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춤은 사이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발레리나 알리스 르나방(Alice Renavand)

by 니나



"나를 매혹시킨 풍경과 여성들"


1화 당신의 춤은 사이공을 떠올리게 합니다. 발레리나 알리스 르나방(Alice Renavand)




벌써 10년도 더 된 2013년의 일이다. 새해를 맞아 엄마와 일주일간 베트남 호치민으로 여행을 떠났다. 호치민에 오랫동안 일하며 살고 있는 엄마의 친구를 만날 겸 겨울방학을 맞아 떠난 모처럼만의 여행이었다.



한겨울의 한국과는 달리 2월의 베트남은 베트남의 두 가지 절기 가운데 건기의 가장 달콤한 계절이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시원한, 태양이 이곳을 완전히 안아주고 있는 듯한 시기에 와서였는지도 모른다.

태양빛에 반사된 바랜듯한 노란색의 벽이, 파스텔톤의 건물들이 나를 얼마나 단숨에 사로잡았는지.





다시 호치민을 찾았던 건 2020년, 전에 비하면 확연히 발전한 도시의 풍경에 새삼 놀랐다. 2013년만 해도 호치민은 도심이어도 아직 개발이 덜 된 도시의 한가로움이 만연해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금방 호치민의 날씨와 사랑에 빠졌고 특유의 느림마저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조용하면서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열대지방의 이국적인 풍경은 베트남에 대한 흥미로움과 호기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호치민 길거리를 걸어 다닐 때면 쉽사리 눈에 띄는 오래된 서양식 건물양식과의 조화가 무척 아름다워서 마치 영화 속 장소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왠지 조금 더 낭만적으로 들리는 호치민의 옛 이름, 사이공.



호치민에 가서 베트남이 한동안 프랑스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서 보았던 노트르담 성당과 이름이 똑같은 성당이 호치민 시내 한복판에 놓여 있고 오페라 극장(하우스)이나 호치민 중앙 우체국 등 도시 이곳저곳에 랜드마크처럼 있는 서양식 건축물들에서 프랑스식 분위기가 나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요즘은 상황이 많이 진전되어 베트남이 더 이상 이전처럼 낮은 개발단계 국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부터 1950년대의 중반까지 약 70년 간 지속된 프랑스의 베트남 통치의 흔적은 발전이 더딘 개발도상국에 아직 남아 호치민에 빛바랜 서양식 건물들을 더욱 아련하게 만들었다.



한국의 매서운 겨울로부터 벗어나 갑작스레 만난 후덥지근하고도 시원한 여름철과 베트남의 색다른 풍경,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좋아해 온 프랑스 문화가 고스란히 녹여져 있는 호치민은 그렇게 내가 특별하게 사랑하는 도시가 되었다. 나는 그렇게 하나 속에 두 가지의 뚜렷한 대비를 가지고 있으면서 묘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를 매혹시킨 여성으로 처음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2년 전 현역에서 은퇴한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베트남계 프랑스인 에투알(수석 무용수), 발레리나 알리스 르나방(Alice Renavand)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알리스는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자란 베트남 프랑스 혼혈이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무용수이면 으레 그렇듯 알리스 르나방도 아주 어린 나이부터 엘리트 발레리나 코스를 밟아왔다. 특별히 고유의 강렬함과 클래식, 컨템퍼러리 댄스를 넘나드는 다재다능함으로 유명한 발레리나이다.







내가 처음 알리스 르나방의 춤을 보았을 때 알리스가 특별히 좋았던 이유는 춤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일반적인 클래식 발레리나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그녀만의 표현력과 강렬한 힘, 에너지 때문이었다. 거기에 동서양이 오묘하게 섞인 남다른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고, 한 명의 무용수에게서 클래식 발레의 고상한 아름다움과 현대무용의 소울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현대무용을 전공했지만 학교에서는 발레를 함께 배웠다. 나의 성향과 기질은 보다 자유롭고 에너지 넘치는 현대무용이었지만 언제나 발레의 격조 있는 우아함을 동경하였다. 무대 위에서 하늘을 향해 새처럼 날아오르며 춤추는 무용수를 볼 때면 늘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리스 르나방이 점프할 때는 마치 수동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순간처럼 시선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허물고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 피나 바우쉬는 지금도 현대무용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이다. 그런 피나 바우쉬가 파리오페라발레단의 무용수들과 협업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때 시그니처 작품 중 하나인 ‘봄의 제전’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발레리나는 다름 아닌 알리스 르나방이었다.



'봄의 제전'은 대지의 신에게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줄거리를 다룬다. 원시적이고 강렬한 움직임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작품의 마지막 순간에는 붉은 천을 들고 제물로 바쳐지는 여성 무용수의 옷의 한쪽 끈이 벗겨지면서 가슴이 노출되게 만든다. 제물의 원시성과 희생성을 더욱 극렬하게 표현하며 원초적 에너지와 더불어 에로틱함까지 드러내는 작품이다.



현대무용의 대모 피나가 본 것은 알리스 르나방의 파리오페라발레단 발레리나로서의 출중한 테크닉을 넘어선 그녀만의 표현력과 내재된 뜨거움이었을 것이다. 알리스 르나방이 가진 아우라와 모든 기량이 봄의 제전의 주인공과 바로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L'Étoile Alice Renavand pour le Sacre du Printemps, de Pina Bausch_  By Julien Benhamou #balletoperadeparis #operanationaldeparis #sacreduprintemps.jpeg




알리스는 많은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다. 발레리나의 삶을 완전히 접으려 했던 어려운 시기가 있었고, 큰 스트레스로 인해 발레리나로서는 치명적 이게도 살이 아주 많이 쪘었다고. 그런데 가장 절망적이었던 때 피나 바우쉬는 알리스를 그녀 작품의 주인공으로 택하였다. 이는 알리스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되었고 이때부터 에투알로 성장하는 여정의 핵심적인 작품들의 주역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서른세 살의 나이 그녀는 마침내 에투알이 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가 된다 하더라도 에투알(파리오페라발레단의 수석무용수이자 주역무용수)이 되지 못하는 발레리나가 대부분이다. 어두운 하늘 속에서 소수의 반짝이는 별(Étoile)처럼 눈부신 존재가 되기에 수석무용수를 에투알로 명명한다는 것도 참으로 프랑스식이라고 생각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을 은퇴한 지금도 알리스는 다른 무용수들과 협업을 하는데 특별히 최근에 나의 눈을 사로잡은 작품은 ‘Empreintes(흔적들)’이다. 움직임이 남기는 감정의 흔적, 관계의 잔상과 존재의 자취를 다룬다. 경건하고 성스러운 장소 성당, 그러나 성당으로서의 기능이 해체된 장소에서 토슈즈를 벗고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알리스와 모던한 옷차림의 크럼프('Kingdom Radically Uplifted Mighty Praise' '왕국을 격렬하게 드높이는 힘센 찬양'이라는 뜻의 약자로, 다양한 감정을 격렬하고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스트릿 댄스의 한 장르이다.) 남자 무용수와의 앙상블은 아, 정말이지 근사하기 이를 데 없다.


무용수들이 느끼는 감정의 본질과 관계의 뜨거움을 춤으로 표현할 때 그 어떤 말 보다 강렬하게 전해진다. 발레의 우아함과 크럼프의 조화로 이뤄진 그들의 움직임이 한없이 매력적이어서 나 역시 이런 춤을 출 수 있다면, 하고 바랐다.




Empreintes, Alice Renavand & Grichka Caruge

https://www.youtube.com/watch?v=9eO3BhqMXf4






미국의 유명한 여류 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수전 손택은 그녀의 에세이 <무용수와 춤>에서 이렇게 말했다.


“춤은 춤에 대한 밑그림, 즉 안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춤은 곧 무용수이다.”



“위대한 무용수는 단순히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무용수로서 존재한다. 그는 가장 뛰어난 오딜과 오데트, 혹은 가장 뛰어난 알프레히트가 될 수 있다. 어느 가수가 가장 뛰어난 토스카, 보리스, 카르만, 지클린데 혹은 돈 조반니가 될 수 있듯이, 혹은 어느 배우가 가장 뛰어난 노라, 햄릿, 파우스트, 페드라, 혹은 위니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공연예술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연기자에게 쏠리기 마련이다.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매번 새로워지는 것은, 이 연기자 혹은 연주자가 어떻게 이 작품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고 어느 부분을 강조하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춤을 환상의 창조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춤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육체에 대한 환상이다. 또한 지치지 않는 육체라는 환상을 더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대에 올려진 육체의 변화를 춤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춤은 육체 안에 존재하는 무엇을 보여주는 동시에 육체를 초월하는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리시니코프 같은 최고의 재능을 가진 무용수들은 완전한 집중의 상태를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배우나 가수나 연주자들이 뛰어난 공연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공연 그 자체이며 공연의 핵심이다.”


수전 손택은 이렇게 춤이라는 공연예술에서 한 명의 무용수가 작품에 끼치는 크고 중요한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리스 르나방은 일반적인 발레리나들처럼 부서질 듯 하늘거리는 체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 힘이 있고 단단하면서도 유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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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의 강렬하고 수려한 춤, 손 끝과 회전과 도약 속에서 내가 잘 알 수 없는 그녀의 인생을 한 번 더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발레리나로서 가장 매력적인, 부드러움과 힘이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얼굴을 본다. 동남아시아 한복판에서 서양을 느낄 수 있는 사이공처럼.


무엇보다 삶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최고가 된 무용수여서 더욱 그렇다.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던 시기를 극복하고 명실상부 세계 최고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로 은퇴하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큰 귀감이 된다.






Etoile Alice Renavand

https://www.youtube.com/watch?v=uUaFWCFLJC4



"몸은 평평하지 않다. 그래서 분명히 우리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나의 존재는 바닥에서부터 원형적인 방식으로 퍼져 나오듯 앞으로, 옆으로, 그리고 뒤로 뻗어 나와야 한다.

춤은 움직임과 제스처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공간을 채우거나,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나, 우리가 뚫고 지나가거나 뒤에 남겨두거나, 혹은 건너는 공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 밤하늘에서 바라보는 별들은 각기 다른 시점의 별들이라고 한다.


그저 오페라 가르니에 극장에서 춤을 추던 알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덧.

특별히 사이공의 향수를 물씬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조용한 미국인”

킴 투이의 소설 “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