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0일.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 아이를 보았다.
축제 공연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기타 줄을 조율하던 중이었다. 강당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고, 무대 아래로 내려갈 여유조차 없었다. 공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문득 시선이 무대 앞줄에 머물렀다.
낯선 얼굴. 동양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흰 피부와 작은 체구의 그녀는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이 없는 듯한 눈빛과 안쪽에서 빛나던 검은 눈동자. 마치 깊고 투명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공연이 시작되고 끝나는 내내, 시선은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흔들고 노래를 불러도, 머릿속은 온통 그 아이뿐이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수많은 발자국 소리로 가득했던 강당은 금세 고요를 되찾았고, 나는 홀로 텅 빈 공간에 남아 있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로,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2009년 9월 28일.
“우진, 바로 밴드 연습 가는 길이야?”
“응, 기숙사에 뭘 두고 와서 잠깐 갔다 올게.”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가 끝나고 3층 밴드 연습실로 향하고 있었다. 창밖 하늘은 싸늘할 정도로 푸르렀다. 교정에 늘어선 나무들은 잎을 하나둘 떨구고, 발밑엔 낙엽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 길 아래로 누군가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이였다.
“어…?”
나는 무심코 그녀의 발걸음을 눈으로 따라갔다. 그녀는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3층 계단에 서 있던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뛰어내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1층엔 없는데…?”
2층으로 올라가 책장 사이를 헤매던 끝에, 한쪽 구석자리에 앉은 그녀를 발견했다. 이어폰을 꽂은 채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다가 조용히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도서관으로 향했다. 구석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책을 읽는 그녀를 보기 위해.
“너 왜 요즘 연습에 자꾸 늦어?”
“어… 나, 끝나고 선생님이 부르셔서.”
밴드 멤버들에게 둘러대며, 사실은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다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몰랐다.
어느 날, 도서관에 올라갔을 때 그녀가 책장 사이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돌아가 앉는 모습. 그녀가 가져간 자리 옆에 같은 책이 하나 더 꽂혀 있었다.
‘오만과 편견’ 만화책밖에 읽지 않던 내가, 그날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녀가 읽던 그 책을, 나도 함께 읽기 시작한 것이다.
2009년 10월 11일.
여느 때처럼 도서관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밖이 어둑해졌을 무렵, 그녀는 책을 덮고 일어나더니 자리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떠난 자리 옆에, 이어폰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어? 이거 아까 듣고 있던 거 같은데…”
나는 무심코 그것을 주워 들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가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아마도 잊고 간 이어폰을 찾고 있는 듯했다.
“이거, 네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녀에게 건네는 첫마디였다.
“어… 맞아. 고마워.”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맑고 흰 피부,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아래에 고여 있는 검은 눈동자, 붉그스름한 입술.
“한국 사람은 학교에 많이 없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라 바로 알아봤어. 나는 김우진이야. 11학년이고, 너는?”
“나는 이수영이야. 얼마 전에 다른 학교에서 전학 왔어. 10학년이야.”
“그럼 내가 오빠네? 우진 오빠라고 불러.”
잠들어 있던 신경들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마음의 요동과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떨림이 시작된 그날, 기숙사로 돌아온 나는 책상에 앉아 그녀의 이름을 수없이 되뇌었다.
이수영.
밤새 머릿속에 그 눈동자를 그렸다 지우느라, 잠은 오지 않았다. 그날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었던 밤이었다.
2010년 2월 10일.
나와 수영은 금세 가까워졌다.
늘 어딘가 슬픔이 비친 얼굴, 맑고 청아한 목소리는 매일 나를 그녀에게 끌어당겼다.
나는 그녀가 읽고 난 책을 매번 빌려 읽었다.
“오빠, 위대한 개츠비 읽어봤어?”
“아니야, 어때?”
“진짜? 이거 꼭 읽어봐. 개츠비가 엄청난 욕망을 가진 사람인데, 그 마음이 너무 궁금해서 나는 여러 번 읽었어.”
책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수영의 눈빛이 환하게 빛났다. 활짝 웃다가도 금세 눈가가 촉촉해지고, 그 감정의 결에 온전히 몰입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응, 꼭 읽어볼게.”
우리는 눈이 소복이 쌓이던 날에도, 다시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내리던 날에도 함께였다. 도서관 창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며, 때로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며. 내 옆자리에 수영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2010년 3월 20일.
“우진, 오늘도 연습 때 Sue 올 거야?”
“어. 왜?”
“나 어제 교내 신문 읽고 알았잖아. 걔 완전 천재라며?”
“토론토 대표로 캐나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는데, 결국 국제올림피아드 대표로 뽑혀서 1등까지 했다더라.”
“그러게, 맨날 책만 들고 다니더니. 천재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아…”
친구들이 수영의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우리 학교에서도 하버드나 MIT 가겠네. 맨날 보던 사람이 달라 보이네.”
나는 대답 대신 어설픈 웃음을 지어야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작은 체구가 더 이상 작아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내 모습이 그녀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지 궁금해졌다. 기타를 메고 연습실을 드나드는 평범한 나를,
그녀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2010년 4월 15일.
도서관 문이 닫히는 시간에 수영과 나는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 너무 시원해. 그렇지, 오빠?”
수영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달빛이 비친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맑아 보였다.
“어… 기숙사로 갈 거야?”
“응. 가지 말까?”
그녀는 장난스레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은 때때로 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마도 가슴을 졸이는 건 나 혼자였겠지만.
“장난이야. 오빠, 나랑 잠깐 여기 앉아 있다 가면 안 돼?”
“여기, 선생님들 지나다니실걸.”
나는 괜히 둘러대며 수영을 데리고 밴드 연습실로 향했다. 열쇠를 찾는 손끝이 이상하게 초조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연습실 문이 열렸다.
“불 켜면 안 될 것 같아…”
수영이 속삭였다.
서로의 얼굴조차 뚜렷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그곳에서 우리는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처음으로, 수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었다. 태어나던 순간 세상을 떠난 엄마 이야기. 여섯 살 무렵 아빠 손에 이끌려 캐나다로 오게 된 사연. 늘 혼자여야 했던 어린 날들. 눈물 한 방울 없이 담담히 흘러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가슴이 무너질 듯 저려왔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도 몰라, 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어렵게 입을 열었다.
“수영아, 괜찮아… 지금은?”
그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응, 괜찮아. 오빠가 있으니까… 이제는.”
침묵 속에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만이 남았다.
나는 눈물을 머금은 숨소리를 들킬까 봐, 뒤돌아서서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찌릿한 전류 같은 떨림이 심장에 남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돌아서 숨을 고르는 습관이 생겼다.
2010년 6월 28일.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기숙사의 많은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우진아, 방학인데 집에 들어와야지.”
“엄마, 이번 방학은 특별 활동이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내년이면 마지막 학년이라 캐나다 친구들도 다 참여하는 거라서…”
나는 집에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기숙사에 홀로 남을 수영 때문이었다.
방학 내내 우리는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냈다. 가끔은 어두운 밴드 연습실에 숨어 단둘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곧 멎을 것만 같았다.
그날도 수영과 헤어진 뒤 기숙사 방에 돌아왔다. 창밖엔 달빛이 쏟아지고, 더운 여름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었다.
‘수영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보고 싶은데…’
나는 점점 그녀의 얼굴, 눈빛, 목소리에 중독되어 갔다. 그럼에도 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한 채 멈춰 서 있었다.
수영은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따뜻하면서도 차갑고, 부드러우면서도 늘 이성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 눈빛은 때론 원망스러울 정도로 나를 떨리게 했다.
결국, 무슨 용기였는지 모자를 눌러쓰고 창문을 넘어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1층이라 어렵지 않았다. 방학이라 복도는 적막했고, 나는 건물 사이를 숨듯 지나 여자 기숙사 창문 앞으로 뛰었다.
“창문 좀 열어줘.”
놀란 눈빛으로 수영이 창문을 열었다. 나는 재빨리 창틀을 붙잡고 안으로 뛰어올랐다.
어두운 방. 독서등마저 꺼졌다. 달빛만이 희미하게 수영의 얼굴을 드러냈다. 낯선 용기가 곧바로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어쩔 줄 몰라 침대에 앉아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 수영이 입을 열었다.
“음악 들을래?”
나는 그녀 옆으로 옮겨 앉았다. 좁은 침대에서 몸이 닿았다. 팔과 팔이 스칠 때마다 피부는 열기를 머금었다.
수영의 손끝이 내 손끝에 닿았다. 나는 떨림을 감추지 못하고 손을 들어 그녀의 팔 위에 올렸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녀의 손목을 따라 내려간 내 손이, 반바지에 드러난 그녀의 다리에 닿았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정적 속에 새어 나왔다.
수영의 머리가 내 어깨에 기댔을 때, 나는 더 가까이, 그녀를 감싸고 싶었다. 그러나 땀에 젖은 손은 그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아 같은 자세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수영은 거대한 파도 같았다. 거칠고, 때로는 눈이 부시게 찬란해서, 가까워질수록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무서웠다.
그녀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나는 거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자꾸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두려웠다. 혹시 내가 그녀를 망가뜨릴까, 아니면 내 마음이 더 깊이 상처받을까.
나는 도망쳐야 했다.
2010년 12월 5일.
수영은 어두운 밤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꽃같았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불꽃이 꺼지면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 나는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늘 그녀 곁을 맴돌았다.
“오빠, 방학 때 토론토에서 홈스테이 하면 안 돼? 기숙사 문 닫는다고 해서… 난 아빠 집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나는 또다시 수영에게도, 부모님께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도서관을 나와 작은 카페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언 장갑을 벗어 손을 녹이던 수영의 손끝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잡아주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오빠, 내년에 어떻게 할 거야?”
“응?”
“대학 말이야. 생각해 놓은 데 있어?”
“글쎄… 토론토가 우선이긴 한데. 뭐, 열심히 해봐야지.”
“오빠는 잘할 거야.”
“너는?”
“나? 난 내년에 SAT 보려고 해.”
눈을 깜빡이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알았다.
‘수영은 미국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짧은 순간이라도 내가 그녀의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수영은 언제나 자신의 앞에 놓인 길을 잡아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늘 제자리에 머문 채, 그녀의 뒷모습만 좇고 있었다.
홈스테이 집으로 돌아와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미국 대학교 준비할까?”
“우진아… 글쎄,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
“전에 엄마가 토론토로 가라고 했잖아. 토론토에 남나 미국에 가나, 다 비슷하잖아.”
“그게… 휴… 사실 아빠 사업이 어려워져서… 졸업하고 한국으로 오는 게 어떻겠냐고 얘기하려던 참이었어.”
“뭐라고?”
“아직 결정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 대학교에 특별 전형 같은 게 있으니까… 알아보면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전화를 끊었다. 창밖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2010년 12월 25일.
수영을 만나기로 한 크리스마스였다. 꼭 만나야 한다는 그녀의 눈빛 속에 담긴 간절함에 나는 또다시 빨려 들어갔다. 설레는 마음에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밤새 내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설마 내일은 그치겠지…’
아침, 창밖은 하얗게 묻혀 있었다. 폭설이 내려 제설차들이 바삐 오가고, 이웃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눈을 치우고 있었다.
나는 하루 종일 기타만 만지작거리며 전화를 기다렸다. 저녁 무렵, 수영의 전화를 받았다.
“아무래도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못 나갈 것 같아. 가족이랑 저녁도 먹어야 하고…”
아쉬운 마음이 눈처럼 불어났다.
“모르겠다.”
나는 점퍼를 걸치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발밑 눈이 부츠 속으로 스며들며 차갑게 젖어갔다. 눈이 어느 정도 치워진 큰길엔 버스가 운행을 시작했고, 나는 수영의 집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수영아, 나 너희 집 앞이야.”
막상 만나고 싶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수영은 나를 데리고 공원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불현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오빠, 나 오빠 좋아해. 우리 사귀자.”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말에 머릿속이 새까맣게 지워졌다. 온몸이 긴장으로 조여오기 시작했다.
“오빠도…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얼어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게…”
“그런 거 아니었어? 우리?”
머릿속에는 수영의 미국행, 어제 엄마와의 통화, 정리되지 않은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켜 있었다.
“오빠는 아직 아니야… 수영아.”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가 미국으로 간다 해서 그런 거야? 그럼 오빠도 나랑 같이 미국 가면 되잖아. 아니면… 나한테 토론토에 남으라고 말할 수도 있잖아.”
수영의 말에 더 선명해졌다. 나와 그녀의 다른 삶, 다른 길. 내가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나는 뒷걸음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난 아직… 그냥, 너랑 오빠 동생처럼 지내고 싶어.”
그 자리만큼은 지켜내고 싶었을까. 내가 살 수 있게… 그녀가 나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수영은 등을 돌려 떠났다.
눈이 무겁게 쌓인 길 위에 발자국이 하나둘 남았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도 그렇게 차가운 눈 속에 잠기며, 서서히 얼어붙고 있었다.
2011년 6월 12일.
“너희 그 소식 들었어? 우리 학교 10학년 여자애…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잖아.”
“어, 진짜 고등학교 수준이 아니었대. 며칠 전엔 기자들까지 몰려왔다더라.”
학교는 온통 수영의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전체 학생 조회에서, 수영은 전교생 앞에 서서 자신이 발표한 연구를 간략히 설명했다. 마이크를 잡은 목소리는 또렷했다.
“제가 이 연구를 시작한 건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나는 숨을 삼켰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그녀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도서관 구석자리에 앉아 책을 읽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빛나는 조명 아래 선 그녀는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멀리 아득한 곳에 있었다.
그렇게 수영은 나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더 멀어져 갔다.
2011년 10월 20일.
오늘도 우연히 수영을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피한 채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여전히 수영의 슬픈 눈동자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가슴 깊은 곳이 짜내듯 아려왔다.
나는 자주, 도서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수영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하면 될 거리였지만, 그 한 걸음을 끝내 내딛지 못했다.
멀찍이서 그녀와 함께 읽었던 책을 꺼내 보았다.
벤치에 앉아, 한때는 책을 사이에 두고 웃음을 나누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 빛이 나던 그녀의 웃음이 선명히 새겨진 내 심장을 여전히 두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기억에만 매달려 있어야 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점점 멀어지고, 나와는 다른 시간 속을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우리는 끝인 걸까.’
2012년 1월 18일.
수영이 조기 졸업을 하고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친구에게서 전해 들었다. 작은 입으로 베이글을 오물거리며 “미국에 가고 싶다”라고 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어쩌면 그녀를 축하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도서관 앞을 서성거렸다. 문이 닫힐 시간이 다가오자, 불이 꺼지고 안에서 짐을 챙기는 그녀의 실루엣이 보였다.
나는 또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바보 같은 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보냈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어둠을 바라보았다. 눈처럼 차갑고 고요한 공기 속에서, 내 마음도 함께 굳어져 갔다.
2012년 8월 30일.
수영이 떠나고, 나는 여전히 차가운 토론토의 공기 속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아침부터 걸려온 엄마의 전화는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우진아, 이번 학기 등록금은 어떻게든 보낼게… 그런데 아빠가 많이 힘들어서 생활비는 조금 어려울 것 같아. 아껴 써야 해. 다음 학기는 정 안 되면 휴학이나… 한국으로 편입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미안하다.”
“젠장.”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기타를 집어 들었다. 설렘으로 가득해야 할 대학 생활의 시작이었지만, 내겐 죄인의 자리처럼 느껴졌다.
수업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를 했다. 저녁이면 지친 몸을 이끌고 친구들과 밴드 연습실로 향했다. 기타를 잡는 순간만큼은 숨통이 트였다.
“Luke, 정말 미안한데… 나 몇 달만 너희 집 거실에서 지내도 될까? 집 사정이 좀 어려워서.”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날 이후 나는 밴드 친구들과 함께 좁은 집의 거실 바닥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창문 밖에서 밀려오는 여름공기에도, 내 안의 겨울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2012년 10월 12일.
알바를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왔다. 랩톱을 열어 메일함을 확인했을 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발신자: 이수영.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열었다. 잘 지내고 있냐는 안부였지만, 그녀의 글은 나를 단숨에 과거로 데려갔다. 매일같이 포기하고 싶던 나날 속에서, 나는 모처럼 웃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닿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텍스트가 도착했고, 밤이면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왔다.
얼어붙어 가는 토론토의 공기를 녹이는 건 수영의 목소리였다. 전화기 속의 그녀가 설령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라 해도, 그 따뜻한 온기로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다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2012년 11월 21일.
매일이 똑같았다. 아니, 구질구질했다.
아르바이트가 힘들다는 핑계로 대학 수업을 자주 빠졌다. 한국에서 걸려오는 엄마의 전화는 늘 나를 숨 막히게 했다.
얹혀사는 친구의 집은 더 이상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친구의 여자친구가 들어와 살더니, 이제는 여자친구의 친구들까지 모여들어 밤마다 술을 마셨다.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쉴 곳이 필요했다. 내 유일한 쉼은 수영 뿐이었다.
“오빠, 나 방학 때 토론토에 오빠 보러 갈까?”
그녀의 목소리에 돌덩이 같은 무게가 가슴을 눌렀다. 지금까지 해온 거짓말을 한순간에 들킬까 봐 겁이 났다.
친구 집 거실 바닥에 침낭을 깔고 살아가는 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망가진, 초라한 삶을 그녀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어… 그건…”
흔쾌히 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희미해진 시야 속에 수영의 잔상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결국 눈물이 새어 나왔다.
2012년 12월 18일.
“우진아, 엄만데 전화를 안 받네. 이거 들으면 꼭 연락 줘. “
부재중 통화가 두 자릿수를 넘어섰을 때, 나는 그제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의 엄마 목소리는 다급했다.
“아빠 회사… 부도났어.”
머릿속에서 무언가 쾅하고 부서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다.
“뭐라고, 엄마? 아빠는?”
“연락이 안 돼…”
울음 섞인 엄마의 숨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대답을 했다.
“엄마… 내가 갈게. “
그렇게 겨울의 토론토를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모든 것은 이상하게 느리게 움직였다. 낮게 깔린 하늘 아래, 차가운 바람이 유리창을 긁어 내렸다. 공항으로 가는 길, 나는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영에게 안부 한마디 전하고 싶어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반복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다. 닿을 듯 가까워졌던 모든 것이 한순간 먼 쪽으로 밀려났다.
잘 있으라는 말조차 남기지 못한 채, 나는 버거운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머니 속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묵직한 공기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날 이후의 계절은, 내 안에서 조용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2021년 11월. (9년 후)
"어후 추워"
아침 일찍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찬 바람이 부는 날씨라 아직 이른 계절이지만 히터를 틀었다. 커피머신에 원두를 넣고, 잔잔한 재즈 음악을 틀었다.
손님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갓 대학에 들어간 듯 앳된 얼굴의 커플이 손을 잡고 책방 문을 열었다. 빼곡히 꽂혀있는 책장에서 책을 골라, 카운터로 왔다.
“커피는 파시는 건가요?”
“아니요, 무료예요. 그냥 내려 드시면 됩니다.”
남자가 머그컵 두 잔에 커피를 내려 테이블에 앉은 여자에게 갖다 주었다. 책장 표지를 펴고 미소를 지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수영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도서관 한쪽 구석 바닥에 앉아, 늘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모습.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리던 반짝이는 눈빛의 그녀를…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내 첫사랑.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언젠가 만난다면 꼭 이곳에서 만나고 싶은 막연한 꿈이었을까. 작년, 우연히 북클럽에 올라온 광고를 보고 이 책방을 인수하며 간판도 바꿨다. “셰익스피어 책방.”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던 그녀를 위해, 카운터 옆 좁은 공간에는 1인용 패브릭 소파도 들였다. 오렌지빛 조명 아래서 수많은 손님들을 맞이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다. ‘언젠가, 수영이 저 문을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
'후...'
커플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긴 머리에 검은 코트를 걸친 작은 체구의 여자가 들어섰다. 문쪽으로 시선이 향하자마자, 내 눈이, 내 몸이, 내 심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영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를 응시했다.
잠시의 침묵 끝에, 그녀는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뛰어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수영아!”
십 년이 흘렀어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끌어당겼다. 멈춰 있던 시간의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음속의 불꽃이,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피어올랐다. 설령 뜨거운 불꽃에 타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제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다시, 그녀가 찾아왔다.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