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 자리에 앉을 걸 그랬어. 자리 옆 좁은 통로로 승객들이 끊임없이 지나간다. 캐리어 바퀴가 구르는 소리, 오버헤드 빈이 열렸다 닫히는 그리고 다시 또 열리는 소리.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 귀 안을 세게 두드렸다. 손바닥의 땀은 좌석의 천을 적셨고, 나는 그 미끄러운 감촉을 지우려다 이내 포기했다.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좌석 아래 가방에서 귀마개와 한강의 책을 꺼내 무릎 위에 두고, 가방을 내리려다가 다시 열어 약 봉투를 꺼냈다. 이륙 전 승무원들은 분주했다. 뒤를 돌아 간신히 부르려던 찰나 내 앞에 한 남자가 섰다.
"Excuse me."
열려 있던 짐칸 문에 닿을 듯 구부정한 자세로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 안쪽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핏기 없는 흰 얼굴로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복도로 나온 김에 승무원을 불렀다. 약을 먹어야 한다는 내 말에 승무원은 곧 컵에 물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신경안정제가 든 봉지를 찢어 입으로 털어 넣었다. 옆자리의 남자는 반쯤 가려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귀마개를 귀에 꽂고 눈을 감았다. 호흡은 조금 더 당겨졌다. 매번 미루었던 출장을 더 이상 미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비행기를 탈 수 없겠다고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었다. 옆 좌석의 남자 때문이었다. 12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내 옆자리에 얼핏 나와 동년배로 보이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가 탈 것이라고 예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충동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지만, 마지막 연애를 끝낸 지 2년이 넘은 지금, 좁은 기내의 공기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몸은 빠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얕은 잠에서 눈을 떴다. 비행기는 겨우 이륙한 뒤였다. 옆 좌석 남자의 간이 테이블 위에 검은색 줄이 촘촘히 그어져 있는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펜을 손에 쥐어 든 그는 빈 편지지를 보고 있었다. 누구에게 쓰는 편지인지는 나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검은 펜이 가장 윗줄을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어쩌면 그도.
승무원들은 식사 준비를 하는 탓에 다시 바삐 움직였다. 신경안정제 덕분인지, 옆자리 열린 창 덕분인지 내 호흡은 잦아들었다. 책장을 넘기려던 때, 옆자리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고, 반 박자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Excuse me. Are you Korean?"
내 손에 쥔 책의 표지를 보았을까. 아니, 어쩌면 단순히 나에게 말을 건넬 구실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한국말 잘 못 해서. 저는 Ryan입니다. 한국 이름 경수."
"진희예요"
"지니, can you help me write in Korean? 편지 써요."
"뭘 쓰고 싶죠?"
"Mom, 엄마라고 여기 써주세요."
그는 줄이 그어진 편지지 대신 비어있는 흰 종이를 꺼냈다. 그가 건넨 펜과 종이가 내 앞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오랜만에 잡은 펜의 표면은 거칠었다. 엄지와 중지에 꾹 누르는 힘을 가하며 '엄마'라고 적는 손이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꾹 눌러쓴 검은 글씨를 겨우 눈에서 떼어 내고 종이를 건넸다.
그는 종이를 가까이 쥐고 내가 쓴 글자를 확인했다. 다시 재빨리 펜을 쥐고 영어로 몇 자 적어서는 내 앞에 내밀었다.
I missed you.
나는 고개를 빨리 들 만큼의 반사신경이 없었다. 채 마르지 않은 검은 펜 자국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글자를 흐트러뜨렸다.
"Are you okay?"
경수는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나는 그의 눈을 보았다. 물방울처럼 투명한 검은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쳤다. 당황한 듯 경직된 그의 표정은 낯설지 않았다. 어쩐지 내가 잃어버린 누군가의 얼굴을 닮아 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재빨리 눈물을 닦고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니. 괜찮을 리 없었다. 그는 한참 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말없이 내가 건넨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줄이 그어진 편지지 위로 천천히 글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엄마, 나 경수예요. 나는 한국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훔쳐보지 말았어야 했다.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끝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그 문장들 위를 배회했다. 뜨거운 숨이 울컥 차올랐을 때, 급히 복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물의 흔적을 지웠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샤아아악. 화장실 세면대에 물이 떨어졌다. 고개를 반쯤 숙여 낮은 세면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남은 눈물을 씻어냈다. ‘엄마'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왜 아기들 입에서 나오는 첫 번째 단어는 늘 ㅁ을 담고 있어야 했을까. Mom, 엄마, mom. 메마른 공기 속에서 나는 그 단어들을 반복하다 결국 침과 함께 삼켜버렸다.
세면대 위 작은 박스에서 티슈를 꺼내 눈가를 닦아냈다. 나의 엄마는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긴 암 투병은 결국 장례식장에서 끝을 맺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는 마지막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무언가를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으니까. 그렇게 다섯 해가 지났다.
물소리가 멈추고 거울 속의 얼굴을 확인했다. Ryan도, 아니 경수도 엄마를 불러본 적이 있을까. 불편한 생각을 하며 무거운 화장실 문을 밀어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괜찮아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 다 쓰셨어요?"
이번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세요?"
"엄마 만나러 갑니다. 잃어버렸어요. when I was six."
"처음인가요?”
나를 보는 경수의 검은 눈동자가 대답을 대신했다.
"지니는 어디 가세요?"
"집으로요. 한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