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by 포비

여느 연인과 같은 그런 사랑을 했다. 사실 내가 그녀와 하고싶었던 것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들이었던 것 같다. 자기전에 전화를 하고, 일을 마치면 집 앞에서 만나 잠시 산책을 하는 그런 일들 말이다. 먹고싶은 음식이 있으면 서로를 떠올리고, 보고싶은 영화가 있으면 손을 잡고 보는 그런 일들.

시간이 지나갈수록 점점 바빠지는 우리였지만 서로에게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린 사랑에서 조금씩 성숙해지는 과정이었다. 그녀가 먼저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 나도 곧 대학원에 들어갔다. 우리는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같이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 가끔은 그녀가 내 곁에 없는 나의 일상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매번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곤 했다. 어쩌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그럴때마다 더욱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하루는 그녀의 회사 앞 바에서 술을 마셨다. 자주가던 학교앞 그 바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어둡고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재즈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나는 바에 가면 테이블보다 바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처음 바에 갔을 때 그동안은 매번 친구들과 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다고 말하던 그녀는 이제는 나와 함께 자연스럽게 바로 향한다.

나는 갓파더, 그녀는 모히또를 시켰다. 그녀는 취해가는 과정이 달콤했으면 좋겠다면 매번 같은 술을 시켰고, 나는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시도하는 편이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나눈다. 하는 일을 어떤지, 공부는 잘 하고 있는지, 뭐 이런 일상적이고 무난한 대화부터 최근에 보고싶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까지 오간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사랑의 온도와 방식이 꽤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뜨겁고 깊은 사랑을 원했고, 그녀는 잔잔하게 스며드는 사랑을 바랬다. 이런 차이로 우리가 다툰적은 없지만 어느순간 서로를 바라보니 그 중간 어딘가에 위치한 미지근하면서도 더 이상 온도가 변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고있었다.

그녀는 아직은 회사에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어색하다고 말했다. 학교에 다닐때에는 빨리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지만 막상 회사에 오니 학생이 그립다고.

나는 아직 학생이라 그런지 빨리 사회에 나가고 싶다는 말을 건낸다. 돈도 벌고, 경험도 하면서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것 같다. 나는 하고싶은 것이 너무 많아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말하니 그녀가 웃는다. 자기도 열심히 살고있으니 금방 그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술을 한모금 마신다.


나는 나중에 유럽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싶은 꿈이 있다. 숲속인 것 같지만 깊은 숲속은 아닌, 작은 도시이지만 조금만 나가면 큰 도시가 있는 그런 곳에서 내 취향을 눌러담은 집을 짓고 살아가고 싶다. 마당에는 흔들의자를 설치하고, 포도나무를 심고 작은 텃밭도 소박하게 만들어 둘 생각이다.

날씨 좋은 날이면 마당에 나가 좋아하는 와인을 한잔 마시면서 별들을 만나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유리창 너머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잔 마시는 그런 삶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내 꿈에 너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해본다.


이런 꿈을 이야기할 때 내 눈이 반짝거린다고 그녀는 말한다. 매번 같은 말을 하면서도 이렇게 계속 설레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한다. 그러고는 꿈을 응원한다며 맑은 미소를 날린다. 꿈을 잃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은 늘 아름답지만 노란 조명때문인지 유독 빛난다.


그녀는 곧 시작하는 새 프로젝트에서 꽤 큰 역할을 맡는다고 한다. 이 일을 시작으로 신입사원에서 정식 직원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긴장도 되지만 설렌다고 한다. 나는 너라면 잘 할거라고, 하던대로만 하면 걱정할 필요 없을거라며 응원을 해본다. 조금 바빠질 것 같다고 한다. 나도 이제 곧 졸업이라 정신없을 것 같다고 같이 잘 이겨내보자고 말한다. 늘 그랬던 것처럼 잘 하자고 서로를 응원해본다. 조금 취기가 오른 채 밖으로 나서니 수많은 사람들로 정신이 없었던 여의도는 어두운 바다가 되어있었다.


손을 잡고 걷다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에 도착했고, 우리는 매번 같은 방식으로 작별인사를 나눈다. 이제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내 일상이다.


집에 도착해서 편지를 적어본다. 워낙 글을 쓰는것을 좋아해서 그런지 편지를 쓰는 행위는 나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말로 하기는 조금 어려운 말들을 꾹 눌러 작은 종이에 포장한다.

처음 그녀에게 편지를 썼을 때는 그녀의 생일이었다. 작은 꽃 한송이와 함께 전달해준 그 편지를 그녀는 아직도 서랍 속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시간이 꽤 지나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내 편지를 보고 감동을 받아다는 그녀의 표정은 잊을 수 없다.


그 뒤로도 종종 편지를 썼었다. 군대에 있을때, 처음으로 여행을 갔을 때, 꽤 많이 썼던 것 같다. 오늘의 편지에는 조금 더 깊은 내용을 적어보려 한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취업을 하고 자리를 잡아가는데 아직 그러지 못한 내 상황에서 비롯된 약간의 자책과 앞으로 더 나은 사랑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본다. 매번 사랑한다는 말로만 가득 채우고 싶지는 않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나눠야 할 말들이 있다면 담담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것이 작은 균열을 불러일으킬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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