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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내겐 너무 자랑스러운 너

드러내지 못한 고백

by 아타마리에

2023년 6월 (by 재일)


국제 학술 세미나가 열리는 날이었다. 지도 교수님의 권유로 동료들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도 운명처럼, 수영이 특별 강연자로 초청받아 있었다. 예정에 없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들뜬 마음에 아침부터 연신 시계만 확인했다.


오후 세미나 참석을 위해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코엑스로 향했다. 차창에 스치는 봄 햇살이 괜히 더 눈부셨다.


“야, 오늘 특별 강연자가 이수영 교수님이라며?”

제희가 장난스레 물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어… 그래?”

제희의 말에 애써 모르는 척했다.


컨퍼런스룸은 이미 청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외 대학에서 온 교수들과 주요 인사들까지, 큰 공간에는 기대와 긴장감이 가득 차있었다. 키노트 강연이 끝나고, 마침내 사회자가 다음 발표자를 소개했다. 수영의 차례였다.


주변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 한국대 최연소 교수래. 스물여덟에 정교수.”

“알아, 천재라잖아. 열아홉에 네이처 1저자였다던데.”

“근데 왜 미국에 있다가 한국으로 온 걸까?”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올 때마다, 마치 내가 자랑이라도 할 수 있는 듯,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시작한다.”


조명이 꺼지고, 어두운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그 빛의 중심에 수영이 서 있었다. 검은 정장 바지에 하늘색 블라우스, 정갈하게 묶은 머리. 자주 보던 얼굴인데도 오늘은 낯설 만큼 달라 보였다. 숨을 고르며 시선을 고정했다.


“Dear colleagues and fellow researchers, I’m professor Su-young Lee from Korea national university’s department of biochemistry.”

수영은 자신 있는 목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다. 부드럽지만 강단 있는 그녀의 모습은 모두의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정작 발표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손짓, 슬라이드 위를 지나는 눈빛 하나하나에 매혹되어, 넋이 나가듯 그녀만 바라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50분이 지나가 버렸다. 아마 수영이 전날 미리 강연 내용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들었는지도 모른 채 앉아 있었을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외국인 교수들의 손이 잇따라 올라갔다. 날카롭고 복잡한 질문들이 이어졌지만, 수영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다. 설명은 간결하지만 명쾌했고, 확신의 태도는 끝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야… 진짜 멋있다. 근데 나 내용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놓쳤어.”

“나도. 근데 왠지 뿌듯하지 않아? 한국 사람인 게 괜히 자랑스러워. 막 내 어깨가 올라가.”

옆자리 동료들의 속삭임에 나는 맞장구를 칠 수 없었다. 입술이 반쯤 벌어진 채로,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제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야, 넌 아예 홀린 사람 같다. 저 교수님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 아직도 좋아하는 거 맞지?”

“하… 아니야. 그런 말 그만해라."

“너 끝나고 리셉션 갈 거야?”

“교수님이 다 남으라고 하시지 않았어?”

“후, 나 집중력 바닥이라 집에 가고 싶은데… 어쩌겠어. 남아야지.”


호텔 연회장은 이미 북적였다. 중앙에는 해외에서 온 교수들과 VIP들이 자리했고, 우리는 한쪽 구석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샹들리에 불빛이 와인잔마다 반사되어 곳곳에 반짝임이 가득했다.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대화들이 라디오 채널처럼 흘러나왔다. 나는 수저를 쥔 채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두리번거리는 시선 끝에 그녀가 들어오길 바라며.


마침내, 수영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외국인 교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화이트와인 잔을 가볍게 들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쩐지 자연스러웠다.


‘가서 인사를 해야 하나?’

‘괜히 사람들이 오해하면…’

‘아니, 차라리 당당히 인사하는 게 낫지.’

혼자 속으로 수십 번을 고민하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심장이 뛰는 속도를 따라가듯 발걸음이 그녀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자, 수영이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아… 네.”

그녀는 순간 당황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한국대 물리학 박사과정 신재일이라고 합니다. 오늘 강연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네… 감사해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쪽으로 수영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북적이는 웅성거림이 멀어지자, 조였던 마음이 풀어졌다.

“교수님께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내 말에 그녀는 동그란 눈을 치켜뜨며 웃음을 참았다.

“네, 뭔데요?”


“오늘 강연에서 연구 응용 부분에서 궁금한 점이 있는데, 혹시 저녁에 더 들어볼 기회가 있을까요?”

말을 뱉는 순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수영의 뺨이 붉게 물들며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네… 그래요. 연락 주세요.”

짧게 답한 뒤, 그녀는 등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크게 웃고 싶었지만, 빠른 걸음으로 동료들이 앉아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손끝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뭐야, 무슨 얘기했어? 너 저 교수님 알아?”

동료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니야. 그냥 강연 끝나고 질문하려다 못 한 게 있어서… 연구 응용 관련해서 여쭤봤어.”

내 말에 동료들이 동시에 혀를 찼다.

“진짜 너도 별종은 별종이다.”

“와, 난 질문할 생각도 못 했는데… 대단하다야.”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내리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저녁 식사 도중, 지도교수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재일아, 인사해. 여기는 MIT 마커스 교수님이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김 교수님 소개로, 양자역학 응용 연구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대화는 곧 열기를 띠었다. 논문 이야기에서 시작해 실험 방법, 앞으로의 연구 가능성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재일 씨, 혹시 미국에 올 생각 있으면 꼭 연락해요. 우리 쪽에 맞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습니다.”

마커스 교수의 말은 분명 내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제안이었다.


어느새, 회장은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비워진 잔이 치워지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본능처럼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수영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챙겨 들며 급히 동료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나 먼저 갈게.”


행사장을 빠져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수영아, 어디야?”

“신재일 학생?”


숨을 고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교수님, 어디세요?”

“기다리고 있었죠. 코엑스 2번 출구로 나와요.”


전속력으로 뛰었다. 숨이 차오른 채 계단을 올라서자, 출구 앞에 그녀가 서 있었다.

“수영아.”

“왜 이렇게 뛰어왔어? 가자.”


우리는 택시에 올랐다. 수영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은 근처의 와인바였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맛집 검색.”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은은한 골드빛 조명 아래, 길게 뻗은 바 테이블 하나뿐인 작은 와인바였다.

잔 부딪히는 소리와 낮은 재즈 음악이 섞여 흐르고, 테이블에는 두 팀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가장 구석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어깨와 내 팔이 살짝 스칠 듯 가까웠다.


방금 전까지 무대 위에서 수많은 박수를 받던 그녀가, 지금은 내 곁에 앉아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잔 위로 은은한 조명이 흘러내렸다. 그 빛이 그녀의 눈가를 스치며, 내가 알던 모습과 다른 얼굴을 만들어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마치 비밀연애라도 하는 것 같아.’


우리는 와인과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소믈리에가 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작은 울림이 바 테이블 위에 퍼졌다.


“수영아, 오늘 진짜 최고였어.”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고마워. 어젯밤 너랑 통화 끊고 한참을 못 자서… 얼굴 많이 부은 거 같지 않아?”

“아니. 전혀.”


나는 와인잔 위로 흔들리는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무심결에 입을 열었다.

“… 예뻐. 오늘따라, 더.”


그녀의 눈빛이 와인 잔 속 붉은 파도처럼 흔들렸다. 차오르는 말의 무게에 눌려 와인을 한 모금 삼켰다.


“수영아, 오늘 네가… 참 자랑스러웠어. 같은 한국 사람으로, 그리고…”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결국 가장 안전한 단어를 꺼내야 했다.

“… 친구로서.”

‘그래. 우리는 친구였지.’

내뱉지 못한 말들을 잔 속에 가라앉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네가 해주는 말… 정말 힘이 되는 거 알지?”


그날 밤, 우리는 세미나의 뒷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여전히 와인잔속에 남아있었다.


‘아직 내가 널 기다리고 있다는 걸…’


와인빛이 서서히 잦아드는 테이블 위에서, 또 하나의 밤이 흘러갔다. 내일이 오는 것이 아쉬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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