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바다 위의 크리스마스
행복한 나날들은 화살처럼, 보이지 않는 목표물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궤적 위로 차가운 바람의 계절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재일은 늘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지만, 그 선을 넘지 않았다. 나 역시 들어오라는 한마디를 끝내 삼키곤 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마다, 내 안에서 답답한 무언가가 밀려 올랐다. 아쉬운 마음이었을까. 닿을 듯 닿지 못한 거리에서 부풀어 오르는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재일아, 금요일 저녁에 저녁 먹을까?"
"그러자,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내가 해줄게. 요리… 전에 내가 해주기로 했잖아"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짜? 나는 너무 좋지"
나는 목요일 저녁부터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집이 너저분한 건 아니었지만, 재일이 온다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장식장 구석구석의 먼지까지 꼼꼼히 닦아냈다. 화장실의 물때와 유리창의 얼룩까지 지우고 나니 어느새 온몸이 축 늘어질 만큼 지쳐 있었다.
금요일 퇴근길에 마트에 갔다. "마늘, 버터, 양파, 소고기… 또 뭐가 있었지?" 한 손엔 쇼핑 리스트를 손에 쥐고 바쁘게 카트를 움직였다. 아직 그가 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조급해졌다. 필요한 재료들을 담고 난 뒤, 나는 와인 코너 앞에서 멈춰 서 있었다. '와인을 마시자고 하면, 재일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그러다가… 혹시라도…' 한참을 고민하다, 레드와인 한 병이 카트에 담겼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향했다. '재일이 오려면 20분밖에 안 남았잖아' '물을 올리고 감자를 삶고, 그다음엔 뭐였더라?' '샐러드를 먼저 해두는 게 나을까?' 머릿속 회로가 복잡해진다. 마음만 앞서서는 정작 손은 느리게만 움직였다.
딩동. 벨이 울렸다. 나는 급히 인터폰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어주자마자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퇴근하고 샤워를 하려던 걸 깜빡했던 것이다. 서둘러 칫솔에 치약을 짜고 이를 닦았다. 1분 만에 양치질을 끝내고 헐떡이며 거울을 들여다보니, 이미 얼굴은 긴장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심호흡을 하고 현관으로 나섰다.
“어… 재일아, 들어와.”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보이면 집 앞에 선 그도 나만큼이나 긴장한 듯 보였다. 신발을 벗은 그는 와인 한 병을 내밀었다.
“이거…”
태연한 척 와인을 받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거기 소파에 앉아. 나 하던 게 있어서"
나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재일이 다시 구부정하게 서서 두리번거렸다.
"왜? 앉아 있어. 내가 금방 요리해 줄게"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그러면 여기 와서 감자 으깨는 거 도와줄래? 매시드 포테이토 만들어야 하거든.”
재일이 내 옆으로 다가온 그 때부터 머릿속은 하얘졌다. 허둥지둥 대다가, 샐러드에 넣으려던 비트가 담긴 접시를 놓치고 말았다.
와장창. 붉은 비트와 함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영아! 괜찮아?”
놀란 재일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게 들렸다.
“어… 나는 괜찮아.”
괜히 서두르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내가 더 답답했다.
“이쪽으로 나와 있어.”
재일은 바닥의 유리 조각을 하나하나 주워 담고, 거실에서 무선 청소기를 가져와 바닥을 훑었다.
다시 주방이 깨끗해졌을 때 나는 스테이크를 굽기 시작했다.
“수영아.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별일 없었는데. 왜?”
“아니, 좀 달라 보여서.”
나는 단지, 재일이 보는 앞에서 서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스테이크 굽는 소리가 잦아들 무렵, 재일은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나를 불렀다.
“수영아, 나 이제 뭐 하면 돼?”
“그럼 거기 레드와인 미리 따놓을까?”
“와인, 두 병 중에 어떤 거?”
뒤를 돌아보니, 내가 사 온 와인과 재일이 사 온 와인이 나란히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냥… 네가 마시고 싶은 걸로 해.”
우여곡절 끝에, 요리는 완성이 되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잘 먹을게 수영아"
“응, 맛있게 먹자. 그리고… 논문 심사 끝난 거 축하해.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나는 와인잔을 들었다.
재일은 내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툰 요리였지만, 그의 웃음 속에서 모든 실수를 잊어갔다.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이런 모습이겠지?' 처음으로 그런 상상을 했다.
“요리는 언제 배운 거야?”
“미국에서 학교 다닐 때. 기숙사 안 가고 아파트에 살았거든. 룸메이트가 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 그냥 따라 해 본 거야.”
“다음엔 나도 해줄게. 잘하는 건 없지만… 괜찮겠어?”
“응.” 짧은 대답을 하며 ‘그럼 재일의 집으로 가야겠지' 생각이 스쳐간다
우리는 갓 사랑에 눈을 뜬 아이들처럼 서툴고 어색했지만, 동시에 어른의 욕망은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어쩌면 더 간절했는지 모른다.
식사가 끝났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재일이 싱크대로 향하는 동안, 나는 와인잔을 홀짝였다.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도는 사이, 스피커에서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설거지를 마친 그가 다시 내 앞에 앉았다. 나는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웠다. 서로의 얼굴 대신 붉은빛이 담긴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뭐 할까?”
침묵을 깨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책 읽을까?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독서모임이 떠올라서.”
“그럴까?”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인 <한여름밤의 꿈>을 집어 들었다.
“이거 어때? 둘 다 몇 번은 읽었잖아.”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그에게 물었다.
“재일아, 전부터 궁금했어. 이 책에서 사랑은 왜 이렇게 쉽게 변할까? 단순히 마법 때문이 아니라… 결국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글쎄. 사랑은 감정이기도 하지만 약속이기도 하잖아. 그런데 감정이 늘 약속의 편에 서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불완전한 사랑들이었을까? 순간의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한…”
“그럴 수도 있지.”
“왠지 슬프다.”
시야가 희미해졌다. 눈물이 맺힌 걸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의 손이 조심스레 내 머리 위에 얹혔다.
“누군가에겐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거야, 수영아.”
재일의 미국행이 다가올수록, 물리적인 거리보다 더 두려운 건 우리 마음의 거리였다.
‘우린…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재일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내 손을 그의 위에 포개었다. 심장 가까이 닿은 그의 손끝으로, 내 맥박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몸을 돌려 그의 눈을 바라본 순간, 우리의 입술이 맞닿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입술을 겹치며 서로의 열기를 주고받았다. 호흡은 점점 짧아지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숨을 내뱉었다.
“후…” 나는 붉게 상기된 재일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다시 거칠게 입술이 포개지며, 그를 붙잡고 있던 내 중심이 무너졌다. 소파에 등을 기댄 나를 그는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내 얼굴을 감싸던 손끝이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쇄골에 닿은 그의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피부를 타고 온몸의 신경을 자극했다.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셔츠 가장자리에 닿았다.
“… 재일아.”
“나… 처음이라서…”
그가 멈칫했지만, 나는 두려움보다 더 큰 열망에 휩싸여 있었다.
“괜찮아… 멈추지 마.”
몸을 비틀어 그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닿을 듯 멀어지던 거리가 무너지자, 공기 속으로 차갑고도 뜨거운 전율이 스며들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자리마다 온몸이 흔들리며, 억눌러 왔던 감정은 마침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 밤, 파도처럼 거세고도 깊은 감정이 우리를 삼켰다.
아침이 되었을 때, 나는 따뜻한 기분에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은 밤새 나를 감싸고 있었다.
"잘 잤어?"
재일이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창피한 마음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랑해 수영아…"
가슴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쩌면 그가 내 첫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영아, 밖에 눈 와!” 눈을 뜨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어, 재일아. 잠깐만… 아, 진짜네? 눈이 오네.”
“올해 첫눈이야. 나 잠깐 가도 돼?”
옷을 급히 챙겨 입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하늘엔 작고 연약한 결정들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집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한 수영이 달려 나와 그대로 품에 안겼다. 우리는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곧 이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우리를 더 애타게 했다. 그리움을 예감한 이들의 매일의 그리움이었다. 나는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커피 마실래?”
수영은 주방으로 걸어가 커피머신을 켰다.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잠을 못 잤어. 급하게 자료 검토 좀 부탁받아서.”
요즘 그녀는 연구실보다 외부 일로 더 바빴다. 언제 봐도 피로가 얼굴에 묻어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늘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여기.”
거실 커튼을 젖히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첫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는 풍경을 보고 있으니, 그날 밤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소파에 스며 있던 체온, 아직 가시지 않은 떨림. 커피의 온기 때문인지, 몸이 더 후끈 달아오르는 듯했다.
“수영아, 크리스마스 때 뭐 할까?”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행, 갈까?”
크리스마스이브, 서울역은 여행객들로 붐볐다. 우리는 부산행 KTX 표를 손에 들고, 플랫폼을 지나 열차에 올랐다.
“나, 기차 처음 타봐.”
수영은 눈을 반짝였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손을 꼭 잡고 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국 갈 준비는 다 했어?”
수영이 물었다.
“응. 필요한 서류는 다 끝났고, 짐은 뭐… 별 게 없어.”
“가면 너 진짜 좋아할 거야. 연구실 스케일이 엄청 다르거든. 아, 그리고 내 친구 몇 명한테 메일 보냈어. 처음엔 그 친구들이 도와줄 거야.”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니 왜인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평소엔 감정을 숨기지 않던 수영은, 유독 미국 이야기가 나오면 차갑도록 이성적이었다. 기다리겠다는 말 대신, 놀러 가겠다는 말로 모든 것을 덮어버렸다.
‘수영은… 나만큼 슬프지 않은 걸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날 때는… 이미 달라져 있진 않을까.’
답답한 마음을 삼킨 채, 우리는 부산역에 내렸다.
“재일아, 밥 먹으러 가자. 나 배고파 죽겠어.”
“그래, 어디 갈까?”
“내가 다 찾아놨어. 우리… 시장으로 갈 거야. 따라와!”
그녀의 손에 이끌려 발걸음을 옮기자, 사람들로 가득한 시장의 온기가 밀려왔다. 수영은 어느새 노점 앞에 멈춰 서서, 김이 피어오르는 어묵을 들고 있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아주머니, 한 꼬치 더 주세요~”
벌써 세 번째였다.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빨갛게 오른 코끝을 들어 올리며, 후후 불어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처음 그녀를 봤던 날의 감정이 겹쳐졌다. 따뜻하고 신비로운 그날의 공기가 다시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배가 안 고픈가 보네. 아가씨는 이렇게 잘 먹는데…”
“제 남자친구요? 원래 덩치만큼 잘 안 먹어요~”
수영은 능청스레 대꾸하며 웃었다. 답답하게 눌러앉았던 마음이 스르르 풀려내려 갔다.
분식을 든든히 먹고 바닷가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해운대는 연인들로 북적였고, 대형 트리와 형형색색의 조명이 바닷바람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차가워진 수영의 손을 잡아 주머니 속으로 감쌌다. 그녀의 눈망울 속에, 푸른빛과 은빛이 섞인 겨울 바다의 파도와 반짝이는 모래알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진 찍을까?”
지나가던 커플에게 부탁해 바다를 배경으로 섰다. 수영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웃음을 지었다.
“하나, 둘, 셋.” 찰칵.
"사진 나한테도 보내줘!"
해맑게 웃는 수영을 눈에 새겼다. 수영의 웃음은, 사진과 함께 곧 추억이 되겠지. 내일이면 그리움이 될.
저녁을 먹기 전, 우리는 숙소로 들어와 잠시 쉬기로 했다.
수영이 예약해 둔 숙소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의 모던한 공간이었다. 방 안에는 큰 침대와 작은 탁자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수영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재일아, 너무 피곤하다… 밖에 너무 추웠어.”
“응, 차라도 끓여줄까?”
미니바 위의 케틀에 물을 올리고 카모마일 티백을 머그컵에 담았다.
“이쪽으로 와, 재일아.”
컵을 탁자에 두고 수영에게 다가갔다. 누워 있던 그녀가 와락 내 품에 안겼다.
“우리 저녁 먹으러 나가지 말고, 그냥 여기 있자.”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그녀를 한 손에 안았다. 수영의 머리칼이 얼굴을 스치며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수영아, 나 사실 좀 무서워.”
“뭐가?”
“겨우 이제야 너를 만나게 됐는데, 또다시 멀어지는 게…”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우리가 떨어져 있는 동안 네가 변할까 봐…”
결국 나는 두려움을 꺼내놓고 말았다. 수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속삭였다.
“재일아, 사랑은 약속이라면서… 우리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수영도 팔을 옮겨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하… 가기 싫다.” 속마음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수영은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잘하고 와. 내가 꼭, 보러 갈게.”
환한 웃음에 나도 함께 웃었다.
쿵. 쿵
"어 무슨 소리야?"
"우와! 밖에 불꽃놀이해!"
커튼을 열었다. 오색의 불꽃이 검은 바다 위로 마법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황홀한 불빛들은 색색의 연기를 남기며 밤하늘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창가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재일아, 메리 크리스마스"
깊어가는 사랑에는 두려운 마음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하지만 사랑 뒤에 남은 두려움은, 결국 사랑으로 덮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