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여행 글쓰기
크리스마스 당일, 뉴질랜드 Gisborne의 해안가 캠핑장은 한여름의 열기로 가득했다. 이른 아침부터 코앞의 바다를 참지 못하고 뛰어든 탓에 오전 내내 물놀이에 흠뻑 젖어 있었다. 소금기가 남은 끈적한 살결과 모래알이 서걱거리는 피부는 여전히 투명한 물의 감촉을 갈구하고 있었다. 정오의 태양은 머리 위에서 내리쬐었고, 구름은 시간이 멈춘 듯 느릿하게 푸른 하늘의 여백을 휘저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들은 해에 달궈진 잔디를 밟으며, 뜨겁다는 듯 총총걸음으로 수영장을 향해 달려갔다.
작은 슬라이드가 놓인 야외 수영장에는 오직 우리 가족뿐이었다. 보통 크리스마스의 캠핑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기 마련이지만, 요동치는 일기예보 덕분인지 이 평온한 순간을 독점하는 행운이 우리에게 찾아왔다. 출발 전, 궂은 날씨를 염려하던 기우에도 6박 7일이라는 장박을 결정했을 때 우리는 이미 우중 캠핑의 낭만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첨벙, 두 아들이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코끝을 스치는 클로린 향과 투명한 수영장 물줄기가 오전 내내 바다가 남긴 흔적들을 씻어 내렸다. 셋째 딸은 오빠들에게 뒤질세라 재빨리 슬라이드 계단을 올랐고, 막내는 튜브 위에서 남편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비가 예보되었던 오후였음에도 하늘은 그럴 리 없다는 듯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물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확인을 위해 휴대폰의 날씨 앱을 열었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40%였던 강수확률은 어느새 오렌지빛 주의보로 바뀌어 있었다. 긴급히 뜬 뉴스 속보에는 갑작스러운 호우주의보와 함께 해안가 저지대의 침수 위험을 알리는 경고가 뒤따랐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화면 속 변한 뉴스와는 상관없이 눈앞의 공기는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해변의 파도 소리가 조금 더 거칠어지고 주기가 짧아졌다는 것 정도였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선베드에 주저앉았다. 물에 닿으려던 발가락 끝이 차갑게 굳어갔다. 빗속의 캠핑은 익숙했지만, 호우주의보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텐트 줄을 단단히 고정한다 해도 거센 풍랑은 우리의 보금자리를 뒤흔들 것이고, 자칫하면 잠든 아이들 발밑으로 바닷물이 들이닥칠지도 몰랐다. 무엇보다도, 작년 이맘때 사이클론이 휩쓸고 간 동쪽 해안의 폐허가 머릿속을 스쳤다. 5일 내내 폭우가 쏟아질 것이라는 확정적인 예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우리, 텐트 접을까?”
이곳까지 다섯 시간을 달려온 것이 바로 어제였다. 지금 짐을 챙겨 떠난다 해도 집에 도착하면 이미 늦은 밤일 것이다. 장거리 주행에 지친 두 살 막내는 차 안에서 눈물 섞인 투정을 부릴 게 뻔했다. 하지만 남편 역시 내 눈빛에 담긴 우려를 읽어냈고, 우리는 남은 휴가를 폭우 속 공포를 감내하기보다는 모두를 위한 퇴각을 선택했다.
물속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함성을 지르는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고하기란 쉽지 않았다. 무거운 말을 내뱉은 찰나, 둘째의 입에서는 거부의 비명이 터져 나왔고 셋째의 눈망울엔 금세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는 낮잠 시간이 되었는지 졸린 눈을 비볐고, 첫째는 말없이 젖은 몸을 일으켜 수영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우리는 다시 텐트로 돌아갔다. 자연의 일분일초는 인간의 계획을 비웃듯 여행의 경로를 통째로 뒤바꿔놓는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