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인 남편에게 더욱 별로였던 제주 한달살기
우리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도 사람마다 스타일이 천차만별인데, 신기하게도 우리의 여행 스타일은 연애 시절부터 잘 맞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즐기지 않는 그와 나는 유명 관광지보다는 현지인들이 다니는 동네 골목을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희귀하고 멋있지만 비싼 레스토랑보다는 저렴하지만 깨끗하고 맛있는 작은 식당을 다녔다. 그렇게 다니다가 운좋게 엄청난 맛집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현지 사람들이 퇴근 후 아이들과 노는 공원, 주말이면 현지 힙순힙돌이들이 찾는 미술관, 감성 가득한 편집샵을 다니는 것도 좋았다. 유명하다는 곳을 아무리 많이 가도 지치기만 했는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하는 여행은 정말 편안하고 좋기만 했다.
점차 우리는 살아보는 여행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사하게도 나의 일이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일이라서, 올해 봄 제주에서 한 달 살이를 할 수 있었다. 가기 전부터 굉장히 기대가 컸고, 분명 재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제주에서의 한달살기란 서울에서의 한달살기와 다르지 않았다. 같은 한국이기에 물가도 더 싸지 않았고 제주 맛집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특별해보이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살림도 해야했다. 1박2일 호텔을 가도 머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하는 우리였다. 하물며 이번에는 거의 한 달을 머물 숙소였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 우리는 바로 청소를 하고 필요한 비품 중 모자라는 것들을 확인했다. 기본 제공 품목은 요청하고 나머지는 마트에 가서 살 요량으로 적어두었고, 옷장에 옷을 정리했다. 마트가는 길에는 숙소 근처 제주 사투리가 가득한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빈자리 하나 없이 훈훈하게 꽉 찬 분위기는 엄청난 맛집이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먹어본 흑돼지 김치찌개는 생각보다 비렸다. 피곤해서 맛을 잘 못 느낀 게 아닐까 싶지만 꼭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후의 맛집들에서 느낀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아직 설렘이 가득 남은 첫날이었다.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면서 제주 마트는 더 싸서 신기하다는 둥, 이건 집에 돌아가서도 사야겠다는 둥 즐겁게 쇼핑을 했다. 아침으로 먹을 간단한 과일과 요거트를 사서 돌아왔는데, 신랑은 쉬지도 않고 앞으로 사용할 식기들을 설거지했다.
다음날 아침, 과일을 깎아 먹는데 집에서랑 다를 바가 없어서 되려 이상했다. 여행지에서의 설렘은 하루 만에 증발해버렸고, 비좁은 주방에서 과일을 깎는 신랑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건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도서관도 가보고 편집샵과 유명한 카페도 가보았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은 끊이지 않았다. 제주는 한국이었고 무언가 특별함을 기대한다면 나도 특별한 것을 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주가 특별할 것이라 기대해서였을까. 우리의 일상은 특별해지지 않았다.
이름부터 ‘살이’라서일까. 작정하고 살려하니 일상이 되었버렸고 생각보다 힘든 점은 더 많았다. 제주는 비가 정말 자주 왔다. 날씨 좋은 4월이라는데 맑게 개인 하늘을 보는 날은 손에 꼽았고, 바람마저 매서워 결국 겨울 옷을 사야했다. 마트를 제외한 섬의 물가는 비쌌고, 요일에 관계없이 쉬는 음식점도 정말 많았다.
와중에 나는 회사일도 해야 하니 신랑을 혼자 두는 시간이 생기면서 자꾸만 미안해졌다. 신랑은 평소에도 내가 일을 할 때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거나 만화를 보며 누워있을 때가 많은데, 여행에 가면 유독 바깥을 바라보며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많다. 바다가 보이는 숙소로 굳이 예약하기는 했지만, 스튜디오룸의 작은 창으로 밖을 바라보게 하는 게 미안했다.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샘솟음과 동시에 한없이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맛집을 가는 것도 한 몫하는데. 맛집으로 알려진 곳들은 대체로 육지에서도 맛볼수 있는 것들이거나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유명한 흑돼지고기 맛집도 가보았으나, 돌아온 건 결국 우리는 흑돼지 고기의 냄새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는 밥집들을 찾으면 휴무일이 아님에도 문 닫은 곳이 많아 헛걸음하기 일쑤였고, 몇 차례 실패하자 신랑은 밥집을 찾는 것 자체에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부담갖지 말자고 해도 밥하는 게 자기 일이라며 떨쳐내지를 못했다.
제주에 잘 온 걸까, 라는 절망에 한창 빠져있을 무렵. 신랑의 지인 중 제주에 살고 계시는 분에게 연락을 받았다. 두 분은 결혼을 앞두고 함께 제주에 자리를 잡은 커플이었는데, 마침 연락이 닿게 된 것. 바로 다음날, 우리 숙소 근처 이자카야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청첩장을 받았다. 짧았지만 즐거운 시간이었기에 다음날에는 집에 초대받아 놀러가게 되었고, 추천받은 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밥을 먹었다. 백돼지 고기였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했다. 다시 육지에 돌아가기로. 제주 한달살기는 그렇게 3주 살기로 마무리되었다. 앞으로 긴 여행은 제주로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신랑이 비좁은 주방에서 요리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게 살게 하려고 주부를 시켜준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하기보다는 앞으로의 여행을 더 행복하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요즘 우리는 치앙마이 여행을 계획 중인데 좋은 숙소를 가고 싶어서 매일 밤마다 태국 부동산 사이트를 돌고 있다. 이번 여행에 내 1순위는 무조건 숙소다. 이번에는 신랑에게 진짜 휴가를 선물해주고 싶다 :)
우리는 여전히 현지 사람들처럼 살아보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것이 너무 익숙한 일상과는 달랐으면 좋겠다고 여길 뿐이다.
✨본 매거진은 주부가 된 남편(신랑이 아직 더 입에 붙네요)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