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에서 해방된 내편
우리 부부는 지금 치앙마이로 여행을 와 있다. 옛 한달살기 기억이 너무 좋았기에 신랑과 함께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이번 여행은 무려 두 달 반 가량 지속될 예정.
사실 치앙마이가 좋아서 오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신랑에게 진정한 휴식을 선물해주고 싶었던 것도 컸다. 나의 경험상 회사를 퇴사한 후에는 퇴사 여행이 꼭 필요했던 것 같았기 때문.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2년 간 직장을 다니며 많이도 아팠다. 마지막에는 정말 온몸에서 소리를 질러대서 병원비로만 수백만 원이 쓰였으니. 각종 병원을 다니며 들은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강하게 살라는 말씀들은, 그때의 나는 할 수 없던 것들이었다.
퇴사를 하고나면 몸도 마음도 괜찮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병든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었는지 할 일이 없음에도 쉬지를 못했다. 마음 한 켠에는 늘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고 몸은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되돌아오곤 했다. 병원에 가면 스테로이드가 늘 처방됐으니, 아마 가벼운 증상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로부터 '독을 빼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서 진정한 휴식을 취하기로 결심했고, 나는 꿈꿔오던 미국 여행을 떠났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있기도 했고 그냥 왠지 자유를 얻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달까. 결과적으로 나는 그곳에서 몸과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 미국 여행을 다녀와서야 비로소 나를 마주할 수 있었고, 회사로부터 마음까지 벗어나 하고 싶은 것들을 차근차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신랑에게도
진짜 해방을 주고 싶었다.
고작 2년 회사를 다녔던 나도 이러했는데, 10년이라는 긴 시간 직장생활을 했던 그에게는 얼마나 큰 휴식이 필요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퇴사를 했다지만 바로 주부로 이직을 해버렸으니,,, 이건 퇴사를 했다고 하기에도 애매하지 않은가.
집안일에서 멀리 떨어져 쉴 수 있도록 아예 외국에 길게 나가 사는 것. 이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는 떠나오기 전까지 계속 걱정이 많았다. 집안 관리를 어떻게 하냐는 것부터 미리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가장 큰 걱정은 수도관 동파였다. 우리 집은 복도식 아파트이기 때문에 작년에도 동파를 주의하라는 방송을 들었고, 관리사무소에서도 간혹 동파되는 집들이 있다고 했었다. 물론 우리 집은 아무 일 없었지만.
걱정이 많은 그를 위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수도계량기를 관할하는 주무관님 번호를 찾아 디지털 계량기로 검침함(문을 여닫지 않음)을 확인했고, 관리사무소로부터 올해는 열선을 깔았으니 옷을 충분히 넣어두면 괜찮을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추가적으로 계량기를 확인할 때 주의해줄 것을 당부하고 앞에도 문구를 붙여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시부모님께 부탁해서 종종 집 관리까지 부탁드리니(시부모님 사랑합니다♥) 신랑도 그제야 안심한 것 같은 모양.
치앙마이에 온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매일 순간순간을 만끽하고 있다. 살며 처음 가보는 동남아의 야시장 거리, 외국인과의 스몰 토크를 하며 웃는 순간, 햇볕 아래에선 매우 후덥지근하지만 그늘로 가면 시원한 날씨, 현지에서 맛보는 맛있는 타이 밀크티까지. 예상과 다른 순간들도 많지만 즐거운 순간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즐기고 있다.
사실 신랑이 여행을 오기 전 고민이 참 많기에 나도 괜한 결정을 내린 걸까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웬걸, 막상 와보니 나보다도 더 잘 노는 모습이다. 치앙마이에 처음 와본 그에게는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재밌는 것들 투성인가 보다. 게다가 세계사와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그는 태국 역사책도 구매해서 왔는데, 역사와 식문화를 연결지으며 밥 먹을 때마다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청양고추가 태국 고추와 국산 고추를 접합해서 만든 거라는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그를 보며, 어쨌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
아마 오늘은 하루종일 누워있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집에서도 집안일을 끝내고 나면 잠시 휴식을 취한다며 누워있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일 중간에 잠시 쉬는 거라 진짜 휴식이라 느끼지는 못했나보다. 아침은 근처 빵집에서 사다 로비의 커피와 함께 먹었고, 점심은 저번에 맛있게 먹었던 식당에서 배달시켜 먹기로 했다. 저녁에 시원해지면 슬쩍 나가보기로 일정을 정한 이후, 나는 일을 시작했고 신랑은 벌러덩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아, 좋다. 진짜 여유롭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도 꽤 여유로운 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역시 여행을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와서도 빨래와 청소를 비롯해 집안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기에, 아무리 가볍다 해도 큰 차이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집안일이란 정말 주부로서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순간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뜨는 건, 어쩌면 나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집안일을 하는 사람과 회사일을 하는 사람을 주기적으로 바꾸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아마도 두 역할 간의 갈등은 작게나마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적 갈등이든 외적 갈등이든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꼭 해결해야 할 과제. 우리는 그저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살 뿐이다 :)
✨본 매거진에서는 주부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을 담습니다. 남편이 주부가 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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