올래?”


그날 이후, 나는 수영의 사무실을 자주 찾았다. 논문 이야기를 핑계 삼아 커피를 들고 가거나, 점심 도시락을 사다 주곤 했다.

복도 끝 그녀의 사무실 앞은 늘 학생들로 북적였다.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발자국이 뒤섞인 복도를 지나, 나는 겨우 문 앞에 닿았다.

똑똑똑.
“네, 잠시만요.”
몇 분 뒤 문이 열리며 학생 하나가 나왔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학생의 뒷모습을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이야?”
“응, 과제 피드백 부탁해서 오라고 했어.”
“그랬구나. 너 배고플까 봐 도시락 좀 사 왔어.”
“고마워, 재일아.”

더 머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볍게 웃으며 도시락을 건네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
책상 위에 남아 있던 수영의 미소가 오래도록 눈앞에 아른거렸다.





학교 앞 커피숍으로 향했다. 수영에게 가져다 줄 커피까지 두 잔을 손에 들고 계산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재일아!”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연구실 동료, 제희였다.

“어. 커피 좀 사러 나왔어.”

“바로 연구실 가는 거야?”

“아니, 들를 데가 있어서.”


제희는 잠시 말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너 혹시, 생화학과 이수영 교수님이랑… 사귀는 거야?”

“뭐?”

나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야.”

“아니야?”

제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내 얼굴을 살폈다.

“야, 학교에 소문 다 났어. 너랑 그 교수님이랑 만난다고.”

“누가 그래?”

“내 후배 동생이 학부에 있는데, 그 교수님 수업 듣거든. 근데 그 과 애들이 다 안다던데?”

“하… 아니라고. 진짜 아니라고. 너 그 친구한테 꼭 말 좀 해줘. 오해야.”


제희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저었다.

“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냐? 네가 말 안 했으면, 애들이 뭐 보고 그러겠어. 너, 교수님 좋아하는 거 맞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맞아. 내가 좋아하는 건 맞아. 근데, 그게 다야.”


제희는 잠시 나를 똑바로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너야 박사 끝나면 학교 떠나면 되지만… 교수님은 학교에 계셔야 해. 그런 소문, 교수님한테는 치명적일 수 있어. 알지?”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손에 쥔 커피를 내려다보았다. 학교 앞 식당에서 함께한 몇 번의 점심과, 그녀의 오피스를 드나들던 지난 몇 주가 떠올랐다. 소문이 날 만도 했다.

하… 바보 같은 놈.

혹시나 수영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나는 망설임도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수영아, 학교에서 자주 보는 게 누군가에겐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사귀는 것도 아닌데 괜히 소문이라도 나면… 나는 괜찮지만 너한테는 피해가 될 수 있잖아.”
“그런 눈으로 보는 사람이 있어?”
“있을 수도 있어. 당분간은 학교에선 만나지 말자.”
“알겠어… 그러자.”


막상 답장을 읽으니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던 가슴 한쪽이 푹 꺼져버렸다.

그 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만나지 않았다. 멀리서 마주치면 잠깐 눈인사만 나누고, 바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녀는 내 논문을 이메일로 고쳐줬고, 나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전화를 걸었다. 거리가 생기고 나니 오히려 우리의 사이는 더 애틋해졌다.


어느 날 내가 보낸 “수영아, 점심 꼭 챙겨 먹어”라는 문자에, 그녀는 답장 대신 먹던 음식 사진을 보내왔다. 답장보다 먼저 건네온 그 사진이 너무 귀여워, 저절로 웃음이 났다.


웃는 모양의 이모티콘 하나로 마음을 눌러 담아야 하는 우리 사이가 야속했지만, 그녀의 웃음에, 목소리에, 글자 하나하나에 생기가 스며드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뻤다.


그렇게 수영의, 그리고 나의 봄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2023년 2월 (by 수영)



재일이 나를 병간호해 주던 시간들의 여운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 그의 향기, 그의 목소리. 그 밤마다 느껴지던 온기가 여전히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 퇴원하던 날, 재일은 택시로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병원을 나오자마자, 우리는 다시 어색해졌다. 달콤한 꿈에서 갑자기 깨어난 것처럼.


아파트 단지 1층, 엘리베이터 앞에 그와 함께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들어오라고 해야 할까…’

병원에서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던 우리의 거리는, 집 앞에서는 쉽게 좁혀지지가 않았다.


“들어가, 수영아. 나도 갈게.”

재일은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홀로 남아 5층 버튼을 눌렀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싱크대 옆, 마시다 만 머그컵이 가지런히 건조대에 놓여 있었다. 짐을 풀고 침대에 몸을 눕히자, 다시 혼자라는 사실이 밀려왔다. 병실에서 아무 말 없이 돌려보낸 우진이 떠올랐다. 그리고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와의 기억도.


두 번째 이별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아팠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매일 밤낮으로 영상통화를 하던 시절, 그의 연락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줄어들었다. 화면 속 그의 방은 낯설어졌고, 내 메시지에 답은 늦게 돌아왔다. 결국 그는 나를 피했다.


외할머니 집에서도, 낯선 캐나다에서도, 새엄마가 들어온 집에서조차 나는 혼자였지만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우진과의 이별은 달랐다. 그건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관계 속에서 나는 끝없는 질문에 갇혔다.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마주했을 때 알게 되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외로움이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하아.’ 눈을 떴다. 어지러운 머리를 옆으로 돌리자, 다시 재일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날 밤, 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외로움에 기대는 사랑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스스로 다 비워냈을 때, 그때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이렇게 떨릴까.


그 순간, 메시지가 도착했다.

“수영아, 내일 먹을 것 좀 사뒀어. 냉장고가 텅 비어서. 1층 경비실에 맡겨둘게. 아무 때나 찾아가.”


휴대폰을 쥔 손끝이 뜨거워졌다.


대학교는 다시 개강했고, 나는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우리 학교에서는 만나지 말자.”

그의 말이 서운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칠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메시지로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창밖 교정에는 봄꽃이 피어 있었고, 풋풋한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스쳐 지나갔다.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한참을 망설였다.

‘재일은 지금 어디 있을까. 학교에 있나?’


“재일아, 뭐 해?”

문자를 썼다가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 지웠다. 다섯 번쯤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버리곤 했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와서야 결국 짧은 문장을 보냈다.

“재일아, 뭐 해. 심심한데.”

‘내가 심심하다는 말을 쓰는 날이 오다니…’


그의 전화가 울렸다.

“수영아.”

“응, 집에 왔어?”

“어, 지금 집 가는 길이야.”

“학교는 어땠어?”

“똑같지 뭐. 전에 보여줬던 논문, 곧 발표야. 넌 세미나는?”

“아직 시작도 못 했어… 하, 하기 싫다.”

“너도 하기 싫은 게 있어?”

“그럼, 나도 사람인데.”

“난 사람 아닌 줄 알았는데.”

“그럼 뭐야?”

“음… 천사?”

“야, 느끼해~~~ 하지 마!”


우리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유난히 허전한 마음에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감정은 새로운 사랑일까, 아니면 또다시 외로움의 그림자일까.


글을 쓸 생각에, 나는 오랜만에 블로그를 열었다. 빈 화면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머릿속을 정리해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갔다.


베르테르는 매일 로테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 편지 속에는 로테가 없었다.
오직 베르테르의 갈망만이 가득했을 뿐.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우리의 결핍과 외로움을 감춘다.
그 속에서 우리는 상대가 아닌, 사랑받고자 하는 스스로의 욕망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사랑과 외로움이 뒤섞여 만들어낸 환상,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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