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화. 너에게로 가는 길

by 아타마리에

2024년 5월 (by 수영)


집 앞에서,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그의 온기와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의 울림은 좀처럼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괜히 대학교 홈페이지를 이곳저곳 들락거렸다.

“MIT, 하버드… 또 뭐 있지? 보스턴에는?”

재일의 MIT 포닥 소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쿨한 척 응원이나 늘어놓았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하아…’ 숨을 내뱉자마자 다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정말로 그럴 자신이 있었을까.

‘기본 2년, 아니면 3년...? 그러고 나서 미국에서 교수 제안이라도 받으면…?’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몰려왔다.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MIT에서 포닥을 마치고 돌아올 무렵, 하버드와 몇몇 대학에서 조교수 제안을 받았었다. 게다가 MIT 교수들조차 곧 자리가 날 거라며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모든 게 지쳐 있었어.’

어린 시절의 상처 속에 처절히 갇혀 있던 나는, 우진을 향한 사랑조차 놓지 못한 채 버거운 날들을 견뎌야 했다. 결국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한국행을 택했고, 그 선택을 후회하는 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기억 속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연구 환경이 다르니까…’

재일을 만날 때마다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의 곁에서 보내는 시간은 한겨울의 따뜻한 온기 같아서, 내 삶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소중했다. 그래서인지 그와 떨어질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이 저리게 아파왔다.


사랑이 시작되자, 행복에 대한 욕심은 끝을 몰랐다.

오늘만 같기를 바라던 나는, 어느새 우리가 함께할 미래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약 없는 갈망은 때때로 오늘의 행복마저 위태롭게 흔들어놓곤 했다.


결심이 섰다.

등을 곧게 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메일 창을 열고, 떨리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매건 교수님께,
안녕하세요, 수영입니다. 요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며칠 전 MIT에서 공지된 조교수 포지션 공고를 보고 교수님이 떠올라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마감일 하루 전, 나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커튼을 열었다. 창문 밖 하늘은 어둑어둑하게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곧 해가 떠오르려는 모양이었다. 그 고요한 새벽, 작고 하얀 눈이 창가를 스치듯 내려앉았다.

‘첫눈이네.’


재일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 잠을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주방으로 가는 도중, 전화벨이 울렸다.

“수영아, 지금 집으로 가도 돼?”


나는 커피 머신을 끄고, 다시 거실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의 이별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는 오히려 더 가까워졌다. 매일 목소리를 들었고, 매일 얼굴을 확인하며, 서로에게 물들듯 스며들었다.


하지만 오지 않을 것 같던 그날은 결국 찾아왔다. 공항에서 그를 보낸 지 며칠 동안, 나는 텅 빈 마음으로 침대에 누워 그의 체취만을 되새겼다. 그러던 중 MIT에서 서류 합격 통보가 도착했다. 마음속에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인터뷰 준비에 매달리느라 매일 밤을 새웠다.


영상통화 속 재일은 점점 수척해져 갔다. 나 또한 잠을 잊은 채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억지로라도 웃어야 했다. 새벽마다 나와 통화하려고 일어나는 그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었다.



어느 날, 졸업을 맞은 제자들과 회식차 학교 근처의 작은 술집을 찾았다. 축하로 가득한 자리에서 웃음과 건배가 이어졌다.

“교수님 덕분이에요. 사실 전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이 모든 걸 어떻게 해내셨는지.”

학생의 말에 나는 웃으며 잔을 들어 답했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재일이었다. 반가움에 서둘러 받았지만, 술집 안은 너무 시끄러워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재일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화장실에서 돌아온 학생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수영 교수님, 통화 중이셨어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재일의 목소리는 여운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오늘도 피곤했을 텐데… 조금은 더 자야 할 텐데.’



화상 면접을 마치고 며칠 뒤, 메일함에 두 번째 연락이 도착했다.

“캠퍼스 미팅 일정은 월 일부터 사흘간 진행될 예정입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벌써… 2차까지?’

벅찬 감정 뒤로, 설렘보다 먼저 밀려든 것은 불안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재일의 이름 위에서 손가락이 오래 망설였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미국에 가 있는 동안은 최소 사흘은 통화를 못 할 텐데…’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거짓말하는 것도 지친다… 그냥 털어놓을까? 그래도 지금은 아직, 결과도 모르는데… 괜히 기대만 키우고 실망을 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망설임 끝에 긴 숨을 내쉬었다.

“후…” 나는 또다시, 다른 핑계를 만들었다.

“캐나다에서 아빠가 오셔서, 며칠은 통화를 못 할 것 같아.”

다행히 재일은 별 의심 없는 듯 믿어 주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죄책감이 남았다.


면접 일정이 다가오자 초조함이 가슴을 채워만 갔다. 결국 미안함을 뒤로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오랜만에 찾은 캠퍼스는 여전히 싱그러웠다. 낯익은짙은 회색빛 건물들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드리운 잔디밭은 마치 어제 만난듯, 익숙하게 나를 맞이했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번지는 하얀 공기 속에서, 시작과 끝이 교차하던 그때의 나와 생생히 눈을 마주쳤다.


캠퍼스 카페테리아에 앉아 교수들과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문득 시선이 멈춘 곳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순간 숨이 멎는 듯,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재일이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익숙한 걸음걸이, 무심히 흘러내린 앞머리, 그리고 나를 찾지도 못한 채 동료와 대화를 이어가는 표정까지. 매일을 그리워한 그가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로 다가왔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어느새 내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안 돼… 지금은 아니야.’

심장의 두근거림이 온몸을 흔들어 정신이 아득해졌다. 떨리는 손끝에서 미끄러질 듯한 컵을 간신히 내려놓았다.


재일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 울림이 다가올수록 나는 의자 끝으로 몸을 움츠렸다. 얼굴을 들면 모든 게 끝나 버릴 것 같았다. 숨소리라도 들킬까 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때, 옆에 앉아 있던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다 마셨으면, 나가자.”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재빨리 옆문을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뒤에서 재일의 그림자가 나를 붙잡을 듯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힘이 풀린 다리로 문 밖에 기대어 서서 한참이나 가슴을 움켜쥐었다.

‘휴…’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겨우 호흡을 가다듬고 학과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책상 위에 놓아둔 휴대폰 화면이 메시지 알림으로 반짝였다.

“수영아, 오늘도 피곤했지? 아빠랑 대화는 잘했어? 푹 자. 사랑해. 보고 싶어.”


나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떨궜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훔치며, 바로 지금이라도 그의 품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최종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갑갑한 마음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내 거짓말이 단순한 거짓으로 남지 않기를, 그를 향해 가는 또 다른 길이 되기를 바라며 발표일만 기다려야 했다.

책상 위에 놓인 겨울 바다의 사진 속, 우리 두 사람의 미소를 수없이 들여다보며 마음을 붙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일함을 열었을 때, 기다리던 소식이 있었다.


이수영 교수님 귀하, 귀하에게 오퍼를 드리기로 학과에서 투표를 통해 결정했음을 기쁘게 알려드립니다.


화면 위의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아… 정말… 진짜야?”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래 닫혀 있던 가슴속 문이 천천히 열리고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 메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연구자로서의 새로운 시작,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갈 수 있는 길.

설렘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이 벅차오른다. 기쁨은 눈시울을 뜨겁게 했고, 불안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제, 우리의 미래가 조금은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러분, 곧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현지 시각은 오전 6시 30분이며…”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빛이 스며든 새벽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그 아래로 보스턴 하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잔히 빛나는 바다 위 낮게 드리운 구름, 고요한 풍경이 오래 기다려온 약속의 장소처럼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가슴 안쪽에서 알 수 없는 전율이 퍼졌다. 설렘과 두려움 대신, 그를 향한 그리움과, 잊고 있던 꿈에 대한 향수가 한꺼번에 고개를 들었다. 비행기는 점점 낮게 활공하다 활주로를 향해 기울어졌다.

곧 기체가 큰 진동과 함께 활주로에 닿았다.


똑똑똑.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떨리는 손끝으로 문을 열었을 때, 동료들 사이에 재일이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한꺼번에 치솟아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하세요. 새로 온 화학 교수인데… 실험실을 잘못 찾았네요.”


재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놀란 표정에서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뛰쳐나왔다. 나도 그를 향해 달렸다.

내 사랑이, 드디어 목적지에 닿았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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