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잘 챙기는 사람이라면 오래 행복할 수 있을 테니까
신랑은 7년차 난치병 환자, 그리고 나는 간호사. 네이밍만 보면 너무 잘 만난 부부인 것 같지만 언제나 현실은 예상과 다르듯 나도 신랑을 만나며 고민한 적이 있었다.
처음 만날 때부터 신랑, 그러니까 남자친구가 난치병 환자라는 걸 안 건 아니었다. 조그맣게 병이 있다고는 했지만 큰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어떤 약을 먹는지도 잘 몰랐다. 우연히 약을 먹는 것을 보고 무슨 약이냐고 물었고, 그제서야 병의 이름과 함께 면역억제제를 복용 중인 걸 알게 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일했기에 면역억제제의 기능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기능을 아는 것보다도 일할 때의 우선순위에서부터 여타 약들과 다르기도 했다. 다른 어떤 응급 상황이 있어도 면역억제제는 제시간에 챙겨야 하는 약. 제시간이라는 말의 의미는 식전, 식후 정도가 아닌 정확한 그 시간이어야 한다는 뜻이라서. 몸에 남아있는 약물의 잔량까지 중요해서, 면역억제제를 먹는 환자들은 혈중 농도까지 매번 체크해야 했다. 물론 신랑은 중환자실에 들어간 적은 없다고 하니 다행이지만.
신랑이 난치병이 있고 면역억제제를 비롯해 꾸준히 먹어야 하는 약을 복용 중인 걸 알게 된 나는 약을 잘 먹고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당시의 나는 정신전문병원의 폐쇄병동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약을 잘 먹지 않아 병원에 온 경우를 너무 많이 본 상태였다. 중환자실에 있을 때는 약을 열심히 주고 처치해도 사망하는 분들이 많아 힘들었는데, 정신병원에서는 나아졌다고 생각한 환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게 못내 괴로웠다.
사실상 쌩판 남인 간호사로서 보는 환자들도 마음이 안 좋았는데, 어쩌면 내 삶의 반려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에게서 좌절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주변에 처방대로 약을 먹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다른 어떤 것보다 정말 편의의 문제라는 생각.
당장 얼마 전 우리 아빠만 해도 장염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배고프니 밥은 먹어야 한다며 양껏 모든 걸 드셨다. 덕분에 치료는 한참 더뎌졌고 더 오랜 시간 고생하셔야 했다. 막상 아플 때는 병원에 가지만, 스스로 느끼는 불편감이 크지 않으면 점차 약을 먹지 않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아프지 않으면 약 먹는 것 자체를 잊어버리기 쉽기도 하니까.
*자칫 가벼워보일 수 있는 감기로 인한 약물이고 증상이 나았을지라도, 약물에 따라 처방된 약을 모두 다 먹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이 부분은 증상마다 사람마다 약마다 다르기에 처방을 받을 때 바로 의사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좋다.
다행히 신랑은 달랐다.
다른 것에는 별다른 의욕이 없는 사람이고, 생에 대한 의지도 내가 볼 때는 그리 확고하지 않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약을 먹는 것만큼은 꾸준히 성실하게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연애 초반, 그가 하기 싫다면서도 몇 시간을 꼼짝하지 않고 집중해서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진득하게 일을 해요? 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그냥 묵묵히, 꾸준히, 성실히, 앉아서 하면 돼요. 그게 쉬운 거였으면 세상 모두가 공부를 잘했을 거고, 세상 모두가 똑똑했을 거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반박을 하기에는 우리는 아직 풋풋한 사이였으니까 :)
신랑은 그러한 성격만큼이나 약에 있어서도 미련하리만치 성실했다. 술을 먹고 들어와도 잊지 않고 약을 챙겨먹었고,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에 들었다가도 약 먹는 시간이면 기가 막히게 딱 맞춰 일어났다. 여행지에 가서 시차가 바뀌어도 다음날 물어보면 맞춰서 챙겨먹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신기했다. 이렇게 약을 잘 챙겨먹다니. 단순히 빨리 치료하고 싶다는 의지를 넘어선 성실함이었달까. 아니, 귀찮음을 이겨내는 게 성실함이라는 단어만으로 설명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 내 옆에 있는 남자는 성실할 뿐 아니라 귀찮음조차 정말 잘 이겨내는 사람이라는 것.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살던 때에도 그의 면면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확신만 더 생겼다. 자기 전, 이미 누운 상태에서도 내가 초코우유를 먹고 싶다고 하면 나갔다 오는 사람. 음식물 쓰레기는 생기자마자 버리고 오는 사람. 출근 전에도 꼭 청소기를 돌리고 가는 사람. 나조차도 따라하기 힘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라면
병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건강하기 위해 잘 행동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는 병도 알지 못하는 병도 자꾸만 많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내게는 당장에 병이 있는 것보다 병을 잘 관리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신랑이 규칙적으로 빼놓지 않고 약을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글쎄, 어쩌면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병을 잘 관리한다는 건 자기 자신을 아끼는 것의 일환일테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배우자의 건강도 많이 생각해줄테니까.
아예 아프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인간이 아프지 않고 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오히려 큰 병이 있음에도 관리를 잘하는 신랑을 보면서, 작은 병도 잘 관리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는 앞으로도 건강하고 더 건강하게 살 것이다. 나와 함께 오-래오래.
✨본 매거진에서는 난치병이 있는 남편과 함께 사는 배우자로서의 삶과 생각을 씁니다. 이전 글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