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안녕
“다음 정류장은 하남시청앞입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리는 문 앞에 섰다.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수영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재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나 이것 좀 들어줘.”
재일의 부모님께 드릴 꿀과 꽃다발이 무겁게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꿀이 든 보자기를 건넸다.
“무겁게 왜 이런 걸 들고 왔어?”
“그래도 새해잖아. 전에 반찬 많이 챙겨주셔서… 그냥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어.”
“꽃은 뭐야?”
“이건 어머님 드리려고.”
재일이 피식 웃었다.
“꽃은 너 하나면 되는데…”
그는 바람에 흩날려 얼굴에 달라붙은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떼어주었다. 나는 말없이 잠시 웃었다. 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말이 진심으로 나를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짐은 다 옮겼어?"
"응, 짐이라고 해봤자 작은 가구들이랑 전자레인지가 다라서… 어제 아빠가 와서 차로 옮겨주시고, 미국에 보낼 건 국제소포로 보냈어."
"그래도 일주일이라도 아들이랑 지내니 좋으시겠다, 부모님도."
"어, 나도 부모님 집에서 자는 게 오랜만이라 어색해."
"오늘은 집으로 가는 거지?"
"응, 오늘은 가게 문 닫았어."
"후, 긴장된다."
"뭐가?"
"전엔 친구였다가, 갑자기 여자친구라고 하는 게."
재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돼, 다 잘 말씀드려놨어."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어, 누나! 엄마, 수영 누나 왔어요.”
문 앞에는 재현이 서 있었다. 딱 한 번 마주한 적밖에 없었지만, 미국 여행 내내 영상통화로 인사를 나눈 사이라 낯설지가 않았다.
거실에서는 재일의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처음 뵌 날처럼 환하게 우리를 맞아 주셨다. 나는 준비해온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머, 이게 너무 예쁜 꽃이네요. 예쁜 아가씨가 이런 걸 다…”
어머니의 눈웃음에 손 끝의 긴장이 풀어졌다.
“엄마, 수영이가 이것도 사 왔어.”
재일이 꿀이 담긴 보자기를 내밀자 재일의 어머니가 손사래를 치셨다.
“그냥 오지… 다음부턴 꼭 그냥 와요.”
말씀과 함께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어머니, 그냥 수영이라고 편하게 불러주세요…”
내 말에 재일이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요, 엄마. 편하게 해.”
“그럴까? 그래, 수영아.”
다들 식사 준비로 분주한 사이, 나 혼자 거실에 앉아 있자 재현이 다가왔다.
“누나, 잘 지냈어요?”
“응, 너도 잘 지냈지?”
우리는 가볍게 안부인사를 나눴다.
“누나, 우리 형 이제 어떡해요?”
“응? 뭐가?”
“맨날 누나 보고 싶어서 울 텐데… 공부는 하려나 모르겠어요. 전에 미국 갔을 때도…”
“재현아!”
재일이 급히 말을 끊었다. 나와 재현은 마주보며 웃음을 참았다.
재현은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며 속삭였다.
“누나, 이따 전화번호 좀 알려주고 가요. 우리 둘이 따로 얘기해요.”
재일의 아버지는 재일만큼이나 말수가 적으셨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시거나 짧게 맞장구를 치는 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수영이는, 앞으로 계속 한국에 있을 건가?"
재일의 아버지였다. 나는 짐짓 놀라 말을 더듬었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시선이 재일에게로 향했다.
“그럼, 넌 포닥 끝나고 한국으로 다시 들어오는 거냐?”
“어, 내가 올 거야.”
재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포닥은 보통 얼마나 오래 하지?”
“2년.”
“3년 정도요.”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2년이 넘어? 와, 군대보다 더하네…"
재일이 재현에게 눈을 흘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둘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네, 그래야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 자리에서도, 이후 차를 나누는 시간에도 화기애애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웃음이 오가며 시간이 지나, 어느새 창밖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그날, 누나도 공항에서 보는 거예요?”
재현이 물었다.
“응, 나도 갈 거야.”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수영아, 재일이 없어도 집에 종종 놀러 오고 그래.”
그 말에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친구들 데려와도 좋다. 밥은 항상 공짜니까.”
가족들의 따뜻한 말들이 낯설고도 고마웠다. 괜스레 웃으며 “네” 하고만 대답했다.
“엄마, 나 수영이 데려다주고 올게.”
재일의 말에 재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나도 같이 나갈까?”
“아니, 나… 서울 갔다 올 거야.”
모두의 시선이 재일에게로 향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지만, 누구도 더는 묻지 않았다. 말없이 주고받은 눈빛 속에,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암묵적인 동의가 대답을 대신했다.
버스에서 오는 내내, 나는 재일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따뜻한 품도 당분간은 없겠지…’
울컥 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눌러야 했다.
재일은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아파트 현관 앞에 서서, 여느때처럼 길고 어색한 작별 인사가 시작됐다.
“재일아, 얼른 가. 집에 밤늦게나 도착하겠다.”
“나… 오늘 안 들어가려고.”
“응?”
“도저히 못 가겠어. 떨어져 있으려니까 1분 1초가 아까워… 아무래도 너랑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아.”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내 마음까지 흔들었다.
나는 작게 숨을 들이마신 뒤,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들어와.”
그 밤, 더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서로의 시간을 붙잡고 싶었으니까.
그와 함께한 하루는 이틀이 되었고, 이틀은 다시 사흘로 이어졌다.
출국 전날이 되어서야, 재일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갔다.
오지 않기를 바랐던 그날은 결국 찾아왔다.
인천공항 출국장 앞, 재일의 가족들과 내가 함께 서 있었다.
“재일아, 가서 밥 잘 챙겨 먹고, 집에 전화도 자주 하고.”
“공부한다고 너무 앉아만 있지 말고, 친구도 사귀고. 뭐,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형, 가서 잘해. 나 조만간 놀러갈게. 그리고 누나는 내가 잘 지켜 드릴게.”
재현의 유쾌한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재일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 영영 가는 거 아니야. 연말쯤이면 다시 나올 거야. 그때 또 보자.”
"그리고 수영아."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매일 연락할게."
재일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레 넘겨주었다.
“응, 나도.”
애써 웃어 보였지만 눈가가 이미 뜨겁게 타올랐다. 떠나는 그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내 귓가에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너무 많이."
고여 있던 눈물이 결국 한 방울 떨어졌다.
"가… 늦겠다."
뒤돌아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게이트로 들어가는 재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지막으로 마주쳤다.
나는 마지막 용기를 내 입모양으로 말했다. 사랑해.
재일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어깨가 작게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내 어깨마저 흔들렸다.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흐느꼈다. 곁에 있던 재일의 가족들이 조용히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사랑은 결국 우리를 울게도, 웃게도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서로의 행복으로 나누던 사랑을, 이제는 긴 그리움으로 견뎌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어? 잠깐… 너 혹시 Sue 남자친구야?”
내리던 교수 한 명이 물었다.
“네… 맞는데요.”
교수는 반가운 듯 옆 사람을 향해 외쳤다.
“야, 이 친구가 Sue 남자친구야!”
“진짜? 그 2년 만에 논문 세 편이나 낸 친구?”
“맞아. 나한테 남자친구가 포닥으로 올 거라고 했어.”
낯선 시선들이 한꺼번에 나를 향했다.
“그때 미국 최고 대학들에서도 잡 오퍼가 많았었어. 그런데 한국으로 간다고 해서 놀랐는데. 맞다, Sue가…”
교수는 무슨 말을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음에 기회되면 또 이야기 하지.”
“아… 네.”
나는 그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온 지 두 달이 되었다.
이곳의 하루는 숨 가쁘게 흘러갔다. 아침부터 밤까지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동료들은 친절했고, 낯선 도시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하지만 공허함은 오히려 그 익숙함 속에서도 깊어져만 갔다. 퇴근길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늘 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움은 늘 마음 한편을 시리게 했다.
새벽 여섯시, 잠에서 덜 깬 채로 수영과 영상통화를 하는 그 시간이 내 하루의 행복이었다.
“재일아!”
화면이 켜지면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영아, 오늘 어땠어?”
“피곤해. 이번 학기 강의도 많고, 공동연구도 겹쳐서…”
수영의 눈가에 그늘이 졌다. 책상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말보다 더 많은 피로가 느껴졌다.
“그래, 많이 힘들었겠다.”
“아니야, 그래도 네 얼굴 보니까 괜찮아졌어.”
“어제 우연히 너 아는 교수님들 만났어.”
“누구? 혹시 매건 교수님?”
“응, 맞아. 칭찬을 몇 마디 하시다가 급히 가시더라.”
표정이 순간 불편해진 수영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이유 모를 걱정을 느꼈다.
출근 준비 시간이 다가왔다.
“나 가봐야 해.”
“응, 오늘도 힘내.”
“너무 보고 싶어.”
“나도, 너무.”
짧은 통화는 우리의 그리움을 덜어 주지 못했다.
실험실 정리를 마무리하던 참이었다.
“주말에 레드삭스 경기 보러 갈 사람!”
“오! 언제?”
“토요일 오후.”
“재일, 너도 갈래?”
“응, 그럴까?”
옆자리 친구가 나를 흘끗 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근데 넌 왜 맨날 피곤해 보여? 설마 집에 가서도 논문 쓰는 거 아냐?”
“아니야… 여자친구가 한국에 있어서. 시차가 13시간이라 매일 새벽에야 통화를 할 수 있거든.”
“와, 장거리야? 힘들겠다. 나도 예전에 독일에 여자친구 있었는데, 그때 장거리라 진짜 고생했어.”
또 다른 친구가 끼어들었다.
“장거리는 솔직히 쉽지 않지. 그리고 너 포닥 끝나면 어디로 갈지도 아직 모르잖아?”
나는 잠시 말을 고르고 나서 대답했다.
“그러게. 여자친구가 한국에서 교수라, 나도 여러모로 압박이 있긴 해.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근데 너는 독일 여자친구랑은 어떻게 됐어?”
“헤어졌지.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지고, 서로 버거워지더라고.”
그 말들이 내내 맴돌았다.
그리움과 설렘을 넘어, 멀고 먼 우리의 거리는, 사랑의 여러 얼굴을 차례로 드러내고 있었다.
실험실에서 나가는 길에, 수영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재일아,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라, 끝나고 전화 통화는 못 할 것 같아."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터벅터벅 걸었다.
다음 날 아침, 회식을 할 거라는 수영의 말에도, 나는 같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혹시 모르니 전화해볼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신호가 여러 번 지나고, 전화를 끊으려던 차에 수영이 받았다.
"여보세요? 재일아."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음악소리, 웅성이는 사람들의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혹시나 해서 전화했어. 회식중이야?”
"응,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야… 그냥.”
그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영 교수님, 어, 통화 중이셨어요?"
잠깐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재일아, 나 들어가봐야 할 것 같아. 끝나면 메시지 할게."
"어, 그래."
전화를 끊었지만 하루 종일 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메시지 보내서 누구였냐고 물어볼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하지 말자.'
보이지 않는 그곳의 수영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불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종이에 불이 옮겨 붙듯, 가슴 한쪽 모서리가 서서히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통화 중 수영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 2주 뒤에 캐나다에서 아빠가 오셔서, 아마 며칠간은 통화가 힘들 거야. 그래도 메시지는 할 수 있어.”
“갑자기? 미리 말씀도 안 하신 거 아니야?”
“어, 그게… 출장 일정이 바뀌면서 한국에 며칠만 경유를 하신대서…”
"알겠어."
수영의 말이 석연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추궁할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자리에 앉아 맥주 캔을 따서 입에 가져갔다. 책상 위 사진 속에서, 겨울 바다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우리가 보였다.
'아직 세 달도 안 됐어…'
가슴속에 무거운 돌이 짓눌렀다. 매일 조금씩 더 세게. 화를 내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수영의 눈을 보면, 그럴 수가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사랑한다 말했지만, 멀리 떨어진 거리만큼 그 말이 닿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함없이 그녀를 사랑했다.
그렇게 보스턴에서의 첫 계절이 저물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