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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진심

by 아타마리에

2023년 4월 (by 재일)


토요일 아침, 알람이 울렸다. 오늘은 꼭 산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얇은 바람막이 지퍼를 올리고, 등산화 끈을 고쳐 맸다. 현관문을 열자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졌다.


산 초입은 날씨 덕분인지 등산객들로 붐볐다.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려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며칠째 마음이 막혀 있던 건, 결국 수영 때문이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건 그녀뿐이었다. 그녀도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이 오히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게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썸’이라는 걸까. 연인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관계.

왜 나는 병실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을까. 그건 대체 언제까지 유효한 약속일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앞으로 갈수록 가속도가 붙는 중이었다.

메시지가 오면 목소리가 듣고 싶고, 목소리를 들으면 얼굴이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얼굴을 보게 되면…


헉, 헉… 숨이 차다.

반도 오르지 못한 산중턱에서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바람이라도 쐬면, 산에 오르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다. 머릿속을 비우고 싶어 시작한 산행인데, 오르는 내내 수영 생각뿐이었다.


정상에 다다라, 반짝이는 아침 햇살과 푸른 하늘을 마주했다. 발아래 펼쳐진 도시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이제야 조금 숨이 트인다.’

가슴속 막혀 있던 공기를 길게 내뱉었다. 비워진 자리에 산의 초록빛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다. 탁 트인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이 마치 내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기다려야 한다. 수영이 완전히 상처에서 회복될 때까지.


마음을 다잡고 다시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셰익스피어 책방’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독서 모임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그 문을 열지 않았다.

‘혹시… 우진 형이 안에 있을까.’

눈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사랑도, 질투도 내게는 낯선 감정이었다. 수영의 짐을 가지러 갔던 날, 문을 나서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우진의 흔적을 찾으려 했었다. 서랍 속 새 이어폰을 보고는 화가 치밀었다. 아니, 사실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병원에서 수영이 깨어나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는 우진의 부탁을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그를 다시 불러낸 것일지도 몰랐다.


그와 나, 그리고 수영. 우리는 같은 그물에 얽힌 듯 벗어날 수 없었다.


‘맥주라도 사가야겠다.’


집 앞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고르고 계산대에 섰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재일아.”


우진이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피곤이 묻은 얼굴의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우진 형…”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여전히 머리 위에서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고, 편의점 앞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 위에 앉았다.


캔맥주를 따는 소리가 흩어졌다. 손에 쥔 차가운 알루미늄 캔의 감촉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침묵을 깨고 겨우 입을 열었다.


“형, 잘 지냈어요? 병원에서 본 뒤로는…”

“어, 밴드 때문에 바빴지. 넌? 연구는 잘 되고 있고?”

“네, 뭐… 그냥.”

“수영… 퇴원 잘했지? 요즘은… 잘 지내고 있지?”


대답 대신,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차가운 탄산이 목을 스쳤지만, 여전히 시원하지 않았다. 우진의 말에서, 그가 수영과 연락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네. 잘 지내요. 이것저것 학교 일이 바빠서… 저도 자주 보지는 못해요.”

“휴.”

우진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래도… 네가 곁에 있어 다행이다.”

침묵을 깨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형… 수영이 아직 힘들어해요.”

아무렇지 않게 꺼낸 그녀의 이름 때문이었을까. 괜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래? 너희… 만나는 거 아니었어?”

“아니요.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거예요.”


“후… 너도 힘들겠다.”

우진이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를 혼자서 좋아하는 게… 마음을 고문하는 거 같더라.”


화가 치밀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캔이 다 비워졌을 무렵에도, 화는 가라앉지 않았다.


“형이 그걸 알긴 해요? 전 1년 혼자 바라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수영은 10년을 어떻게 버텼을까요?”


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저는 형처럼 도망치지 않아요. 제 마음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 마음은 깨뜨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사정이 있었어. 나도 수영이한테 미안한 게 많아.”

“미안했으면 진작에 말했어야죠.”

“그러게… 내가 바보 같았어. 수영이가 괜찮아지면, 다시 얘기하려 했는데…”


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제발요. 더 이상 수영이 힘들게 하지 마세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자, 발끝까지 긴장이 몰려왔다. 더는 수영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이 소용돌이에서 함께 벗어나고 싶었다.



2023년 6월 (by 수영)


“하아, 집중이 안 되네…”

내일 있을 세미나 준비 슬라이드를 들여다봤지만,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화면 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잠깐 쉬어야겠다.’


무심코 인터넷 검색창을 열었다. 손가락은 자동처럼 움직여 “서울 시내 맛집”을 쓰고 있었다.

광장시장 녹두전, 종로 설렁탕집, 반포 떡볶이집, 삼성역…

와…


어느새 삼십 분째 맛집 검색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재일을 만난 날,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수영아, 우리 맨날 같은 데만 오지 말고, 다음엔 맛있는 데 찾아가볼까?”


그 말이 남아 있었던 걸까. 맛집 리스트를 만들듯 검색창을 스크롤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정신 차리자, 이수영!’

다시 하던 일로 되돌아갔다. 해야 할 일을 마쳤을 때, 재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영아, 밖에 비 온다. 내일 세미나 준비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말고, 일찍 자”

싱숭생숭한 마음에 창가로 옮겨 커튼을 젖히니, 창밖으로 빗방울이 흩어지고 있었다.


탁, 타닥, 탁 타닥

유리창을 두드리는 초여름의 빗소리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창문을 열어 손을 내밀었다. 조용한 밤, 차가운 비가 손에 닿는 느낌이 상쾌했다.


자리로 돌아와 메시지를 쓰려다 시계를 보았다. ‘너무 늦었을까…’ 망설이다가 결국 보냈다.

“재일아, 안 자? 전화해도 돼?”


확인표시가 뜨기도 전에, 그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수영아, 아직 안 잤어?”

“어 이제 자려고 했어. 나 밖에 비 오는 줄도 몰랐어…”

“세미나 준비하느라 정신없었나 보네, 다 했어?”


내일,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자연과학연구소 특별 세미나에서 초대 강연자로 서게 되었다. 하지만 떨림의 이유는 발표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다시 재일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집중이 안 돼서 그냥 대충 했어.”

“내일… 보겠네? 나 아는 척 안 할게.”

재일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인사도 안 할 거야?”

“괜히 했다가 또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라고.”

“다들 인사하는데 너만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럼, 인사할게. 대신 사인해 줘.”

“사인? 그래, 그럴까?”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수영아, 이제 자야지. 열두 시 넘었어.”

“잠이 안 와…”

비 내리는 밤, 그의 목소리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금 더 얘기할까?”

“응.”

어둠 속에서, 빗소리를 배경 삼아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일아, 부모님은 경기도 사신다 했잖아. 근데 왜 너 혼자 나와 살아?”

“응, 부모님 집은 하남에 있어. 박사 시작 전까진 거기서 다니다가, 연구실이랑 가까워야 해서 자취 시작한 거야.”

“그렇구나. 가족이랑은 자주 만나?”

“우리 부모님 고깃집 하셔서 바쁘셔. 내가 가야 하는데 잘 못 가. 동생 전역하면 가보려고.”

“동생도 있어?”

“응, 일곱 살 차이. 어릴 땐 그냥 아기 같았는데, 요즘은 친구 같기도 하고… 겉으론 밝은데 속이 깊어.”


문득 그의 가족이 궁금해졌다. 가족이라고는 아빠 한 명뿐이던 내게 재일의 가족 이야기는 책 속에서나 읽을 법한 이야기였다.


“수영아, 잠 안 오면… 책 읽어줄까?”

재일의 말에,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어났다. 병원에서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그 밤들이 되살아났다.

“응…”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전해졌다. 곧 낮은 목소리의 울림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에게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온 세상이 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한순간, 그는 마치 자기 삶 전체가 그 미소를 향해 나아왔던 것처럼 느꼈다…”


무심코 숨을 들이마셨다.

“수영아, 자?”

“아니… 아직 안 자.”

“무슨 생각해?”


대답하려다 그대로 멈췄다. 차마 말로 꺼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책장이 한 장, 또 한 장 넘어갔다. 그 소리는 빗방울과 섞여 밤공기에 스며들었고, 나는 눈을 감고 그 떨림을 온전히 느꼈다.


“이제 자야지. 내일 중요한 날이잖아.”

“휴…”

아쉬운 마음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화를 끊었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날처럼, 다시 잠들지 못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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