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다시 첫사랑을 만났다
모처럼 조용한 오후였다. 며칠째 보스턴에는 폭설이 내렸고, 히터를 오래 틀어둔 집은 포근하게 데워져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두텁게 쌓인 나뭇가지 위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바람에 깃털을 곤두세우고 몸을 둥글게 만 그 모습은, 한겨울의 적막 속에 피어난 생명처럼 연약하고도 단단해 보였다.
‘춥지도 않을까?’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머리를 풀어내려 질끈 묶고, 안경을 고쳐 쓰며 파일을 열었다.
‘짧고 굵게 끝내자. 오늘은 더 미루지 말고.’
숨을 고르고 집중하려던 순간, 방문이 열렸다.
“하… 나 발표가 코앞이야.”
잔뜩 울상을 한 재일이 내 옆 의자를 끌어와 앉아 노트북을 켰다.
“재일아, 나 지금 논문 빨리 봐야 해서… 물 좀 가져다줄 수 있어?”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뒤, 김이 피어오르는 카모마일 티 한 잔이 내 책상 위에 놓였다.
“찬물 마시면 안 좋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미소로 답했다.
재일은 다시 내 옆에 앉았다.
딱, 딱. 두 대의 키보드 소리가 규칙적인 파동처럼 이어져, 방 안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재일아, 그 서랍에 파란 파일 좀 줄래?”
그는 말없이 파일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
십 분쯤 흘렀을까. 정적이 흐르던 방이 울렸다.
“아아아앙, 아아앙!”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재일아, 한 번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옆방으로 갔다.
잠시 뒤, 나를 부르는 재일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아, 네가 와줘야 할 것 같아.”
나는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방 문을 열자, 속싸개에 감싼 아기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막 잠에서 깬 눈동자가 커지더니, 작은 울음이 방 안의 고요를 깨웠다.
“배고픈가 봐?”
“아니야, 기저귀야.”
기저귀갈이대에 아기를 눕혔다. 작은 몸이 부드럽게 뒤척일 때마다, 내 손의 찬기가 스칠까 조심스러웠다. 이내 아기의 온기가 스며들어, 손끝은 따뜻해지고 방 안의 공기마저 서서히 데워지는 듯했다. 다시 속싸개로 포근히 감싸 주자, 허공을 더듬던 작은 손가락이 불현듯 내 손끝을 붙잡았다.
나는 아기를 안은 채 침대에 앉았다. 재일도 곁에 몸을 붙이고 앉아, 우리는 한참 동안 작은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쩜 코가 이렇게 예쁘지? 코는 엄마 닮은 것 같은데.”
“아냐, 이마는 완전 너야…”
“발은 왜 이렇게 조그맣대.”
재일이 아기의 발을 손바닥 위에 올려 살며시 감쌌다. 새싹 같은 작은 발이 그의 손 안에서 꿈틀거리자, 그의 눈동자에 잔잔한 빛이 감돌았다.
“진짜… 천사 같다. 완전히… 작은 너야.”
그는 아기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켜둔 컴퓨터 화면은 잊힌 채, 우리의 시선은 한동안 아기에게 머물렀다. 작은 숨결이 점점 잦아들더니, 마침내 아기는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방 안은 우리 둘, 아니 셋의 온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첫사랑을 만났다.
여러분, 드디어 길고 긴 시간을 지나 수영의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네요.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니, 괜히 울컥하는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시 첫사랑을 만났다>는 잃어버린 과거의 사랑을 되짚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진과의 첫사랑은 수영에게 아픔을 남겼지만, 어쩌면 그것은 동시에 다시 살아갈 힘이기도 했습니다. 상처와 결핍 속에서 수영은 자기 자신을 되찾았고, 다시 재일을 만나 또 다른 ‘처음’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사랑은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변화한 오늘 속에서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구에게나 사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첫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그 안에서 사랑이 새로운 색과 다른 결로 다가올 때마다, 우리는 다시 첫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 누군가와 함께 울고 웃으며 하루를 쌓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첫사랑이 아닐까요?
수영과 재일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내일은 혹시나 아쉬워하실 분들을 위해 우진의 일기장을 공개하려 합니다. 본편을 먼저 읽고 나서 보신다면, 아마 더 깊이 와닿을 거예요.
끝까지 함께해 주신 작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잠시 본업모드로 돌아갔다가, 새로운 글로 찾아뵐게요. 추석 연휴 풍성하게 보내시길 바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